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을 신뢰하라
믿는다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요?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멘”이라고도 하는데, 여러분은 어떤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십니까? 우리는 믿음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저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려서, 굉장히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때가 언제였냐 하면, 중학교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 제가 왜 그런 고민을 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은 원불교 집안이었고, 할아버지께서는 원불교 교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저희 집안은 종교적으로 꽤 특별한 ‘에너지’가 있는 가정이었는데, 가족마다 종교가 다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 전통은 유교적인 전통이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집안의 종가집 맞손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셈이지요.
집안에선 어머니만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안방 장롱 구석에 성경책을 몰래 숨겨두셨다가, 주일이 되면 꺼내 들고 교회에 가셔서 예배를 드리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 두 분만 따로 떨어져 사실 때는, 새벽마다 저를 일찍 깨워 기도하게 하시거나, 주일에 저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러 가기도 하셨습니다. 한편,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데리고 온갖 사찰을 돌아다니시며 불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께서 지방에서 사실 시기가 되어, 저와 동생들을 할아버지 댁에 맡기셨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우리 집안 다른 사람들은 뭘 믿어도 괜찮지만, 너만은 안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일에 몰래 몰래 예배에 나가는 게 굉장히 부담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을 믿어야 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나? 다른 길은 없는 걸까?” 하고 고민이 생기니,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그 시기에는 밥맛도 별로 없고, 뭐 먹고 싶지도 않고, 삶의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모처럼 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찬송가를 흥얼거리시면 그게 귀에 거슬렸습니다. “엄마, 나 공부해야 되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제가 굉장히 까칠해졌구나 싶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기에는 무신론과 관련된 책자들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소설을 읽기도 하면서 더욱 헷갈렸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려 보니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도신경 안에 “믿고, 믿고, 믿고…” 이런 구절이 계속 나오는데, 저는 제가 믿는지 안 믿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믿지 않으면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건 거짓말 같고, 그러자니 고백을 못 하겠고, 참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련회를 갔습니다. 안면도 바닷가 쪽이었는데, 그때 강사분이 “여러분, 적어도 이번에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나무뿌리 하나는 뽑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무슨 말씀이시지?” 했는데, “나무뿌리를 뽑을 정도로 기도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요지였어요. 그 말을 듣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나무뿌리 뽑으면 되는 거라면 할 수 있겠다!” 하고 제 힘을 믿었지요.
바로 밖에 나가서 소나무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래도 밤새 기도해야 하니,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곧 이상한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멀티태스킹이 굉장히 약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밥을 먹으면 먹고, 말하면 말해야지, 밥 먹으면서 말을 잘 못 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나무를 뽑으면서 기도까지 동시에 하려니, 둘 중 하나만 집중되고 다른 한쪽은 놓치는 겁니다. 기도하다 보면 나무가 안 뽑히고, 나무를 뽑으려다 보면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더 작은 나무를 골라야겠다. 야심을 줄이자.” 하고 작은 나무를 찾아 뽑으려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되는 거예요. 시간을 보니 두세 시간 지나도 전혀 진전이 없고, 짜증이 나서 나무를 두드려 패고, 발길질도 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날 저는 기도도 못 하고, 나무도 못 뽑고 끝나버렸습니다.
물론, 그 나무뿌리를 뽑으려는 열심 자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무뿌리를 뽑는다고 꼭 믿음이 생기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 시기에 저는 “내가 과연 믿음이 없는가?”를 증명해보려 했는데, 그것도 증명이 안 됐습니다. 분명 믿음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교회를 안 다니는 친구에게 열심히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며 전도하려고 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이게 믿는 건가, 아닌가?” 하는 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어느 시기에는 내가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똑 떨어지게 증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어느 날 조용히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아,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구나. 이건 위로부터 오는 거구나. 내가 ‘믿어야지!’ 하고 결단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것이구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구했던 것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믿음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흔한 착각
많은 분들이 믿음에 대해 착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적으로 동의한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지요. 주일 설교를 듣고, “아, 맞아. 좋은 이야기네. 아, 원리가 그렇구나” 하고 이해한 것을 가지고 “내가 믿음이 생겼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제가 한 번은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히 우리 할머니를 위해 오래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할머니가 하나님을 믿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런데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통화하는데 어머니께서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는 마음이 무척 우울해졌습니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이제 할머니 구원은 물 건너갔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저는 “믿음이 생기려면 성경 공부를 하고, 교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 지식이 쌓여서 믿음이 된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치매에 걸리셨다면, 그 지적인 능력 없이 어떻게 교리나 성경적 원리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 “이제는 안 되겠구나, 끝이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할머니께 전화를 드려서 “예수님 믿으셔야 해요”라고 하면, 할머니께서는 “나 그런 사람 몰라요” 하고는, 저 역시 “할머니, 저예요. 할머니 장손주요.” 해도 “나 잘 모르겠다” 하시고 전화를 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건 정말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시기 시작했어. 그리고 세례도 받으셨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속으로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니,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하시는 거겠지. 마음속에 믿음이 들어갔을 리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또 “할머니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시는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왜요?” 하고 여쭤보니, 할머니께서 혼자 계실 때 찬송가를 부르시기 시작하시는데, 처음엔 어머니가 들어보지 못한 곡이라서 ‘이게 무슨 세상 노래인가’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찬송가 책을 뒤져봤더니, 할머니가 부르시는 그 곡의 가사가 실제 찬송가에 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어머니가 교회 일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셨는데, 예전 같으면 할머니가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어디서 뭐 했느냐.” 하시며 호통을 치셨을 분이, 이번엔 “뭐가 어려우냐, 뭐가 힘드냐. 예수 선생하고 같이 있었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고 외롭지도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건 지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믿음은 지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능력이구나. 그 믿음이 들어가면 마음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는구나.”
긍정적 사고와 믿음은 다른 것이다
물론 긍정적 사고방식, 파지티브 싱킹이 중요하고, 성경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방식과 믿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밝게 생각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 자신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라고 말하는 것은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 믿음을 주세요!” 하며 자기 확신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열심히 ‘자기 확신’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곧 믿음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딱 한 줄로 정의해주면 좋으련만,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통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어떨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다이내믹이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다.” 오늘 저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 중 한 측면을 집중적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믿음과 번지점프의 공통점
제 생각에 믿음을 ‘번지점프’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번지점프는 몸에 줄을 묶고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잖아요. 뛰어내릴 때 오싹하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힘든 것은, 밑으로 떨어지다가 줄에 의해 위로 튀어 오를 때입니다. 내가 어디로 튀어 오르는지 모르고, 강력한 줄의 힘에 끌려 올라갈 때,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가는 길을 내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고 하셨지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내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컨트롤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를 하나님께서 좌우하시는 상황, 내가 결정하지 않은 길로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오싹하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요셉의 삶이 그랬습니다.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요셉처럼 꿈을 가져라!”라고 말하지만, 사실 요셉은 자기가 꿈꾸고 싶어서 꿈꾼 것이 아닙니다. 그 꿈이 하늘로부터 그냥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비전 역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계획 세우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비전(묵시)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고 나옵니다. 즉 비전이 없으면, 자기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지만,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요셉을 구덩이에 빠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그를 건져 올리셨고, 또다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셨다가 다시 감옥에 떨어뜨리셨고, 결국 다시 총리 자리에 올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과정이 계속 “끌어올렸다가 떨어뜨리고, 다시 올렸다가 또 떨어뜨리는” 식이었습니다.
개인 간증
제 인생을 돌아봐도 이런 과정을 겪은 것 같습니다. 어딘가까지 떨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고 추락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하나님이 “뛰어내려라” 하실 때 제가 내려갔습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 그 추락의 과정을 조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담금질하시고, 제 안의 어떤 부분을 다루셨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나면 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더 높은 영적 시야를 가지고 서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또 떨어지고, 또 올라가고, 이런 식이 반복됩니다.
저는 제 믿음 생활이 이런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번지점프대 위에서 몸을 꼭 붙들고, 결코 뛰어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번지점프가 얼마나 짜릿하고 좋은지 설명을 들어도, 그냥 안전한 테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도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와, 대단하겠는데?” 하면서, 누가 뒤에서 장난으로 등을 툭 밀면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 발은 땅에 붙인 채로 계속 살피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다리는 땅에, 한 다리는 번지점프대에 디디고 있다면, 진정으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양발 모두 떨어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누리는 선물이 있는데, 바로 ‘변화’입니다.
물론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에는 떨어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걸 우리는 ‘연단’이라고 하지요. 제가 제 경험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인도네시아로 들어간 지 이제 만 3년이 된 달에 접어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몽골에서 사역했습니다. 몽골에 처음 갔을 때도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갔고, 그 사역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자 하나님께서 “이제 이 땅에서의 사역을 정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은 어디입니까?” 했는데, 하나님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을 안 주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인도네시아라는 곳으로 이끌리게 되었고, 나중에 거기에 대한 부르심을 점검한 뒤 확신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세워야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막상 보니 준비된 것이 너무 없는 거예요. 한편, 그 땅에서 대학 사역을 하려면 무슬림권에서 정식 허가를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장벽이 많아 보였습니다. 사역을 감당하려면 10, 100배 더 큰 재정이 필요해 보였고, 아무런 사례비 없이 함께 헌신해줄 선교사님들이나 현지인 크리스천 봉사자들도 필요했습니다. 저 혼자 빈털터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계속해서 큰 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원래 학자형 인간이라, “내 능력선 안에서만 작은 일을 하다 하늘나라 가면 되지” 하는 식으로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세안 6억 인구에 대한 내 마음을 네게 주겠다. 네가 그것을 품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대학만이 아니라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전 과정을 다루는 교육, 또 기술 교육이나 언어 교육 등을 아우르는 종합 캠퍼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그저 엄청난 사명만 덜컥 맡겨진 거죠.
그러니 인도네시아에서 제가 처음 한 일은 ‘공부’였습니다. 몽골에서는 그래도 제가 대학교 부총장이었고, 박사 학위까지 마쳐서 “이제 시험 같은 건 안 보겠지!” 했는데, 다시 대학생이 되어 언어 시험을 치르며 단어 외우고... 그런 시간을 보내며 “정말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또 여러 가지로 연단하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건강 문제였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들어가기 전, 미국 샌디에이고 지역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집회에서 “하나님, 제가 다음 갈 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오. 인도네시아로 가야 합니까?”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김화중 장로님이라는 분이 강사 중 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제가 “저를 위해 기도 좀 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말씀을 주셔야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부탁했더니, 그분이 호텔 방에서 기도를 해주셨고, 얼마 후 기도 편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장로님께서 “선교사님, 어디 떠난다고 하시는데요?” 하고 물으시기에, “네, 몽골 사역을 정리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곳으로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지금 인도네시아를 놓고 기도 중입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하나님께서 인도네시아 그 땅에 이미 함께할 동역자와 여러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두셨다고 하십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교사님, 건강에 뭔가 어려움이 있으신가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 췌장에 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하지 않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하나님께서 건강상의 어려움이 있을 테니 특별히 유의하라 하십니다”라는 기도 편지를 건네주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하나님이 제 건강을 챙기신다는 건 아픈 데 신경을 쓰신다는 건데, 그렇게 전지전능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면 아예 낫게 해주시면 되지 않나요? 왜 ‘아플 테니 조심하라’고 하시지?” 하고,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머릿속으론 정리가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런 의문이 제 안에 있었지요.
인도네시아에서 언어 과정을 마친 뒤,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제가 미국에서 나오고 인도네시아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의사들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는 “췌장의 3분의 1을 절제하면 괜찮을 것”이라며 수술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제하면 제 면역력이 약해져서, 풍토병이 많은 인도네시아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기 사역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웬만하면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변에도 기도 요청을 많이 드렸고, 특히 열심히 기도했는데, 저와 함께 기도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감동은 “수술을 받아라. 여호와의 손이 함께하실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여호와의 손이 함께하신다면 수술 없이도 낫게 해주실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러웠지만, 결국 수술 쪽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마침 제가 예전에 몽골에서 단기 의료선교로 함께했던 오한태 선생님이 떠올라,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그분이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간담췌 분야 과장님으로 계셨는데, “제가 그 수술은 정말 많이 해봤습니다. 복강경 수술 세계 기록 보유자예요. 한 번 와보세요.”라고 하시더군요. 병원에 가서 차트를 보여드렸더니, 다른 의사들은 전부 췌장을 많이 잘라내자고 했지만, 이분은 “혹만 제거하면 어떻겠느냐.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다른 부위까지 절제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선교사님 향후 사역에 지장이 덜 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수술은 위험도가 있었습니다. 췌장을 건드리다가 새면 큰일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그분이 “기도해보겠다”고 하셔서, 저도 기도 끝에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1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는데, “여호와의 손이 함께하신다”고 해서 기적처럼 빠르게 회복될 줄 알았지만, 반대로 이상할 정도로 후유증이 계속됐습니다. 예상치 못한 고열이 생기고, 폐렴이 오고, 합병증이 계속 터졌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게 12월 31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송구영신예배에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몸에 나와 있는 줄을 가리고 집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은혜롭게 설교까지 했으면 금방 회복되겠지”라고 기대했는데, 그날 밤부터 고열이 다시 나고 잠도 못 자는 상태가 되어, 결국 또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1월 1일에 제게 꺼낸 이야기는, “췌장관이 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큰 수술을 다시 해야 하느냐, 장기를 더 들어내야 하느냐 하는 심각한 상황이 됐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상태라, 그냥 두면 40%~50% 정도의 확률로 아물 수도 있지만, 아물지 않으면 평생 배액관(管)을 달고 살거나 오래 못 살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거의 기로에 서게 된 겁니다. 의사 선생님과 기도하면서 결정한 것은 “여호와의 돕는 손을 의지해서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 왜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믿음으로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기간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찾아와 기도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기도받고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아도, 정작 제 일은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 참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요. 혹시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보셨을 텐데, 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연단하시는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기도하게 되었느냐면, 마지막엔 “하나님, 어떤 결과가 와도 제가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저에게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 결말이 무엇이든, 제가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구했습니다.
반면 제 아내는 “하나님, 저는 압니다. 사명자가 그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데려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도네시아 선교 사명이 있으니, 건강해야 합니다. 완전히 낫게 해서 깨끗한 몸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사역이 불가능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둘 중 어느 기도가 믿음이 더 큰 기도 같으냐고 묻는다면, 사실 정답이라는 건 없어요. 두 기도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낙담하거나 좌절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낙담이 찾아오기도 하고, ‘정말 믿음이 거의 0에 가까운 것 같다’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작다’와 ‘없다’는 전혀 다른 문제더군요. 믿음은 ‘퍼펙션(perfection)’의 문제가 아니라 ‘디렉션(direction)’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상태는 기적적으로 아물었습니다. 16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기다렸는데, 결국 상처가 아물었고, 지금은 이렇게 비행기 타고 한국에 와서 말씀도 전할 정도가 되었으니, 많이 회복된 셈이죠.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 돌아보니, 제가 ‘산’처럼 느꼈던 문제들 중 여러 가지를 하나님께서 정리해주셨음을 알게 됐습니다. 연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는데, ‘이 산은 절대 못 넘겠다’ 하고 절망하던 지점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경험을 하면서, 제 마음속 불안이 정리되고, 더욱 믿음이 자라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예배 가운데, 현지인들이 “주 품에 날 안으소서”라는 찬양을 부르는 걸 듣는데, 제게 “주님, 저도 좀 안아주시면 안 됩니까” 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정말 가까이 계시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눈물이 주르륵 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너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고, 사역이 돌파되지 않고, 여기서 인생을 허비한다고 느껴지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로 인해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겠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주님, 그렇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이 안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식으로 담금질하실까요?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게 만드는 게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사역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일차 관심은 바로 우리 자신을 다듬고 만지시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도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불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하셨습니다. 거기서 “불이나 물 같은 어려움 자체가 절대 안 온다”라고 하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그 불과 물을 통과하되, 죽을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면서 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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