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누구신가
세상에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만, 왜 종교에 가장 큰 가르침, 최상의 가르침이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를 영어로는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라틴어 ‘re(다시)’라는 접두어와 ‘ligare(연결하다)’가 합성된 말로, 본래 ‘다시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을 다시 연결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단절되었던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것이고, 단절되었던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시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단절되었던 삶과 생, 생과 삶을 연결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떤 가르침보다 더 높고 최상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가르침은 세상에서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나 오직 종교만이 하늘과 이어 주고, 하나님과 이어 주며, 인간을 영원에 접속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종교가 진리라고 표방하는 경전의 내용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는 이재철 목사를 믿는다”라고 한다면, 그분이 제 인격 자체를 믿는다기보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을 할 때마다 속으로 “에이, 거짓말이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어떤 인격체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교 신자는 불경의 내용을 믿는 사람입니다. 불당에 가서 불상을 향해 복만 빌고, 불경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복을 구하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지,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두 종교를 꼽으라면, 불교와 기독교가 먼저 떠오릅니다. 불교는 오랜 역사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 깊이 자리해 왔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진리라고 표방하는 불경의 내용은 크게 두 개의 기둥, 즉 ‘무아(無我) 사상’과 ‘윤회(輪廻)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둥인 무아사상은 “나라는 존재는 원래 없는데,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순간 모든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 생겨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본래 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고뇌와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 기둥인 윤회사상은 “수레바퀴가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가듯, 인간의 생과 사도 끊임없이 돌아간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짐승이나 곤충 등 다른 생명체로 계속해서 태어나고 또 죽으며, 그렇게 생사윤회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아사상과 윤회사상, 두 기둥 위에 불교라는 종교가 세워져 2,500년 동안 인류 역사와 우리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두 기둥 사이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합니다.
무아사상이 진짜라면,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누가 윤회를 합니까?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내 생(生)에서의 잘못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났다거나, 다시 인간이 되었다거나, 또 공덕을 많이 쌓아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윤회사상이 진짜라면, 내가 반드시 구체적인 실체로 존재해야 윤회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무아사상이 참이라면 윤회가 불가능하고, 윤회가 참이라면 무아사상이 불가능해집니다.
많은 불교 신자들은 이 모순을 잘 모르고, 신경 쓰지 않은 채 믿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지도층, 특히 학문이 높은 스님들은 이 모순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 부분을 질문하는 것을 금기시한다고 합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식입니다.
한편 기독교 신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임을 믿고, 그 내용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 예배당에 가서 기복만을 구하며 내 욕구대로만 기도하는 것은 무당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성경도, 불교의 무아사상처럼 “인간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안개에는 실체가 없어서 해만 뜨면 사라집니다. 성경은 인간을 연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불을 지피면 매운 연기가 나서 코를 찌르지만,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인간을 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한겨울에 유리창에 ‘후’ 하고 입김을 불면, 있는 것 같다가도 금방 사라집니다. 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시드는 들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실체가 없는 안개, 연기, 김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김 같은 내가 어떻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개의 기둥을 이어 주는 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안개와 같은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도록,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시고,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완전한 생명 공장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맨 처음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나옵니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라는 네 단어가 있는데, 이 네 단어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100%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태초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100% 이해할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다 이해한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임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순종하고 믿어야 할 대상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에 나는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결론을 줍니다. “나는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메이커도 자기 제품에 대해 끝까지 A/S를 하듯, 하나님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음으로,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성경 말씀을 인생 사용설명서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 어떤 고가의 물건을 사더라도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습니다. 그것이 물건을 제대로, 가장 오래,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이렇게 중요한 인생 사용설명서를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인생 사용설명서인 말씀을 주셨지만, 아담은 그 말씀을 무시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이 죄인이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실락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를 공장처럼 생산해 내는 ‘죄의 DNA’가 아담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술 공장에서 어떤 제품이 나오든, 모두 술인 것과 같습니다. 도수가 높든 낮든, 맥주든 와인이든 양주든, 술 공장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다 술입니다. 아담이 죄의 공장이 되어 버렸기에,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 자체가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바로 그 죄의 공장에서 나온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분, 생명 공장이 되신 구원자가 ‘예수님’이십니다.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화장품 공장’ 같습니다. 화장품 공장에서는 다양한 제품이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다 화장품입니다. 술이 전혀 나올 수 없듯이, 예수라는 생명 공장 안에서는 죄가 아닌 새로운 생명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생명 공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성경은 예수님을 네 가지 용어로 설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구원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네 죄를 위해 내가 대신 죽어 주겠다”라고 말씀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셔야 했느냐면, 우리가 머리로 지은 죄, 가슴으로 지은 죄, 손과 발로 지은 죄까지 모두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사흘째 되는 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000년 전, 우리나라 전설로 내려오는 박혁거세 시절과 비슷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모든 종교 창시자에게는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을 크게 만들수록 종교의 권위가 세져 간다고 믿습니다. 부처님도 화장하셨고 사리가 남아 그 사리를 탑에 봉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런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무덤이 있었다면 크게 만들었을 텐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헛소문을 퍼뜨렸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 죽거나 불에 타 죽으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거짓을 위해 죽을 수 없었습니다.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어떤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부활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십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 말구유(짐승의 밥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는 가장 더럽고 비천한 장소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짐승 밥통에 아이를 눕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역사상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셨기에, 가장 힘들고 낮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여전히 개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짐승의 밥통에서 태어나셨지만, 동시에 온 우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므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고독도 다 이해하시고 품어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부활자·참 인간·참 하나님이시기에, 안개처럼 허무한 우리를 영원하신 하나님께 연결해 주시는 ‘생명 공장’이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가 되었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갈릴리 어부로 배운 것이 없었던 베드로도, 그분을 만남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 바울 역시 원래는 자기 신념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박해했던 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몸은 그대로이지만, 지금까지는 내 욕망의 도구였던 몸이 이제는 생명의 도구, 진리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부활자이시고,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접속할 때,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한 사람의 삶이 변하면 한 시대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1984년 8월 2일 새벽 2시에 예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전날 밤까지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성으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육체가 이성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36세였고, 그 후 지금까지 3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36년 전까지의 제 인생은 한순간처럼 지나가 버렸지만, 그 이후로의 삶은 한없이 길고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내 욕망대로 살 때에는 인생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접속되어 살면 할 일이 무궁무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폴 고갱이 던졌던 인생의 세 질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며, 내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 확신 안에 서면, 우리의 삶은 지금부터 달라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불러내셨듯이,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주님의 자녀들을 이 시간 불러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이 자리에 예배드리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겸손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들의 이성과 육체가 하나 되어 주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그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의 통로’가 되어, 그들로 말미암아 이 땅의 어둠이 밝아지고, 누군가의 인생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새 생명을 얻어 자신의 인생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이 행복의 요람이 되게 하시고, 일가친척과 주변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옵소서. 오늘 이 시간부터 시작되는 그 새로운 행진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 안에 거한다...는 의미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는 것은 세속적인 기준, 다시 말해 인간적인 잣대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예수를 인간적인 잣대로 판단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바울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실 메시아는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줄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빈민촌 출신 예수가 무기력하게 국사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 예수가 메시아라고 제자들이 부활했다고 증언하고 다니니,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바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했습니다. 메시아가 아닌 사람을 메시아라고 증언하고 다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예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바로 바울 자신을 살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고, 단지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기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니, 예수님은 바울을 살리신 참된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이상 인간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그렇게 판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힘입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인간적인 잣대로 그 사람을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어서 17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그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 곧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완벽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안에’ 있어야 할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침에 결심했다가도 점심쯤 되면 그 결심이 무너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은데, 그리스도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려면 그분 안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늘에 오르신 그분 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셨고,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즉,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즉, 주님의 계명, 곧 주님의 말씀(로고스)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을 때,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얻습니다. 주님은 ‘말씀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그 말씀이 나를 새롭게 빚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 사람이 조금 변하고, 조금 착해지고, 예뻐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피조물’은 ‘티시스’인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창조물’이고, 인간 입장에서는 ‘피조물’입니다. 주님의 창조의 말씀 속에 있는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행하면,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빚습니다. 그러면 내 생각이 바뀌고 내 마음이 선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말씀에 의해 새로운 창조물로 지어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그런즉’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심지어 바울처럼 교회를 짓밟던 예수님의 적대자까지도 모두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을 달리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고, 그 말씀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빚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 말씀이 우리를 조금 선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에서 ‘지나갔으니’는 과거형입니다. 내가 말씀 안에서 살기 시작하고, 말씀을 행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말씀이 나를 새롭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과거의 나는 이미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진행형으로 나를 새롭게 빚으시기 때문입니다.
“보라!”는 감탄사입니다. 바울은 “보십시오, 나를 보십시오!”라고 말하듯이, “새것이 되었도다!” 하고 선포합니다. “새것”은 헬라어로 ‘카이노스’,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뜻합니다. 그리고 “되었도다”는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주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를 새 존재로 완성해 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새롭게 빚어 준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말씀 안에 산다면 벌써 새 존재가 되었어야 할 텐데, 아직도 그러지 못했다면, 여전히 말씀 밖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 몇 구절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분명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당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 시간마다 참석하고, 큰 헌금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심방을 다닌다 해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자기 욕심, 자기 명예심, 자기 이기심, 자기 편협한 감정, 세상에서 기인한 자기 이념 등을 부인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욕망, 여러분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새벽부터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영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나의 증인이 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그 앞에 수식되는 말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으신 분일수록,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더 크신 분일수록 ‘땅 끝’에 대해 채무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든지 보내든지”라는 표어를 내걸기도 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땅 끝을 ‘공간적으로 가장 먼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직접 보따리를 싸서 땅 끝으로 가든가, 아니면 그곳에 가 있는 선교사를 후원해야만 마음의 빚을 갚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의하면, 주님은 태초에 말씀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 분명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2,000년 전 사람들은, 땅을 끝까지 걸어가면 저 끝에 절벽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으니, 그들은 땅 끝을 공간적으로 가장 먼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은 평평한 면이 아니라 둥근 지구입니다. 갈릴레이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알려지고서도, 사람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생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땅 끝’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땅 끝을 ‘제일 먼 곳’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땅 끝을 아프리카나 남미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모두 보따리를 싸서 아프리카나 남미로 간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아프리카나 남미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기 위해 다 보따리를 싸서 한국으로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어느 방향이든지 ‘땅 끝’을 향해 계속 가면 결국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가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땅 끝은 ‘공간적으로 가장 먼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현장이 곧 땅 끝을 향한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내가 현재 딛고 있는 이곳이 땅 끝임을 깨닫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 내 생명을 거는 ‘마르튀스’(증인)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지리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멀리 가서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나 자신,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멀리 가서도 진정한 증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설령 먼 곳에 가서 뭔가 해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연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진짜 증인은 나를 잘 아는 사람, 흉허물 없는 사람 앞에서도 “저 사람은 예수의 증인이야”라고 인정받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현장이 땅 끝의 출발이자 종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땅 끝은 바로 “우리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 땅 끝인 가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가정이든, 또 어느 사회에서든, 가정은 정말 중요합니다.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사회가 시작되고, 국가가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66권인데, 그중 구약 성경이 39권입니다. 이 39권 중에서 제일 앞에 놓인 책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라는 제목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을 창조한 기록”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창세기는 그 제목이 딱 들어맞는 책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원래 구약 39권에는 지금과 같은 책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랍비나 율법학자들이 책을 인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각 책의 ‘첫 번째 단어’를 책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원전 첫 단어는 “브레시트(태초에)”입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 ‘게네시스’(기원, 발생)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영어로는 ‘제네시스(Genesis)’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신 분들이 이 단어를 ‘창세기’라고 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1장부터 50장까지 이루어진 창세기가, 온통 이 세상 창조에 대한 기록만으로 가득한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 2장까지만 나옵니다. 창세기는 ‘창세’의 내용만 담은 책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3장부터는 무슨 내용이냐 하면, 사실상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라는 가정을 만드셨고, 그들이 타락하자 노아라는 가정을 선택해 인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그 노아의 가정도 또 타락하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이라는 가정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의 가정, 손자 야곱의 가정을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 그리고 국가로 발전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정말 따지고 보면, 창세기는 ‘창가(創家)’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즉, 성경의 첫 부분부터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땅 끝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땅 끝인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결혼의 의미에 맞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그 삶에 동화됩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믿음의 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결혼 제도를 주시면서, 결혼을 무엇이라 정의하시는지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마가복음 10장 6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결혼을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리고 “그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니, 사람들이 함부로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가 되어, 둘이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둘이서 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이 씨 집안이 있고 옆에는 시 집안이 있다고 해 봅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자기 인생을 각자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된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두 인생”이 아닌 “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인간의 일생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입니다. 이때는 부모와 같이 살든 따로 살든, 기본적으로는 자기 혼자 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결혼 이후, 남편과 아내가 “둘이서 한 인생”을 사는 시기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남은 사람이 혼자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이미 떠난 사람 몫까지 “혼자서 두 인생”을 사는 셈이 됩니다.
결국 결혼은, 혼자 한 인생을 살던 두 사람이 한 인생을 같이 사는 것입니다. 둘이서 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관계는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결혼을 했어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둘이 한 인생이 아닌 각자 따로 두 인생을 사는 부부가 너무도 많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고들 말합니다. 둘이 한 인생을 살아야 할 남편과 아내가,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각자 두 인생을 산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반드시 “둘이서 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둘이서 한 인생을 살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환경,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두 성인이, 서로의 인생관도 다른 상태로 만나서 함께 한 인생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신앙관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같은 교회를 다닌다든지, 같은 부서에서 봉사한다든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두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 인생과 가정의 머리로 모시고 산다는 신앙관을 진정으로 공유할 때에만, “둘이서 한 인생”을 사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세상의 은금이나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결단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결국 각자 인생을 따로 살게 되기 십상입니다.
제가 글 하나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습니까?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 수양을 위하여, 사회사업을 하기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 증거로는 그들 중에 자기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라면 살인, 강도, 사기 같은 악한 죄가 아니라면, 자신은 의인인 줄로 압니다. 기도할 때 입으로는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기도를 마치고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원한다고 하나, 늙은 이에게 영생은 욕심밖에 되지 않고, 젊은 이에게 영생은 내용 없는 빈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를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 다 누리고, 그 후에 천국에 가서 불신자는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더 얻으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욕심의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라는 텅 빈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실상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 같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할 텐데,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큰 아파트, 더 좋은 차’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세속적 가치관을 우선순위로 삼는 부부 사이에서는 “같이 한 인생을 살자”라는 외침에 반응하지 못하거나, 서로가 발목을 잡으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은 지금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1935년에 김교신 선생이 쓴 글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시절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더 좋았다’라고 착각합니다. 1935년은,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지 50년쯤 된 시점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초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도 이미 뜻 있는 이들의 눈에 “참된 그리스도인”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있는 죄성은 2,0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심령으로, 주님만이 주인이라는 동일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그 가정을 “둘이서 한 인생을 사는 믿음의 땅 끝”으로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있던 선천성 하반신 마비 환자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후 3시 기도를 드리러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하반신 마비 환자가 베드로에게 “한 푼만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를 주목하라”고 하여,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가 일어나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참 큰 감동을 받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었는데,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인 교회를 섬길 때 다시 이 본문을 읽으며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아내”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하반신 마비 환자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소”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총각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5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베드로는 결혼을 해서 장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3년 이상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하반신 마비를 일으키는 장면은 더 나중 이야기입니다. 그 기간 동안 베드로에게 자녀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분명 베드로는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하고, 장모님도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장이 “나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돈 버는 일이 내 소관이 아니라, 예수를 좇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때 베드로의 아내가 “당신 지금 무슨 소리야, 돈 좀 벌어 오라고! 애도 가르쳐야 하고, 우리도 더 큰 평수 아파트로 이사 가야 하잖아. 나도 좀 편한 차 타보고 싶어!” 하면서 발목을 붙잡았다면, 베드로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남자라고 다 강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결사적으로 반대하면 그 길을 걷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렇게 세상 은금을 구하지 않고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며 생명의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아내가 동일한 신앙관을 가지고 밀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보, 당신은 예수를 따라가세요. 자식과 장모님 일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하고 지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반신 마비 환자가 흐릿한 눈으로 구걸할 때, 베드로가 그를 응시했다면, 베드로 안에서는 아내의 시선도 함께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이미 아내가 허락한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이 있으니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세상의 은금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동일한 신앙관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행전 3장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남편과 아내가 동일한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라는 것은, 부부가 가정이라는 땅 끝에서 증인으로 살기 위한 ‘총론’입니다. 그런데 총론만으로는 구체적인 삶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론이 따라야 합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삶의 원리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강론이 실현될 때, 비로소 그 총론이 열매를 맺습니다.
첫째, 결혼은 “부모를 떠나는 예식”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자식을 떠나보내고, 자식도 부모를 떠나는 예식입니다. 마가복음 10장 7절 말씀에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 인생을 살려면, 부모가 자녀를 떠나보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은 결코 자기 배우자와 둘이서 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부모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무조건 공간적으로 분가를 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편에 따라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리(촌수)”를 확실히 지켜 주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녀와 부모가 1촌 관계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내가 0촌, 곧 ‘영(零)촌’이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1촌으로 여전히 남지만, 부부가 서로에게는 0촌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시키면서 혼수를 해 주고, 전세 자금을 보태 주면서도, 정작 ‘부모와 자식의 거리’를 지키려 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또 자녀 쪽에서도 결혼하고서도 부모에게 계속 매달려, 부부가 서로를 영순위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로서는 “내가 며느리를 얻었다” 혹은 “내가 사위를 얻었다”라고 생각해서 자녀의 결혼에 지나치게 개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 결혼은, 내 아들이 내 아들이고, 내 딸이 내 딸이되, 이제는 이들이 각자 배우자를 만나 둘이서 한 인생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내 아들의 배우자가 며느리가 되고, 내 딸의 배우자가 사위가 됩니다.
결혼 후에는 부부가 서로에게 영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연스레 1촌으로 물러나 주어야 합니다. 자녀 또한 부부가 서로를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이 어머니를 자기 영순위로 두거나, 아내가 친정어머니를 자기 영순위로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집은 자녀가 태어나면 자녀를 영순위에 두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영순위에 두는 집도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남편과 아내가 영순위가 되어 둘이서 한 인생을 살아야, 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요즘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스펙을 쌓아 주려고 애쓰지만, 정작 자녀가 나중에 제대로 된 행복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에게 최고의 학벌을 줘도, 부부가 서로 영순위로 살지 못하면, 그 자녀가 진정한 행복을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결혼은 부모로부터 자녀를 떠나보내는 예식”이라는 원칙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지켜야 합니다.
둘째,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죽는 예식”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평생을, 한 인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죽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초록색 페인트와 노란색 페인트가 있다고 해 봅시다. 두 캔이 따로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색이지만, 섞으면 노란색이 초록색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초록색이 노란색으로 흡수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색이 섞이는 순간, 둘 다 죽고 새로운 색, ‘연두색’이 만들어집니다.
결혼하기 전, 한 사람이 혼자 살던 삶이 ‘초록색’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노란색’이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초록색도 노란색도 각각 ‘죽어서’, 제3의 색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총각이 결혼하기 전 자신의 삶을 그대로 고집한다면, 남편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처녀가 결혼 전 자신의 삶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내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일종의 ‘죽는 예식’입니다. 아이가 생기면 또다시 죽어야 합니다. 남편이었던 내가 ‘아버지’로 거듭나야 하고, 아내였던 내가 ‘어머니’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둘이 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일 ‘나’를 죽이는 과정입니다. “나는 초록색이니까 내 색깔만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매일매일 내 고집과 옛 사고방식을 죽일 때, 서로는 진정으로 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때서야 서로가 서로에게 땅 끝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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