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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만 에케하르트 게스케' 선교사가 운영하는 지르베출판사 사무실에서 게스케 선교사를 비롯하여 2명의 터키 목사(우르육셀,네자티아이든 목사)가 온 몸에 칼로 난도질 당하고 잘렸으며 마지막에는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하였다. 게스케 선교사는 156군데를 칼로 난도질당하였으며 육셀 목사는 이스탄불에서 사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역을 돕고자 말라티야에 왔다가 25군데를 칼로 난도질을 당해 순교했다
그의 시신을 부검했던 의사의 소견으로, 손가락이 잘려져 있었고 등, 배, 남자의 고환, 허벅지등이 잘려지거나 크게 상했으며 식도와 기도가 절단돼 있는 상태였다.
게스케 선교사의 미망인 수잔나 선교사는 '나는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했으며 네자티 목사의 사모도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한다,그리고 용서한다 '고 TV와 신문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였다.
살인자들은 나이가 19-20세 정도의 어린 청년들로서 3개월전에 미리 이들을 살해하고자 출판사에 와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라고하며 접근했으며 최근에는 부활절 예배에도 참석하여 선교사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범행전에 권총 쏘는 연습 등을 했고 빵을 자르는 칼 5개를 샀으며 범행 당일, 먼저 게스케 선교사가 2-3시간 동안 의자에 팔과 다리가 뒤로 묶여(돼지를 묶는 방법) 칼로 156군데를 찔리며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목이 잘렸는데, 이 당시에는 출판사사무실 옆에는 변호사사무실도 있었고 번화가였지만 주위사람들은 대화하는 정도의 소리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같은 교회 성도부부가 마침 출판사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그래서 전화로 육셀 목사를 찾아 대화를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육셀, 네자티 목사는 칼로 고문을 당하였지만 목이 잘리기 전이어서 생명은 살아있었다고 한다. 이 때 육셀목사의 목소리가 몹시 괴로운 상태였으며, 옆에서는 고통으로 인하여 네자티 목사의 우는 소리가 휴대폰으로 들렸다고 한다. 이것을 수상히 여긴 같은 교회 성도부부가 경찰에 연락하여 마침 순찰! 하던 경찰이 들이닥쳐 문을 열라고 할 때 이들 5명은 나머지 2명 목사의 목을 잘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틸만 선교사의 부인 수산나 선교사는 미살(13)과 미리암(8) 그리고 아들 누카스(11)와 함께 A TV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한 것이 무엇인지 진실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9년 반 동안 터어키 말라티아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평범한 삶을 살려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터어키인들이 독일에 와서 회교인으로서 사는 것처럼 우리도 터어키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믿습니다. 저의 남편은 헛되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죽은 터키인들의 피도 헛되고 헛되게 흘려지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터어키와 말라티아를 위하여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남편이 말라티아에 묻혀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으로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여기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에 보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 옆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습은 그렇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무덤에 다녀오곤 할 것입니다. 어린 딸들은 꽃을 (아빠의 무덤에) 놓아두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돌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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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셨던 영상이 우리 가족이 당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후에도 우리 가족은 모두 터키에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가 강한 여인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 때를 위해 나를 단련시키셨기 때문이다.
터키로 가기로 결정한 이후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작은 어려움들을 겪으며 이 큰 어려움을 견뎌내도록 준비를 시키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려고 노력하고 그 음성을 들었을 때에는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 충성은 물질과 소유 뿐만 아니라 다른 삶의 모든 영역에도 이 말씀은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은 일에서 훈련시키시면 큰 일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1997년에 온 가족이 함께 터키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 거주한 곳은 아데나라는 작은 도시였다.
거기에서는 여러 소소한 일들이 생겨나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싸워나갔다.
(롬 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터키의 동부로 다시 이주를 하게 되었다. 더 작은 도시, 교회가 더더욱 없는 곳...곧 말라티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회사(지르베출판사)를 설립해서 영어와 독어를 가르치고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회사였다.
3명의 외국인과 1명의 현지인 총 4명이 이 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터키 정부 당국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말라티아로 이주 직전에 말라티아 현지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벌써 신문 1면을 장식했다는 것이었다.
정보국에서 언론에 정보를 흘려서 '선교사라는 나쁜 사람들이 우리를 기독교도로 바꾸기 위해 말라티아로 몰려오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노력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말라티아에 작은 가정교회를 세웠고 그로부터 3년 반동안은 터키 정부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압박도 가해지지 않았다.
우리 남편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주변의 터키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압박을 받지 않았지만,
마을에 들어가 성경을 나누어 주던 내 현지인 친구들은 자신들이 언제 체포될 지 모른다는 위험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오늘 동영상에서 본 이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내가 진실한 키독교인이 된 지 20년이 되던 해였다.
그 일은 내게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었고 아무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그 때를 위해 나는 그동안 준비되어 온 것 같다.
그래서 그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나는 계속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순종하려 애썼다.
2007년 8월 14일이 바로 그 날이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맨 처음 든 생각은 '난 다시 혼자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남편과는 사별했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맨 처음 결정해야 할 일은 '현지에 머물 것인지 독일에 가야 할 지'의 문제였다.
혼자 고민하다가 당시 13살이었던 큰 딸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답은 '아빠는 주님을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는 여기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왔으니, 우리는 여기에 머물면서 그 일을 해나가야 해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의 시신도 고향이 아닌 말라티아에 묻고 그곳에 머물며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터키의 모든 목사님들이 우리 집으로 모였는데 갑자기 벨이 울리더니 터키 방송국에서 나를 찾는 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멍한 상태여서 인터뷰를 거절했으나 어느 목사님이 '지금이 복음 전파의 기회의 순간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줬는데, 잠든 나를 깨워주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승낙하고 "주님 저를 도와 주세요.'하고 짧게 기도를 했는데, 그 때 내게 떠오른 말씀이 바로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 저들은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용서합니다.'라고 얘기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다시 얘기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인터뷰를 본 당시 8세였던 우리 막내 아이의 얘기를 빌리자면, "어떻게 아빠를 죽인 사람들은 용서하면서 집주인과는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을 수 있나요?' 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그 때 그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헤와 감동 때문이었다. 그 때 내게는 진실로 증오심 등의 아무 나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나는 절대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크게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아픔과 혼돈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성경 말씀에서 약속하셨듯이 나와 함께 하셨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강으로 인해, 또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남겨졌다는 것 자체는 사실(true)이었다.
나는 15년간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나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께 솔직히 내 마음 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도했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 때, 언론이 힘들게 할 때... 그 때마다 '주님, 이것은 내 선택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누군가를 보내셔서 상황을 바꿔주시는 것이었다.
그 일 이후 이틀 후에도 17명이나 우리 집에 남아서 숙식을 하고 있었기에 집 안에서 돌아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곳이 부엌이어서 부엌에서 성경을 읽으려 했는데 차분히 읽을 수도 없어서 무작정 그냥 펼친 곳이 성경책의 가장 가운데 부분인 시편 119편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시편 119편은 매우 긴 장이다. 부엌을 왔다갔다 하면서 3번을 읽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는 것이 네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을 의지할 수 있었기에 나 스스로 성경을 읽는 기쁨을 잘 알지 못했다.
성경에 어떤 말씀이 있는 지를 알고 싶을 때마다 남편에게 부탁하면 바로바로 찾아주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나는 신앙적으로도 독립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게 되었고 더욱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깨닫는 과정에서 나는 '욥'에 대해 새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하나님과 사탄의 욥에 대한 논쟁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도발하고 실제로 모든 것을 욥에게서 다 빼앗아가지만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그리고, 온 몸에 종기가 난 후 아내의 저주의 도발에 대해 욥의 답은 이러했다.
(욥 2:9~10)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나는 욥의 이야기를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때 당시 욥의 종기는 나병과 같았기에 그는 사회 공동체에서 쫓겨나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은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따.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상황에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다.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바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는 예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왜 이 상황을 허락하신 것일까?
첫째 이유는 욥이 절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굳이 고난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이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우리는 '왜(why)'를 묻기 보다는 '무엇을 위해서(for what)'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고난의 이유보다는 주님의 목적(purpose)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내 경우도 그 목적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았다. 그저 끔찍할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면서 주님께 끊임없이 '무엇을 위해서'를 묻는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 일과 내 상황을 볼 수 있고 깨닫게 되었다.
퍼즐 맞추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수 천 피스짜리를 맞춤에 있어서의 한 조각이 바로 내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어느 조각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전체 그림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내 삶에서도 이러한 퍼즐들이 조금씩 맞춰져 가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터키의 기독교인들이 복음 전파의 열정을 더욱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퍼즐 조각 중의 하나는 특별히 언론과의 관계였다. 어느날 생방송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편집이 안되는 것이었기에 승낙했다. 5분간의 생방송 인터뷰였다.
마침내 '어떻게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복음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고심 끝에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 전체를 엄청 빠르게 한 문장으로 이야기 했는데,
진행자가 내게 다시 제대로 얘기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또 다시 추가 10분 동안 복음의 메시지를 상세히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문제의 원인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문제'에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문제의 이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이것이 일어났는지를 물어야 한다.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용서의 또다른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용서를 하게 되면 우리 마음 속에 미움이나 증오가 들어올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서를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우리의 약함 가운데 주님의 능력은 온전해진다. 우리 스스로 강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약해도 그 분이 우리의 강함이 되신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셨기에, 우리는 그 아름다운 도시 말라티아에서 계속 머물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터키, 말라티아에 기독교인으로 머무르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래도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자면... 남편이 소천한 그 해에 버스에서 내려 집을 가는 길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두려워하면 더 이상 터키에 머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약 그 두려움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두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고 바로 그 순간 두려움이 싹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터키와 그 국민을 사랑한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에 나는 터키를 사랑하며 터키에 머물 수 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기쁨의 삶을 살아가자 어느 날 우리 딸이 '왜 이렇게 엄마는 행복해 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기 때문이라고 답해줬더니 딸이 다시 와서 얘기하기를 '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까요? 나도 사람들의 그 기도가 느껴져요....'라고 했다.
우리는 성도들의 그 기도에 정말 깊이 감사한다.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서 독립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 모두 터키에 남아 있고 터기에 기여하고 싶어하고 있다.
(행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우리는 터키에서 그리스도를 이미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공고해지도록 돕고 싶다. 또 새롭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예수 안에서 자라가도록 돕고 싶다.
무척 큰 나라인 터키의 동부에는 선교사의 거주가 허락되지 않는 지역들도 많다. 이 곳에 거주하는 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침 우리 큰 딸과 아들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musician) 앙카라에서 기독교 방송국의 일을 도우며 터키의 여러 도시로 이 방송이 확장되는 것을 지원하고 있다.
이 방송에 대해 앙카라의 6백만명의 청취가능 인구들 중에서는 좋은 피드백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라디오 쉐마...라는 이 방송 뿐만 아니라 인터넷 특히 유튜브 채널을 이용해서 '소망의 성'이라는 터키어 방송도 새롭게 시작했다. 이 방송에서는 터키어 찬송, 질의 문답 등을 통해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씨를 뿌리는 과정이고, 일단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추수하기 위한 별도의 팀을 짜서 응대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터키에 머무르고 싶다. 터키의 구석진 곳에 있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기도 인도]
오늘 선교사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째는 용서의 메시지다. 남편과 남편의 동료들을 무참히 찔러 고문하고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수산나 선교사는 실제로 용서를 하셨다.
이 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힘을 주셨다. 우리도 하나님이 도움시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다.
둘째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https://youtu.be/JBQxJMo4j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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