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창세기 17 : 1~6, 15~16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들어가는 말 - “즉시의 시대”,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
오늘 우리는 ‘바로도착·오늘드림·샛별배송·로켓배송’ 으로 대표되는 ‘즉시의 시대,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즉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집중력은 2000년에는 12초였으나 2025년 지금은 8초에 불과합니다. 금붕어의 집중력(9초)보다도 작습니다. 27 Average Human Attention Span Statistics for 2025
그러나 신앙은 기다림으로 심화됩니다. 믿음 =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품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기다림’이란 시간을 두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시 27:13~14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in the land of the living)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 기다림 Qawah 카와 : 큰 기대감으로 바라보다
- 여기서의 기다림은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힘 있게 길게 기다리라!'는 느낌이다.
- 사 40:31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앙망하다 = '기다림' + 소망
- 아브람·사래의 10년 한계와 “이스마엘”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자, 70대 중반의 사래는 생리가 끊긴 지 오래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갈이라는 ‘대안’을 택합니다(창 16).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림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 “기다림은 기다랗다.”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매우 길고 지루한 시간입니다.
- 우리의 믿음 만큼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기다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 하나님이 기다림이란 시간을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 자아가 깨어지고 우리 안의 무능력을 보게 된다. 그 철저한 무능력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 - 기다림의 시간은 나의 때를 하나님께 맞추는 훈련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기다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본문 1절의 아브람의 나이는 99세입니다. 바로 앞장 16절(마지막 절)에서 아브람의 나이는 몇 세였습니까? 86세. 성경 구절 한 절 사이에 몇 년이 흐른 것입니까? 13년
13년의 침묵과 다시 들려온 음성
이스마엘 탄생 당시 아브람은 86세(창 16 : 16), 오늘 본문은 99세(창 17 : 1)입니다. 불과 한 절 사이에 13년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 아브람은 이스마엘의 장성을 바라보며 안락한 노후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침묵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13년 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브람의 잠든 영혼을 흔드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준비'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 1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환상도 없었다. 아브람의 마음이 얼마나 갑갑했을까? 답답했을까?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아브람의 이 13년간의 희로애락의 여러 일들에 대해 성경은 침묵한다. 하나님과 함께 보낸 시간만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삶을 살아가자.
그러나 그 영적 암흑기에 아브람은 익숙해졌다. 하나님 음성 없이 살아가는 것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스마엘의 재롱과 장성을 지켜보는 낙이 있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24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이스마엘을 보며 그의 안락한 노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더 놀라운 계획(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을 가지고 계셨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일만이 우리 삶에서 의미 있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삶을 날마다 살아가자.
[3] 13년 만에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 한 것이 죄였다.
세상의 어려움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대안적 시도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전능함이 임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여쭙는 것이, 오직 하나님이 옳다는 생각과 신뢰가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내 소견,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은 죄다. (블로그 저자의 생각)
첫 번째 작업 ─ 새 이름 “엘 샤다이”의 계시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 1)
- 그 순간 아브람의 두꺼운 영적 껍질이 깨어졌다. ‘엘 샤다이’는 아브람이 처음 듣는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이름으로 찾아오실 때, 그것은 바로 우리 상황 속에 가장 정확하게 힘이 되어주시는 이름이었다.
[4]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정리해 보세요.
- 엘 샤다이는 아브람이 처음 듣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으로 배워 갔습니다.
-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여호와 하나님….. 창 12:1 YHWH I am who I am 스스로 있는 자.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 전쟁의 큰 승리 이후에, 엘 엘리온의 하나님…. 창 14:9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엘 엘리온. The most high God
-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을 때…. 창 15:2 주(아도나이) 여호와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때 :여호와 이레 하나님…. 창 22:14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보시는 하나님 YHWH Jireh, God will provide. 미리 보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
왜 지금 “엘 샤다이”일까요? 아브라함의 이스마엘 사건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능력을 넘어 전능하시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많은 호칭이 있다. 그 호칭이 불릴 때 우리는 거기에 묶이게 된다. 노모께서 부르시는 ‘아들~’, 어린 자녀가 부르는 ‘아빠’….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다양한 이름으로 찾아오시는가? 그 약속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라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다.
왜 지금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셨는가? 아브람과 사래가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그 실수를 저지른 것이기에,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셨다. 내 환경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 인생 가운데 여러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무리 장수해도 하나님 없이는 한 줄로 끝나버리고 만다. 인생의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5]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완전함’
여기서 말하는 완전함이란, 도덕적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에 있음을 항상 의식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완전함은 인간이 성취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에서 주어집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걸을 때 가장 안전하듯,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걸을 때 넘어져도 안전합니다.
완전함, 고결함, 손상이 없는…. 이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요구가 아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가능하지 않은 요구를 하시는 걸까?
‘내 앞에서 행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있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을 할 때 ‘완전해진다’.
'내 앞에서 행하여'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로 번역한 영문 성경이 있다. NASB는 "Walk before me."로 번역했다. 즉, 우리 뒤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뒷배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백그라운드로 우리는 완전할 수 있다.
애굽에 내려간 아브람은 바로 앞에서 행했기에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 베드로도 여종 앞에서 있었기에 예수님을 배반했다. 엘리야도 이세벨이라는 위협 앞에 있을 때 두려워 도망쳤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진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기에 우리는 완전해진다.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걸을 때, 어느 순간이 가장 안전할까? 부모 앞에서 걸어갈 때는 그 아이는 안전하다. 부모가 반드시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넘어져도 안전하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부모 눈에서 벗어나 행동할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설교자 주경훈 목사님도 설교하러 강단에 오르기 전에 늘 “주님, 가시지요.”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언제나 엘 샤다이의 하나님 앞에서 행하세요.
[6] 새로운 이름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두 번째 작업 ─ 아브람·사래에게 주신 새 이름
“이제부터 너를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창 17 : 5, 15)
- 아브람(존귀한 아버지) →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
- 사래(나의 공주) → 사라(열국의 어머니)
이름을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이름은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바꾸심으로 미래를 선언하시고, 기다림의 끝에서 전혀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둘째,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창세기 17장)
1. 이름의 변화: 하나님의 약속과 정체성의 전환
- 아브람 → 아브라함
- 아브람: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 그러나 현실 속 아브람은 86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이름은 오히려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이스마엘을 온 힘을 다해 13년 동안 양육했을 것입니다.
- 아브라함: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 이 이름은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자연법칙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크신 사이즈의 꿈을 담은 이름입니다.
- 사래 → 사라
- 사래: "나의 공주"라는 뜻. 사적인 의미가 강한 이름입니다.
- 사라: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 이제 그녀는 아브라함과 함께 민족의 어머니가 될 사명을 지닌 자로 새롭게 불리게 됩니다.
성경 속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과 기대가 담긴 정체성입니다.
Q. 하나님은 왜 한 사람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루셨을까?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를 만드시며, 그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Q. 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는가?
구원은 단순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문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Q.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 살고 있는가? 여쭙고 있는가?
2. 왜 지금 이름을 바꾸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을 부르실 때 곧바로 이름을 바꾸십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 → 게바(베드로)
- 사울 → 바울 (선교여행 시점에)
그러나 아브람과 사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을 처음 만난 75세가 아니라, 24년이 흐른 99세의 시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진짜 믿음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생물학적인 한계, 모든 대안이 사라진 상황 —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적 대안이 아닌,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대안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의 방법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한계 끝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엘 샤다이)이 드러납니다.
[7]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인(Christianos)입니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이 이름 안에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 우리 뒤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께서 계십니다.
그 사이를 걷는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이름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사명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꿈을 담은 새 이름을 받았고,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예수 그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하며 나아갑시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믿을 때 우리 삶에도 치유, 회복, 용기, 기쁨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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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 창세기 17 : 1~6, 15~16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들어가는 말 - “즉시의 시대”,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
오늘 우리는 ‘바로도착·오늘드림·샛별배송·로켓배송’ 으로 대표되는 ‘즉시의 시대,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즉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집중력은 2000년에는 12초였으나 2025년 지금은 8초에 불과합니다. 금붕어의 집중력(9초)보다도 작습니다. 27 Average Human Attention Span Statistics for 2025
그러나 신앙은 기다림으로 심화됩니다. 믿음 =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품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기다림’이란 시간을 두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시 27:13~14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in the land of the living)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 기다림 Qawah 카와 : 큰 기대감으로 바라보다
- 여기서의 기다림은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힘 있게 길게 기다리라!'는 느낌이다.
- 사 40:31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앙망하다 = '기다림' + 소망
- 아브람·사래의 10년 한계와 “이스마엘”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자, 70대 중반의 사래는 생리가 끊긴 지 오래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갈이라는 ‘대안’을 택합니다(창 16).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림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 “기다림은 기다랗다.”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매우 길고 지루한 시간입니다.
- 우리의 믿음 만큼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기다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 하나님이 기다림이란 시간을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 자아가 깨어지고 우리 안의 무능력을 보게 된다. 그 철저한 무능력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 - 기다림의 시간은 나의 때를 하나님께 맞추는 훈련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기다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 기다림 자체가 최고의 검증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본문 1절의 아브람의 나이는 99세입니다. 바로 앞장 16절(마지막 절)에서 아브람의 나이는 몇 세였습니까? 86세. 성경 구절 한 절 사이에 몇 년이 흐른 것입니까? 13년
13년의 침묵과 다시 들려온 음성
이스마엘 탄생 당시 아브람은 86세(창 16 : 16), 오늘 본문은 99세(창 17 : 1)입니다. 불과 한 절 사이에 13년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 아브람은 이스마엘의 장성을 바라보며 안락한 노후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침묵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13년 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브람의 잠든 영혼을 흔드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준비'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 1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환상도 없었다. 아브람의 마음이 얼마나 갑갑했을까? 답답했을까?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아브람의 이 13년간의 희로애락의 여러 일들에 대해 성경은 침묵한다. 하나님과 함께 보낸 시간만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삶을 살아가자.
그러나 그 영적 암흑기에 아브람은 익숙해졌다. 하나님 음성 없이 살아가는 것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스마엘의 재롱과 장성을 지켜보는 낙이 있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24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이스마엘을 보며 그의 안락한 노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더 놀라운 계획(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을 가지고 계셨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일만이 우리 삶에서 의미 있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삶을 날마다 살아가자.
[3] 13년 만에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 한 것이 죄였다.
세상의 어려움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대안적 시도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전능함이 임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여쭙는 것이, 오직 하나님이 옳다는 생각과 신뢰가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내 소견,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은 죄다. (블로그 저자의 생각)
첫 번째 작업 ─ 새 이름 “엘 샤다이”의 계시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 1)
- 그 순간 아브람의 두꺼운 영적 껍질이 깨어졌다. ‘엘 샤다이’는 아브람이 처음 듣는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이름으로 찾아오실 때, 그것은 바로 우리 상황 속에 가장 정확하게 힘이 되어주시는 이름이었다.
[4]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정리해 보세요.
- 엘 샤다이는 아브람이 처음 듣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으로 배워 갔습니다.
-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여호와 하나님….. 창 12:1 YHWH I am who I am 스스로 있는 자.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 전쟁의 큰 승리 이후에, 엘 엘리온의 하나님…. 창 14:9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엘 엘리온. The most high God
-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을 때…. 창 15:2 주(아도나이) 여호와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때 :여호와 이레 하나님…. 창 22:14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보시는 하나님 YHWH Jireh, God will provide. 미리 보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
왜 지금 “엘 샤다이”일까요? 아브라함의 이스마엘 사건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능력을 넘어 전능하시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많은 호칭이 있다. 그 호칭이 불릴 때 우리는 거기에 묶이게 된다. 노모께서 부르시는 ‘아들~’, 어린 자녀가 부르는 ‘아빠’….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다양한 이름으로 찾아오시는가? 그 약속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라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다.
왜 지금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셨는가? 아브람과 사래가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그 실수를 저지른 것이기에,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셨다. 내 환경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 인생 가운데 여러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무리 장수해도 하나님 없이는 한 줄로 끝나버리고 만다. 인생의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5]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완전함’
여기서 말하는 완전함이란, 도덕적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에 있음을 항상 의식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완전함은 인간이 성취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에서 주어집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걸을 때 가장 안전하듯,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걸을 때 넘어져도 안전합니다.
완전함, 고결함, 손상이 없는…. 이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요구가 아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가능하지 않은 요구를 하시는 걸까?
‘내 앞에서 행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있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을 할 때 ‘완전해진다’.
'내 앞에서 행하여'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로 번역한 영문 성경이 있다. NASB는 "Walk before me."로 번역했다. 즉, 우리 뒤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뒷배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백그라운드로 우리는 완전할 수 있다.
애굽에 내려간 아브람은 바로 앞에서 행했기에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 베드로도 여종 앞에서 있었기에 예수님을 배반했다. 엘리야도 이세벨이라는 위협 앞에 있을 때 두려워 도망쳤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진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기에 우리는 완전해진다.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걸을 때, 어느 순간이 가장 안전할까? 부모 앞에서 걸어갈 때는 그 아이는 안전하다. 부모가 반드시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넘어져도 안전하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부모 눈에서 벗어나 행동할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설교자 주경훈 목사님도 설교하러 강단에 오르기 전에 늘 “주님, 가시지요.”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언제나 엘 샤다이의 하나님 앞에서 행하세요.
[6] 새로운 이름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두 번째 작업 ─ 아브람·사래에게 주신 새 이름
“이제부터 너를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창 17 : 5, 15)
- 아브람(존귀한 아버지) →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
- 사래(나의 공주) → 사라(열국의 어머니)
이름을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이름은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바꾸심으로 미래를 선언하시고, 기다림의 끝에서 전혀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둘째,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창세기 17장)
1. 이름의 변화: 하나님의 약속과 정체성의 전환
- 아브람 → 아브라함
- 아브람: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 그러나 현실 속 아브람은 86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이름은 오히려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이스마엘을 온 힘을 다해 13년 동안 양육했을 것입니다.
- 아브라함: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 이 이름은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자연법칙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크신 사이즈의 꿈을 담은 이름입니다.
- 사래 → 사라
- 사래: "나의 공주"라는 뜻. 사적인 의미가 강한 이름입니다.
- 사라: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 이제 그녀는 아브라함과 함께 민족의 어머니가 될 사명을 지닌 자로 새롭게 불리게 됩니다.
성경 속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과 기대가 담긴 정체성입니다.
Q. 하나님은 왜 한 사람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루셨을까?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를 만드시며, 그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Q. 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는가?
구원은 단순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문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Q.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 살고 있는가? 여쭙고 있는가?
2. 왜 지금 이름을 바꾸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을 부르실 때 곧바로 이름을 바꾸십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 → 게바(베드로)
- 사울 → 바울 (선교여행 시점에)
그러나 아브람과 사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을 처음 만난 75세가 아니라, 24년이 흐른 99세의 시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진짜 믿음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생물학적인 한계, 모든 대안이 사라진 상황 —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적 대안이 아닌,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대안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의 방법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한계 끝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엘 샤다이)이 드러납니다.
[7]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인(Christianos)입니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이 이름 안에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 우리 뒤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께서 계십니다.
그 사이를 걷는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이름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사명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꿈을 담은 새 이름을 받았고,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예수 그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하며 나아갑시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믿을 때 우리 삶에도 치유, 회복, 용기, 기쁨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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