믿음의 의미 (눅 17:5~10)
오늘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믿음에 대해 참 많이 들어오셨겠지만, “과연 내가 아는 믿음이 진짜일까?” 돌아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을 경험하고, 24시간 곁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이들인데, 정작 자기들 안에 “믿음이 부족하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또한 이 믿음이 자기들 노력으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결심한다고 확 믿음이 들어와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중학교 시절에 “내가 정말 믿음이 있나,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나?” 하며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집안 환경상, 유교 전통, 원불교, 그리고 교회 다니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하며, “정말 이 길만 진리인가?” 책들도 찾아 읽고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 시절, 저는 우울해지고 예민해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찬송 부르면 “조용히 좀 해주세요, 공부 집중 안 되잖아요”라고 말했고, 교회 가서 사도신경이 “믿고 믿고 믿고…” 하는 부분을 외우려니, 내 안에 “나는 과연 믿는가?” 하는 의문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친구에게 전도하려는 모습을 보니, ‘내 안에 무언가 믿음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도통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결국 제가 깨달은 것은,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라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주시는” 방식보다는, 겨자씨 비유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던져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즉, 예수님 곁을 따르던 제자들에게조차 “너희에게 아직 믿음이 없다. 겨자씨만큼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뿌리를 뽑아 던질 정도로 강력한 파워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단순 지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다이내믹이고, 그것이 우리 삶을 바꾸고, 때로는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며, 우리를 담금질하심으로 결국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치유 기도 관련 일화 소개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릴게요.
한 번은 제가 호주에 가서 말씀을 전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사역 초기, 아마 2008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 여러 교회들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러는 가운데 제가 깨닫게 된 게 뭐냐면, 호주에 있는 많은 교회(목회자들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고) 안에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 실제로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게 제 마음을 굉장히 안타깝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곳에 있는 한인 교회들조차도 “바짝 말라 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싶으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고, 또 거룩한 분노 같은 것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보통은 제가 그런 식으로 잘 안 하는데, 그때 집회를 앞두고, 말씀 전하러 가야 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제가 보니까 이분들에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 혹시 저녁 집회 때 몸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 치유 기도를 할까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진짜 보수적인 교단에서 목회하시는 분이었지만, 교인들이 혹시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너무 기대가 되셨던 거예요.
“아, 너무 좋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픈 분들 좀 모시고 나올 테니, 선교사님이 기도 좀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을 하셨어요.
저는 사실 치유사역 전문도 아니고, 보통 외부에서 누가 제게 “기도해달라”고 해도, “여러분이 스스로 손 얹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더 듣기 원하실 수 있어요” 하는 식으로, 최대한 그곳에서 제가 직접 앞장서서 기도하는 걸 자제하던 편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마음이 뜨거워진 나머지 “오늘 치유 기도를 해보자”고 이야기를 꺼냈으니, 숙소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는데 집중이 안 되고, 아무런 감동도 없고,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날인가?” 하는 어떤 확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막 ‘찌릿찌릿’ 한다거나 “오늘 특별한 역사를 주겠다”는 마음의 음성도 전혀 없으니까, 저는 점점 불안해졌어요. “이거 어떡하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는데, 가서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안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오늘은 그냥 일반 설교만 하고, 기도는 생략해야겠다. 괜히 무리해서 기도하자고 했다가 망신만 당하면 어떡하나.”
이렇게 결론 짓고, 교회로 가면서도 속으로 “그냥 말씀만 전하고 내려오자” 했어요.
그런데 앞자리에 앉아 계신 담임목사님이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제게 딱 말씀하시는 거예요.
“선교사님, 기도해주셔야죠! 제가 오늘 아픈 분들 다 전화해서 불러모았어요!”
제가 슬쩍 사인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오늘 제 마음이 좀... 아니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어떨까요?”
이랬더니 그 목사님이 정색하시면서,
“아니, 제가 사람들 다 불렀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꼭 기도해주세요.”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앞으로 나오는데, 정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거 어떡하나, 어떡하나...’ 하며 앞으로 가는데, 가만 보니까 제가 오전까지 “이 사람들은 믿음이 없구나. 하나님 경외심도 없고...”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믿음이 없는 건 저더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데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기도해놓고 아무 일도 안 생기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라는 두려움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저는 “주님, 제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고백할 수 있는 건, 이런 믿음 없는 저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하고 솔직히 인정했어요. 그리고 “몸 불편하신 분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날 특이하게 일하셔서, 오래 묵은 기도제목이나 아픔을 가지고 온 분들 중 여러 분이 치유를 체험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깨달았어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실 수 있구나.” 그날은 제게 굉장히 좋은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재밌네. 말 되네.” 하고 이해하는 것하고, 실제 믿음은 다릅니다. 지적으로만 ‘맞다’ 하고 동의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믿음은 그냥 긍정적 사고방식하고도 다릅니다. 물론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셀프 에스팀(self-esteem)’을 높이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좋은 거죠. 디즈니 영화 같은 걸 보면 다 “네 자신을 믿어라. 믿음대로 될 거야. 네가 믿으면 매직이 시작돼!”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자기 확신’일 수 있고 긍정적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성경적 의미의 믿음하고는 다른 겁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하나 예를 더 들어볼게요.
제가 대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 늘 기도하던 것이, “우리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돌아가시기를”이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제 뜻대로, 제 시간대로 되지 않았다고 느껴진 어떤 절망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나서 어느 날 어머니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할머니가 심한 치매가 왔다”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할머니와 통화했는데, 평소 저를 그렇게 아끼셨음에도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할머니, 저예요. 교회 다니는 손주인데...” 하니까, “나 그런 사람 몰라요. 무서워라!”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셨어요. 그때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안 들어주시는구나.”
왜냐하면 저는 그 시절, 믿음을 가지려면 뭔가 지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성경공부도 하고, 교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믿음이 생긴다고 봤어요. 그런데 치매가 왔으니, 그게 다 불가능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한참 낙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할머니가 세례를 받으셨고, 예수님 믿으시겠다고 고백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속으로 “나이가 드시니까 마음이 약해지셨을 뿐이지, 진짜 믿음이라고 보긴 힘들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할머니가 정말 예수님 믿으시는 것 같다”고 또 말씀하셨어요. 이유인즉, 우리 할머니가 혼자 계실 때 찬송가를 자꾸 부르시는데, 그 곡이 일반 세상 노래가 아니고, 찬송가 책에 있는 찬양이더라는 겁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교회 일로 늦게 들어가도, 예전 같으면 “어디 쏘다니다가 이제 오냐!” 하고 화를 내셨을 텐데, “뭐가 무섭고 뭐가 힘들어? 예수 선생하고 같이 있었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아” 하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죠.
저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믿음이라는 게 지적 능력이나 공부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 성령님의 역사로, 노년의 치매 상태에서도 믿음이 들어갈 수 있구나.” 그리고 그 믿음이 들어오니까 할머니 마음과 태도가 완전히 바뀌시더라고요.
사랑이 믿어질 때 일어나는 일 - 셋째 아들 얘기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저희 집에는 아이가 넷 있는데, 인도네시아로 막 들어갔을 당시, 셋째 아이가 정서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했던 적이 있어요. 막 울고불고, 유치원도 가기 싫어하고, 교회 가서도 엄마 떨어지기 싫다고 난리를 치고... 심지어 누가 사탕이라도 줘서 달래려고 하면 면전에서 던져버리고, 형 누나나 동생을 때리고, 그런 일이 잦았습니다.
한 번은 제가 한국에 일정이 있어서 집회하러 왔는데, 집회 전에 제 핸드폰으로 ‘카톡, 카톡, 카톡’ 알림이 막 오는 거예요. 열어보니까 ‘아내’ 이름으로 로그인이 돼 있는데, 내용은 온통 이모티콘(악마 얼굴, 화난 얼굴 등)이 잔뜩 올라와 있었습니다. 아, 이거 셋째가 엄마 폰 잡고 장난하는구나 짐작했죠. “악마 얼굴”, “썽난 얼굴” 같은 걸 막 보내면서, 저를 도발하듯이요.
아마 아이는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나? 어느 선까지 가면 화를 낼까?” 하고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집회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셋째를 불러서 “하야니(가명)~ 아빠는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아빠한테 화난 이모티콘 잔뜩 보냈는데, 솔직히 아빠는 그거 봐도 네가 귀엽더라. 아빠는 하얀이를 끝까지 사랑한다” 이렇게 말해줬어요.
처음엔 아이가 ‘뭐야?’ 하고 도망가더라고요. 듣고 싶었던 말이 들리니까 더 민망해서 그래요. 그런데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고, 계속 ‘넌 정말 소중해, 난 널 사랑해’라고 반복해서 말해주자.”
그리고 어느 날 차 안에서, 마침 아이가 잠들지 않은 틈에 “아빠가 널 너무너무 사랑한다. 넌 너무 특별해” 했더니, 아이가 처음으로 “응, 이제 알아요” 하더라고요. “어떻게 알았어?” 했더니 “아빠가 그동안 계속 말해줬잖아요.” 바로 그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원리 같아요.
아이 마음에 그게 들어가니까, 곧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울고불고 떼쓰고 하던 것이 서서히 줄어들고, 동생을 때리던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게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완벽해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변화해가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제가 해외 집회로 나갔을 때, 다시 이모티콘이 왕창 왔는데, 이번에는 전부 하트, 키스, 사랑스럽고 웃는 얼굴들이었어요. 심지어 아이가 이제 한글을 조금 익혀서 “아빠, 나 하얀이인데 사랑해요”라고 찍어서 보냈더라고요. 믿으니까 표현이 달라지는 거죠.
이처럼 믿음이 들어오면,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따라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뽕나무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는” 이야기는, 우리 앞에 놓인 어떤 거대한 문제(산)나 장벽이 사라지는 것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뿌리째 뽑혀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만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믿음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너희 중에 종이 있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다가 돌아오면...”)을 보면, 요점은 “네가 주인 노릇 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섬기는 것, 그게 믿음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곧 자기중심적인 집착이 뿌리채 뽑혀 던져지는 기적이에요.
만약 그게 안 되면, 우리는 절대 믿음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제가 늘 “번지점프”로 비유하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이에요. 번지점프를 실제로 해보면, 위에서 뛰어내리는 순간도 무섭지만, 제일 오싹할 때가 끝까지 내려갔다가 줄 탄성에 의해 확 튕겨 올라갈 때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왜 무서울까요?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힘에 의해 몸이 확 날아가니까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한 상황” 안에서만 한 걸음 나아가려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자라면서 학교에서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기에 시달리고, 자존감이 상처받으면, 대학 가고 사회 나가서도 남들이 괜찮다고 보는 ‘안정된 길’만 찾아다니곤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내가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울타리를 넘어갈 때 비로소 경험되는 거거든요.
물에 뛰어들어도, 어떤 사람은 허리까지만 들어가고 “이 이상은 안 돼!”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완전히 다 들어가서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죠. 자전거를 탈 때도, 어느 순간 두 발을 페달에서 동시에 떼고, 온전히 균형을 맡겨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번지점프대에서 “뛰겠습니다!” 하고 뛰어내렸는데, 주변에서 “어어, 뒤에 안전봉을 손으로 아직 잡고 계세요!” 하는 일도 있어요. 본인은 뛰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 손은 철봉을 움켜쥐고 있던 거죠. 그건 진짜 믿음으로 내딛은 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는 꼬박꼬박 드리고, 신앙생활 하듯 보이지만, 실제로 자기 인생의 결정을 믿음 위에서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그것은 ‘한 손은 안전봉을 붙들고 있는’ 상태일 뿐이에요. 믿음은 손을 놓아야 시작됩니다.
저는 믿음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가, 이미 제 인생에서 여러 번 ‘번지점프’ 같은 결단을 하며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오랜 시간 경험하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 번지점프 같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원래 전공을 중국사로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셔서 이슬람학으로 전공을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왜 그 전공으로 바꿔야 하는지 몰랐지만, 기도 중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 저를 강하게 압도했습니다. “맞아, 믿음은 모든 걸 미리 알고 계획해서 가는 게 아니라, 다 알지 못해도 맡기고 가는 거야”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떤 학교가 저를 받아줄지도, 미국에 가서 공부를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마음에 순종하면서 전공을 바꾸고, 가진 돈이 없는 상태였지만 아내와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장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돈이 없어서 굶은 적이 없었고, 저와 아내가 박사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며, 아이 두 명도 미국에서 낳고 키울 수 있었습니다. 가기 전에는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쪽으로 부르신다”는 확신에 따라 걸음을 떼자, 하나님이 끝까지 공급해주시는 걸 경험했습니다. 8년 동안 은행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저를 몽골로 부르신다는 마음이 들어서 졸업 후 바로 몽골에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처음엔 2년만 머물겠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좀 더 있어주지 않겠니?” 하고 다시 초청하실 때 기쁘게 “네, 있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몽골에서 사역이 잘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으며, “이제 여기서의 사역은 좀 쉽구나” 싶을 때, 하나님께서 “너 여기서 이룬 것 다 내려놓고 다시 내가 부르는 땅으로 갈 수 있겠니?” 하고 도전하셨습니다. 그때는 어디로 보내실지도 모르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동안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또 한 번 번지점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번지점프도 하면 할수록 요령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두려움이 앞섰다면, 그 다음엔 즐거움과 기대가 더 커지더군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제 인생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살았습니다. 인도네시아로 갈 때도 처음엔 “어딜 가라”고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냥 “몽골에서 이룬 걸 다 나누고 떠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숟가락, 젓가락까지 몽골에 다 두고 빈손으로 미국에 잠시 있다가, 그곳에서 인도네시아 부르심을 확인하고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대학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대학을 세우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돈도 엄청나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느 나라든지 교육은 외국인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데, 특히 이슬람권은 보호 장벽이 매우 높아서 가능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저를 통해 하길 원하시는 일이 있다는 걸 알고 또 헌신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사역할 때, 처음엔 “죽는 것도 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아서 쓸모없게 보이는 상태가 될까 봐는 두려워하더군요. 하나님께서 바로 그 부분을 아주 치밀하게 다루셨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세운다”고 이야기하면, 많은 분이 좀 불쌍한 눈으로 보시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까 거기서 정말 맨땅에서부터 학교를 세우는 게 너무나 어려웠어요. 제도적, 법적 규제도 심했고, 건물 하나 짓는 것조차 허가가 너무나 까다로웠습니다. 비자조차 안 나오고, “이렇게는 아무것도 안 되고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순간이 반복됐습니다.
아이들도 비자 문제로 학교를 못 가게 되어서 한국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 그럼 우리 학교 못 다니는 거예요? 기말고사도 못 보고... 어떻게 해요?” 하며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저도 수심이 가득해졌지요. 부모님께서 “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니?”라고 물으실 때마다, 제가 “그냥 묻지 마세요. 알아서 할게요”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남 앞에서는 다 내려놓은 척하지만, 내가 볼 땐 뭐가 내려놨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사실 제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긴 했어도, 그건 “이미 다 내려놓아서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내려놓아 보자”는 취지였거든요. ‘내려놓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목표가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믿음이고, 믿음에 따라 내려놓게 되는 것이니까요. “내가 믿는 만큼 내려놓을 수 있고, 내려놓는 만큼 믿음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그 과정을 통해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낙심하던 중에 어느 작은 교회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인천 재개발 지역의 작은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1층은 생선가게가 있어서, 계단에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순간 옛날 몽골 생각이 났습니다. 몽골에서 살 때, 제가 양고기집 2층에 살았거든요. 올라갈 때마다 양고기 냄새가 진동했고, 그래서인지 한국 공항에 오면 마약탐지견들이 저를 좋아했습니다. 그날 그 작은 교회 예배당에 올라가 묵상하니, 몽골에서 섬겼던 개척교회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너 초심을 잃은 것 아니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질문이 정말 제 내면을 정확히 짚는다고 느꼈습니다. 몽골에서 살 때는 뭔가 ‘결과’를 내야 된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자”고 했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와서는 “이걸 잘 성공해야 해. 남들 시선도 있고...” 하는 부담이 확 들어왔던 겁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셨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지요.
“하나님도 제 상황 아시잖아요. 전 내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많고... 당장 제 아이들 학교조차 해결 안 되는 처지인데, 이게 뭡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물으셨어요.
“네 자녀의 미래를 네가 책임질 수 있니?”
“아니요, 전 못합니다.”
“그래. 너는 못해. 그건 내 영역이야.”
그 순간 “그렇다면 제 안에 든 이 모든 부담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겠습니다” 하고 고백하자, 제 손이 비워지면서 하나님이 또 다른 사명을 주시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게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초·중·고등학교를 먼저 세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시작하고, 현지 목회자 자녀들도 받아서 함께 교육하다가, 우연한 계기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새로운 교육법을 제정해주면서 저희 학교가 정식으로 기독교학교 허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인이 세운 기독교학교는 거의 허가를 못 받았는데, 그 법의 혜택을 받아 유치원부터 초·중·고까지 계속 확장되었고, 마침내 대학 인가도 받게 되었습니다. 올해 두 번째 학과 설립을 위한 정부 실사가 나오고 있고요.
그 과정이 늘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한 50억 원 가까이 필요했는데, 저는 밖에 나가서 “도와주세요” 하고 재정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냥 말씀만 전하고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인도네시아 현장에 건축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어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됐습니다. 그럼 1년 안에 50억이라는 돈이 채워져야 하니, 서류와 청구서가 계속 쌓여가고, “이거 혹시 못 마치면 어떡하지. 그럼 인도네시아도 못 돌아가고 다 망하는 거 아닌가” 하고 스스로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 매달려보니 “너 기왕이면 크게 가 줄 수 없겠니?”라는 마음이 들었고, 저는 “주님, 네, 그러겠습니다” 하고 또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집에서는 아내랑 아이들이랑 마음껏 시간 보내고, 학교 상황도 한쪽으로 잠시 잊고, 매일 한 걸음씩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혜로 재정이 마련되어 건물이 완공되었고, 대학 인가가 나서 이번에 대학 개교 감사예배까지 드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성공을 목표로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다. 실패조차 두렵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다.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을 뿐이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잘한 일로 계속 성공만 거두는 게 더 큰 문제일 수 있어요. 남들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별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종의 도리를 다한 뒤에야 먹고 마신다”)를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십니다. 요점은 “네가 주인 노릇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을 먼저 섬기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수종든다”는 표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wait on”이라고도 합니다. 그 사람을 보살피고 접대하고, 계속 주목해서 반응하려는 태도를 말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wait on God” 해야 하는데, 이는 먼저 하나님을 주목해 바라보고 기다리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도 인도네시아에서 비자 문제, 재정 문제, 건강 문제 모든 게 꼬여 있을 때, 예배 속에서 청년들이 “주 품에 날 안으소서”라는 찬양을 하는데 제 마음이 “하나님, 저도 안아주시면 안 되나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주님이 정말 가까이 계시구나” 깨닫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은 이 순간에도 나로 인해 만족하고 평안할 수 있겠니?” 하셨을 때, “주님,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태도가 곧 믿음이고, 제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실제로 걸어보니, 저 같은 씨름을 하는 분들을 보면 이제 그 다음 단계가 뭔지,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일하시는지 조금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면, 그걸로 내가 유익을 얻을 뿐 아니라, 주변에 동일한 씨름을 하는 이들을 세워주게 됩니다. 시편을 보면, 어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한 내용이 가득하고 “하나님,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둠 속에 던져두셨습니다”라며 절망스럽게 고백하는데, 저는 “그럼에도 ‘여호와께 부르짖는다’고 할 수 있으면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런저런 사역을 해라” 하고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럼 이제 바로 부흥이 열리겠구나”일 때가 많은데, 실제로 요셉이 꿈을 꾼 뒤에 오히려 갖은 고생을 한 것처럼, 비전을 받은 다음에 어려움의 시간들이 오기도 합니다. 저는 몽골에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며 “아, 난 죽음은 별로 안 두려워하나 보다”라고까지 생각했지만, 인도네시아에 와서 보니 또 다른 종류의 믿음 훈련이 필요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법적·제도적으로 막혀 있고, 재정도 없고, 기대했던 사람들도 아무도 안 도와주고, 몸까지 아파서 기진맥진인 상황... “이대로 아무것도 안 되고 끝나는 거 아니냐” 싶은 시기에 하나님은 또다시 연단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돕는 손이 함께하신다” 하셔도, 고난이나 병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불안한 길로 나를 보내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 “난 주님만 바라보며 만족하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펼쳐지는 것을 봅니다.
결국 믿음은, 어느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와 내 문제”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 크게 바라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가는 태도입니다. 제가 이를 통해 배운 것은 “내 인생을 안전하게만 지키려는 집착이 뿌리째 뽑힐 때, 가장 큰 번지점프가 가능하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지는 이유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약속은 하시지만, “너는 물이나 불을 절대 안 만날 것”이라고 하진 않으십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무서운 물과 불을 통과해야 할 때가 오는데,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저도 건강 문제보다 더 힘든 게, 사실은 제 신분이나 비자가 불투명한 상태에 대한 불안감이었습니다.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된 후에 나아가고 싶은 본능이 강한 사람인데, 하나님은 거기에도 손을 대셔서 제 comfort zone을 허무시고, “정말로 믿음으로 살 건지”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렇게 경험해보니,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나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헬렌 로즈비어(Helene Roseveare) 선교사님의 이야기도 비슷하지요. 콩고 내전에 남아 있다가 반군에게 붙잡혀 강간당하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하나님, 전 당신을 신뢰할 수 없어요.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다가, “그럼에도 내가 너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받아들일 수 있겠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거기서부터 놀라운 평강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열매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심” 자체를 더 깊이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수술 뒤에 언어 과정을 하며 계속 시험보는 처지가 되고, 전에는 대학교 부총장을 했는데 이젠 대학생처럼 매일 공부만 하는 것 같고, 비자도 막히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은 순간이 잦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주 품에 날 안으소서”라는 찬양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 저도 좀 안아주시면 안 돼요?”라고 고백했더니, 등 뒤에서 툭툭 두드리는 느낌이 들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네가 여기서 아무 결실도 없어 보이는 시간이라 해도, 나로 인해 만족할 수 있겠니?” 하고 물으셨고, 제가 “주님,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후에야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 그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제게 더 명확해졌습니다. 여러 문제를 다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사라지고, 남들의 시선이나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걸 더 선명하게 보게 되고, 제 믿음도 깊어졌습니다.
결국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좌절, 우울, 불안, 막막함 속에서 정말 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대단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안아주심 속에서 그분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인가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믿음이야말로, 모든 두려움과 미지의 길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원동력입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유기성 목사님 (1) | 2025.01.29 |
---|---|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 - 유기성 목사님 (0) | 2025.01.29 |
이재철 목사 설교 몇 편 (2) | 2025.01.29 |
믿음이 무엇일까? - 이용규 선교사 (1) (1) | 2025.01.28 |
목사님이나 어떤 분 한 분만의 얘기를 맹종하는 것은 바른 신앙일까? (0) | 2025.01.28 |
생육하고 번성하라 ... 박영선 목사 (0) | 202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