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든 부분을 다 공부할 수 없으니까 어느 영역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의 말을 듣는데, 우리가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한 전문가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마어마하게 대출을 해서 집을 장만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부동산 한 군데 가서 부동산 전문가라는 말만 듣고 결정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분 말도 듣지만 여러 가지 알아보고 하잖아요.
1,2천 원짜리면, 혹은 2,3만 원짜리면 '야, 저 식당 맛있대' 그러면 우리가 다 검색해보고 가지는 않습니다. '맛있다'라고 하니까 그냥 믿거라 하고 가서 먹어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굉장히 큰 액수의 단위로 가면 우리는 그 사람 말만 듣고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죠?
신앙은 자기 삶과 인생의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식사 한 끼와 견줄 수 없죠. 그런데 어느 한 사람 말만 듣고 자기 신앙과 삶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 분에 대한 의존이 과한 거 아닌가요?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믿을 만한 분이라도, 여러 통로를 통해서 점검하는 일들이 필요하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이제 너희를 내 제자로 삼을 것이고, 전도자로, 사도로 세워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통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오역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해해 왔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면, 마치 어부가 고기를 낚아 고기를 자기 유익을 위해 소비하듯, 전도나 사역도 사람을 ‘낚아서’ 자기가 뭔가 이익을 얻으려는 듯한 뉘앙스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사람을”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어부”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어부”라는 의미입니다.
원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위한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고기를 잡아 자기 이익을 취하는 어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섬기는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사람들의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베드로는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온몸의 모든 근육과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기를 잡으며 손발과 온몸을 썼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다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라.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교회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지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손과 발을 써서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을 위한 어부’로 살아가려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고(故) 구상 시인님께서 제(이재철 목사)가 결혼할 때 십자가를 선물해 주셨는데, 거기에 예수님 형상이 못 박힌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사를 하면서 보니, 예수님의 오른팔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붙이려다 문득 2차대전 때 독일 어떤 교회에서 팔이 부러진 예수님 동상을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아래에 “예수님은 여러분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팻말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손발이 우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팔이 부러진 예수님 형상을 그대로 두고, 볼 때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손으로 살았는가? 오늘 내가 예수님의 발로 살았는가?”를 점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시골로 이사하면서 또 십자가가 떨어져 이번에는 예수님의 발이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것마저 붙이지 않았습니다. 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오늘은 내가 예수님의 손이자 발이 되었는가, 즉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늘 되새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한 어부로 살아갈 때, 결국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381년에 공표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교회를 네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의 교회여야 하고, 둘째, 거룩한 교회여야 하고, 셋째, 사도적인 교회여야 하며, 넷째, 보편적인 교회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중에서 보편적인 교회라는 것은, 주님이 만민을 위해 오셨다는 진리를 교회가 실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두가 한자리에서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만 봐도,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로마를 무력으로라도 몰아내자고 했던 열심당원 시몬과, 로마에 세금을 바치며 동족의 고혈을 짜내는 세리 마태가 함께 있었습니다. 마태 입장에서는 열심당원 시몬이 철부지로 보였을 것이고, 시몬 입장에서는 마태가 동족 배반자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둘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수많은 잡족’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신약에서는 ‘광야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미 그때부터 하나님은 보편적인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주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고, 오늘날도 흑인과 백인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어부”로, 즉 서로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떤 사람에게라도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교회의 모습이며, 주님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의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찾아온 사람이라도 따뜻한 손을 내밀어 함께 예배하고, 그 사람이 주님 품 안에서 회복되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서로에게 ‘밑가지’가 되어 주십시오. 서로를 위한 ‘사람들의 어부’로, 예수님의 손발이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 교회가 이 시대의 안디옥 교회로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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