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마음이 나를 휘어잡을 때... 불안과 두려움을 기회로... 김기석 목사
불안한 마음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 마음을 골똘히 바라보면 불안이 점점 커집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가장 일상적인 일에 집중하고 그 일을 통해서 희망의 공간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올라갔는데,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권태로운 것도 아니고, 외로운 것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했지만,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나의 우울한 마음을 전염시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서점으로 가서 책을 보았는데, 평소 좋아하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헤매다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제 방 서재에 가만히 앉아 보니, 이상(李箱)의 『권태』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꺼내어 무심한 눈길로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순간 제가 그렇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싹 잊어버렸습니다. 그 책을 서서 두 번 읽고 나서야 마음이 고요해졌음을 느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태풍이 불어올 때 그 불안에 마음을 전부 맡기고 휩쓸리지 않은 채, 일상 속의 작은 일에 마음을 집중하면 불안의 안개도 걷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불안은 바위가 아니라 안개에 가깝습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좋은 일을 하면 옅어집니다.
이단 사이비에 빠지지 않게 하나님이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면 될 텐데요... 김학철 목사
종교라는 것이 어떤 사람의 삶의 문제에 답을 주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신속하고 귀족적이며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데 기존 종교에서 그런 답을 주지 못한다고 느끼니까 그런 답을 준다고 하는 곳을 찾아갑니다.(이단 사이비). 그런데 실상 문제는 정말 그런 답이 있는가, 그런 삶의 문제 해결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금 나와라 뚝딱” 해서 금이 튀어나오듯이 해결되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어떤 집단이 ‘이단’이라고 불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사이비’라고 불리는 단체들이 생겨나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현상이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천지에서 하는 '성경 풀이'에 많은 청년들이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성경이 확실하고 즉각적인 답을 주면 좋겠어요.
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신천지를 다니는데 고민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너는 왜 거기에 다니게 되었느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한글 성경으로는 이해가 안 갔는데, 거기서 해석해 주는 것을 보고 너무나 이해가 되어 그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이른바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고, 영어 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 영어 선생님 아니냐, 영어성경도 한번 읽어봐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영어 성경으로 읽고 약간 놀랐습니다.
신천지는 일단, 성경을 매우 유치한 방식으로 풀어놓고, 하나의 방법론으로 성서 전체를 해석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특정한 방식만 고집하느냐 하면,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성경 해석을 몰고 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는데, 이 특별한 방식을 사용하면 성경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저도 오랜 기간 성서를 연구하고 공부했지만, 아직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성서의 비밀을 전부 풀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훌륭한 성서학자나 목사님이나 신앙인이 있다 해도, 성서의 비밀을 모조리 풀어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불분명하게 말씀해주신 것인가요? 제 삶의 문제에 확실한 계시나 답을 주시면 좋겠어요.
의약분업이 되기 전, 약국에 가서 “감기에 걸렸으니 약을 세게 지어 달라”라고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7일 만에 낫고, 약을 안 먹으면 일주일 만에 낫는다”라는 농담 섞인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약국에 가서 “약을 세게 지어 달라”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몸이 아프면 신속하고 급격하며 기적적으로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강한 정도의 처방약이라도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특히 사이비 집단은 바로 그 강한 약을 처방하듯, 얼떨결에 사람들을 금방 낫게 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삶은 모호합니다. 우리의 삶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MBTI, 애니어그램, 사주 등을 보는 것도 사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고, 타인도 명확하지 않고, 삶 자체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무엇이겠습니까. 명확하지 않은 대상을 명확하지 않게 그리는 것입니다. 명확하지 않은 대상을 마치 명확한 것처럼 급격하게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처방일 수 있습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모호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직면할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만약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다면, 삶에 대한 마취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예로 들면, 예수님은 너무나 명확한 메시아의 삶을 사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달리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훨씬 인간적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 삶에도 불안과 갈등, 고난 같은 인간적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조건 또한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삶은 불안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모호함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능성이 되기도 하고, 불안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문명은 모호함과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통제하고, 우연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주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완벽하게 통제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자연재해가 오거나,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도 일어납니다. 문명이 발달해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결국 이 모호함을 수용하고, 그것을 불안에만 내어두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신앙이 가르쳐주는 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연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유와 기회도 줍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켜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줍니다. 물론 가끔 엉뚱한 길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완벽하게 안내해 줘서 목적지로 곧장 갈 수도 있지만, 어떤 날은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와서 대충 길을 짐작으로 찾아갈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멋진 카페나 정원을 발견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기도 합니다. 우연성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삶의 새로운 기회도 줍니다. 이것이 삶의 모호함이며, 인간 사회의 모호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그런 능력이 주어졌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신앙이란, 우리 삶이 모호함 속에 있다 해도 주님의 큰 목적 아래에서 결국 선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근원적 믿음, 즉 우리 삶에 대한 긍정입니다. 모호함이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주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신앙이 줄 수 있는 멋진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안고 한 발 한 발 주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걸어가십시오. 그런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을 응원합니다.
(30년간 장애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필요한 것... 김병삼 목사
우리 삶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을 했고, 저에게 만족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딸 아이의 장애'....
“기도도 참 많이 했어요"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왜?”라는 물음이 생겼습니다. 왜 그러신 걸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알게된 것은...
저는 목사로서 살아가며 제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모든 답을 알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다 알 텐데 굳이 하나님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저도 30년 넘게 장애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오며 느낀 것은, “하나님,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그 환경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살 딸이 4년 전에 중도장애를 얻었고, 서서히 증상이 심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로서 너무 힘들고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분에게
먼저 우리 삶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내가 인생을 계획했고 그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어그러진 일들을 경험하는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내가 원했던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보다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여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가?”일 것입니다. 사실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 제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신앙적 물음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자녀 문제입니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딸의 아빠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저보다 제 아내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냥 장애로 태어났다면 조금 더 쉽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너무 자주 아팠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피 교환 수혈이라는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셨구나” 하고 감사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천적인 약 부작용으로 인해 장애를 얻게 되어 정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말 응급실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제가 목사였는데도, 가장 친한 사람이 “너는 그런 딸을 데리고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 기도를 해야지”라고 너무나 쉽게 말했습니다. 부모보다 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하나님,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으니 “왜 그러시나?” 하는 물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장애를 가진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30년 전 그 시절, 미국은 한국과 달랐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정말 잘 돌봐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딸아이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5년 동안 참 행복하게, 장애를 가지고도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자, 그때부터 우리 딸이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장애로 인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게다가 부모인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가 이 사회를 떠나야겠다. 장애를 가진 딸을 데리고 여기서는 살 수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주신 그분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제 딸의 장애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이 저를 바꾸어 가셨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사람은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잘되어야 한다”는 식의 엘리트 중심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많구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만나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러 갔던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는 소위 ‘성공한’ 한인들이 많았습니다. 의사나 Ph.D. 를 딴 사람들, 그리고 그 교회에는 “우리 아이가 하버드에 갔어요, 예일에 갔어요, 프린스턴에 갔어요” 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니, 자식 문제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말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제 딸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 딸을 통해 저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시고, 제 목회를 바꾸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아,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딸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는 부분입니다. 30년이 넘어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 아내와 저는 늘 “우리 딸보다 우리가 먼저 죽을 텐데, 죽고 나면 딸은 어떻게 살지?”라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몇 년 전 우리 딸이 결혼했습니다. 사실 장애가 있으니 아무도 결혼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지금의 사위를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시댁에서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장애를 가진 딸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혼한 사이가 실제로 함께 살아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아, 하나님, 이 정도면 됐지 않습니까. 왜 또 이런 일이…”라며 탄식했습니다. “우리 딸이 혹시 이 결혼생활을 못 이겨서 돌아올 수도 있겠다. 다시 데려와야 하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고 나니, 둘이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납득이 잘 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이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아픔을 안고 힘겹게 지나가고 있는 분에게 딱 맞는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어느 시점에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계획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힘들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또다시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로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우리 딸을 통해 제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셨고, 이런 목회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 딸이 저에게 준 축복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딸이 겪은 고통과 아픔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아직도 제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제 딸은 예배 시간마다 온라인으로 글을 남기며 “하나님, 저를 고쳐주세요. 몸을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제 딸이 여전히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또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지금 출애굽기까지 성경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딸은 지적장애도 있고 손도 잘 움직이지 못해서 글씨 쓰기가 쉽지 않은데, 꿋꿋이 쓰고 있습니다.
물론 더 심한 상황을 겪는 가정도 있을 것이고, 덜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가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딪치고, 답을 얻고, 또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신앙의 여정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인생의 여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훨씬 더 험한 길을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조금 더 편안한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께,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시라고 권면해드리고 싶습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삶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삶을 회피합니다. 제가 성경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가 요셉입니다. 요셉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형통한 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셉 인생을 보면 형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순간이 많았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팔려간 인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면서, “내 인생은 팔려간 인생이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셉을 수식하는 말은 ‘형통한 자’였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prosper’라는 단어를 씁니다. 곧, 앞길이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때,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내 뜻대로,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공은, 팔린 인생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인생을 말합니다.
요즘 ‘DP’라는 드라마를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 군대를 경험한 부모들은 자식이 힘든 곳에 가는 것을 막고 싶어 합니다. 예전에는 군 관계자를 통해 편한 곳으로 인사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게도 예전에 “목사님, 우리 아들을 편한 부대에 보내주세요”라는 부탁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해서 참 솔직하게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 아드님이 그 편한 곳에 가면, 누군가는 나쁜 곳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좋은 곳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혹은 어려운 환경이라면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 마음을 공감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가 말한 사실 자체는 옳습니다.
요셉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았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형통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신앙이 주는 용기란, 우리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 환경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용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삶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 나는 늘 내가 원하는 자리에 내가 없었습니다. '나는 신학교 가기 싫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갔고, 목사도 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됐다. 그래서 인생이 실패했다.'라고 생각했고 제게 만족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것이 내 계획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때도 나와 함께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전에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이 보이니, “앞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들어주세요”라며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려 했다면, 그 사랑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하나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면, 그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필요한 것이 용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라는 이 가장 연약한 말이, 사실 가장 용기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라는 고백은, 인생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요셉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것 중에 “주식이 널뛰기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도 주식처럼 상한가를 기록했다가 하한가로 내려가는 굴곡을 겪습니다. 누구도 인생의 ‘업 앤 다운’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요셉을 보면, 그는 금수저처럼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말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함을 누렸지만, 갑자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나락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최선을 다해 간수장의 인정을 받았고, 함께 지내던 왕의 신하의 꿈을 해몽해 주었지만 2년간 잊힌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한 ‘하나님의 타이밍’에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결국 총리가 되었다는 결말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총리가 된 순간보다는, 그 모든 ‘업 앤 다운’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이 “형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인생이 잘 풀려서 하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함께해 주세요”라며 용기를 갖고 동행했던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진정 성공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하신 분께 이런 말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도 30년 넘게 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며 지나온 아버지로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상황을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직면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지나고 보니, 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지 못했던 게 가장 후회가 돼요.
막 울어요.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딸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점입니다. 부모라는 마음으로, “더 좋아질 수 있을 텐데, 더 노력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커서, 오히려 아이가 장애를 가진 행동들을 하는데 납득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강압적으로 대하기도 했고요. 그러고 나서 미안함에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왜 우리 딸이 힘들고 아픈 것을 마음으로 품어주지 못했을까요.”
여전히 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데, “딸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정말 복된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딸이 힘들어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딸의 몫이고, 하나님 몫이기에 제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제가 모든 답을 알 수 있다면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그래서 드렸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족하고,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그렇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내 약함이 곧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한 것은, 그의 육신에 가시가 없어도 될 만큼 완벽했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약한 부분들, 고민들이 우리의 강함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들이 믿음의 끈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어 매주는 셈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서 말로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옆으로 성육신 하신 분을 압니다. 나의 번민이 다 들어가기에는 세상의 그 어떤 설명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 분이 아셔서 일까요? 그분의 품 외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답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신뢰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을 이 시간 바라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히 5:8~9)
하나님의 계획,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자꾸 묻게 됩니다.... 권연경 목사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는 그 계획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정해진 제 길이 있을까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자꾸 묻게 됩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옆에 실제로 계셔서 “대학은 무슨 과를 가거라”라고 물리적으로 확인해 주시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질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으로 점을 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이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길 원하시는지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 이런 삶을 살아가야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검증하고 알아가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理性)을 주신 것은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생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얘기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깥에서 채찍질하시듯이 우리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열망과 소망을 갖게 하시고, 우리가 그 열망을 추구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한편으로 보면 내 생각을 정돈해 가는 과정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생각을 정돈해 가는 기준이 나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물으면서 정돈해가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발견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2 새번역)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했듯,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테스트해보아야 합니다. 즉, 알아내야 하고 검증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개개인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미리 기성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과정 하나하나를 지나면서 뜻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직장 중 어디를 택해야 할지 고민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내립니다. “한 곳은 연봉이 3천이고, 한 곳은 4천이구나. 그럼 일단 연봉이 중요한 요소가 될 테니 4천이 나은가?” 하면서도, “이 직장은 하루 종일 회사에 있어야 하니 내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등을 고려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회사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4천을 택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3천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준을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인가, 아닌가’를 살피며 결정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자꾸 묻는 것은, 사실 ‘결정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기 두려울 때, 그 짐을 덜기 위해 점을 치는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뒤로 빠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미 내 마음속에 욕심이 있지만, 그 욕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을 운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일상 속 많은 선택은, 굳이 “하나님 뜻이 뭘까?”를 묻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의 문제인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학교에 올 때 어느 길로 오느냐도, 이 길로 왔다고 옳고 저 길로 왔다고 그르지 않듯이 말입니다. 직장을 고를 때도 이 직장을 택한다고 하나님의 뜻이고, 저 직장을 택한다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닌 상황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불안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곤 합니다. 나중에 “내가 이거 잘못 택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좀 위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책임을 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기도하며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이 건강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니, 사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과 내 계획을 묻는 일은 통일되기 마련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고 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하나님 뜻이 뭐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생의 계획을 미리 세워 ‘이것이 하나님 계획인가’ 하고 찾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처음에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신학 공부로 길이 바뀌었습니다. 상담을 하다가 신약학 쪽으로 관심이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 목회자로서의 길도 생각했다가, 조금씩 조금씩 방향이 달라져 결국 성서학 쪽으로 깊어졌습니다. 미리 계획했던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사실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 열리는 대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했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상황이 열렸습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도, 저를 세 번이나 스카우트하려 했는데, 처음 두 번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해 거절했고, 세 번째 권유가 왔을 때는 “이제는 옮겨야 할 때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수락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그때 선택을 할 때마다 최선을 다했고, 욕심만으로 결정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을 두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다 보니, 지금 돌이켜봐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점마다 제가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했으니까요. 만약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아차'하고 의도하지 않았어도 잘못이 있었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하나님 뜻을 무시한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향한 계획이 분명 있다”라고 믿습니다만, 그 계획은 결국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뜻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하늘에서 기성품처럼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혜를 구하고 용기있게 선택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당신의 삶과 신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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