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 단지 수송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1945년 8월,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또 다른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주한미대사관 무관을 지내고 한국 현대사 연구의 명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남긴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해방 직후의 미군정과 존 R. 하지(John R. Hodge) 중장에 대해 아주 뼈아픈 평가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하지는 단지 수송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인물"이라며, "정무감각이 좋은 육군 대장 '스틸웰'로 내정했다면 한국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은 불운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 짧은 발언에는 어떤 역사적 진실과 씁쓸한 이면이 담겨 있을까요?
단지 가까이 있어서 선택된 사령관
헨더슨이 하지를 '수송 시간이 없어서 선택된 인물'이라고 꼬집은 데는 미국의 안일했던 전후 처리 방식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이후, 미국은 한반도 이남을 통치할 구체적인 계획이나 훈련된 인력이 전무했습니다. 소련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남하하자 다급해진 미군은 가장 빨리 한반도에 보낼 수 있는 부대를 찾았고,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당장 배에 태워 보낼 수 있었던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이 낙점되었습니다.
문제는 하지 중장이 태평양 전쟁의 험난한 전투를 치러낸 훌륭한 야전 사령관이었을 뿐, 복잡한 정치 지형을 조율해야 하는 행정가나 정치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그는 한반도에 도착하자마자 행정 편의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료와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재기용하는 치명적인 패착을 두었습니다. 이는 민중의 공분을 샀고,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준비 없는 점령'이 빚어낸 뼈아픈 나비효과였습니다.
스틸웰이 왔다면 정말 역사가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헨더슨의 가정대로 조지프 스틸웰(Joseph Stilwell) 대장이 파견되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스틸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버마-인도 전구를 지휘하며 아시아의 복잡한 정치 지형과 민족주의를 깊이 경험한 인물이었습니다. 헨더슨은 스틸웰처럼 정무 감각과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물이 파견되었다면, 해방 정국의 혼란을 훨씬 지혜롭게 수습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분명 스틸웰이 왔다면 친일 세력을 안일하게 등용하거나 한국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실수는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이 가정이 가진 한계 또한 지적합니다. 스틸웰은 '식초 조(Vinegar Jo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격이 깐깐하고 타협을 모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중국 전선에서도 장제스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던 그가, 이승만, 김구 등 자존심 강하고 각기 다른 노선을 걷던 한국의 복잡한 정치 지도자들과 원만하게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개인의 무능을 넘어선 거대한 구조적 비극
결국 헨더슨의 평가는 미군정의 초기 실책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평이지만, 해방 정국의 비극을 오직 한 개인의 무능으로만 치환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혼란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패권 경쟁, 즉 냉전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면서 빚어진 구조적 모순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조차 명확한 대한(對韓)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아무리 유능하고 정무감각이 뛰어난 장군이 파견되었다 한들 미소 냉전의 격화와 분단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혼자 힘으로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불운'
"한국은 불운했다"는 헨더슨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불운의 본질은 단순히 '하지'라는 부적합한 인물을 만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강대국들의 거대한 냉전적 이해관계에 휩쓸려야만 했던 한반도의 얄궂은 지정학적 운명 전체가 바로 그 불운의 실체였을 것입니다.
헨더슨의 발언은 단순한 인물 평을 넘어, 아무런 준비 없이 한반도에 선을 그었던 강대국의 무책임함과, 그 속에서 휩쓸려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슬픈 자화상을 동시에 비춰주는 묵직한 거울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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