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노진준 목사
순회설교자, PCM (Preaching Coaching Ministry) 공동대표장
전) LA 한길교회 담임목사
「예배 사색, 믿음을 의심하다」 등 저자
학력 : 토슨 대학(Towson University) 수학과를 졸업하고(B.A.),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으로 석사(M.Div.)를 받고, 변증학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성경은 경구가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 문맥 중요
성도의 가정이나 사업장에 성경 구절을 표구해 놓은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 구절은 그냥 선물로 받은 것일 수도 있고, 가훈이나 마음의 소원을 담아 놓은 것도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경구가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문맥에서 떼어 그 구절만 보면 오해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주의가 필요한 대표적 구절 -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기서 8장 7절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이지만, (성경 구절 적용의 다양성을 백번 인정하더라도) 이 구절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고 욥의 친구인 빌닷이 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배경은 인과응보의 '응징 신학'이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일주일간 재를 무릅쓰고 함께 안타까워했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욥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너를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욥이 범죄 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욥기는 인과응보가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주는 콘텍스트이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듯이,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욥처럼) 고난 가운데에서도 항상 감사하라'는 의미로 욥기를 읽으라고 한다면, 욥기서를 2장까지만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3장 이후에는 욥이 절규하기 때문이다. 욥이 자기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내 죄로 인해 나를 치신 것이라면 왜 너희들은 멀쩡하니?' 하는 것이 욥의 논리였다.
욥기서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1)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2) 고난 가운데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고 (하나님 거기 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도 마침내 언제나 함께 하셨음을,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신 점이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빌닷은 기복적이고 응징적인 신학적 입장에서 한 얘기였으나, 교회가 굳이 이 구절이 널리 인용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은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성공 욕망의 합리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른 성경 구절들도 일부만 떼어 경구로 사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는 표구된 성경구절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굳이 표구를 하게 된다면 장소에 따라 다른 말씀들을 가져올 것 같다. (우스개 이야기로 제시하는 것이지, 진지한 것이 아니다.)
침실에도 내 눈에 바로 보이는 벽에는 (시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을 걸어놓을 것이고, 아내가 바라보는 벽에는 (잠 24:33~34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를 걸어 놓을 것이다. (나는 더 자고, 아내는 빨리 일어나서 일하라는 유모어)
식탁 앞에도 내 눈에 바로 보이는 벽에는 (딤전 4:3~4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를 걸어 놓고 아내 눈에 보이는 벽에는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를 걸어 놓을 것이다. (나는 마음껏 먹고, 아내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는 유모어)
자녀들 방에는 (잠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를 걸고, 화장실에는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를 걸 것이다.
이렇게 성경 구절을 경구처럼 사용하는 것은 자기 입맛대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좋은 것 - 거룩 vs. 세속
순회 설교자로서 여러 교회를 다니는데, 각 교회의 주방에 갈 때마다 가장 많이 본 성경 구절은,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인 것 같다. 그 구절이 주방에 자주 걸리는 이유는 교회에서 대개 주방 봉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장려하기 위한 목적 같다.
그런데, 주방 봉사는 작은 일일까?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크고 중요한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여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설교나 예배는 중요한 일이고 주차관리나 주방 봉사는 작은 일일까? 그런 생각에 큰 영향을 준 결정적인 성경의 사건이 바로 오늘의 본문인 것 같다. 예수님 일행을 섬기는 여러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책망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한 마리아는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좋은 것'은 무엇일까? 목회와 그 이외의 일로 구분하는 것을 예수님이 권장하시는 것일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 종교인이 지나친 이유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다. 두 얘기가 서로 관계없을 수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잘 조화가 되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오늘 말씀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예수님께 율법학자가 질문을 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의를 보이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방법'이라고 답한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맞으니, 가서 행하라'라고 하신다. 그러자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하고, 이웃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하신 것이다.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성경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블로거 생각에는, 강도 만난 사람은 발가벗겨졌기에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익명의 출신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웃이 아니라고 쉽게 치부해 버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이웃인 것이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25km는 무척 험해서 강도 출몰이 잦고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던 길이었다. 그 길에서 제사장, 레위인이 지나갔다고 하신 것은 종교인을 특정하신 것이다. 그들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으나, 아마도 종교적 이유로 지나친 것 같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내려가는 길이었기에, 이웃사랑은 소홀했던 것 같다. 이 비유에 비추어 볼 때, 말씀이나 종교적 활동은 소중하고 주방에서 봉사하는 것은 소중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중요하다.
마르다가 놓친 것 - 주님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베다니 마을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예수님은 명절마다 지나가시는 길에 이 마을에 자주 들리셨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너무 기뻤다. 둘은 성심껏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많은 음식을 준비했고 예수님이 마침내 오셨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12명의 남자들, 동네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매우 큰 잔치가 되었을 것이다.
음식을 준비해야 하던 마르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마리아를 찾았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어서 나와서 함께 일을 하자는 마르다의 신호를 마리아는 외면한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에게도 섭섭해서 예수님께 일러바친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라면 마리아를 나무라셨을 것 같다. 그러나 언니를 돕도록 하는 것이 좋은 일이었을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나무라신다. 마르다에게는 여러 가지 하지 말고 한 가지면 된다라고 나무라시며,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르다에게 하신 그 말씀이 음식 가짓수에 대한 것이었을까?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위해 베다니에 다시 들리셨을 때,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거하셨는데, 그때 마리아가 찾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을 풀어 발을 닦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예비하고 장사하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대개 마르다가 활동적이고 마리아가 조신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그 반대다. 마리아야말로 혁명가였다. 남자들 사이에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옥합을 깨뜨리고 머리를 푸는 것은 웬만해선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후에 마르다는 섭섭함을 거두고,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한 것 같다. 이제 마르다는 마리아가 무엇을 하든지 괘념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자기가 할 일을 한다. 마르다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것은 '여전히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었고, 마르다는 분주함 때문에 '주님을 놓쳤고' 그로 인해 마리아에 대한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마르다가 놓친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는 것'이었다. 주님 대신 마리아를 본 것이 마르다의 문제였다.
목회가 거룩하냐 주차관리나 봉사가 더 거룩하냐를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설교도 나 자신을 위해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거룩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서, 성도들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아니라, 자기가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면 그 일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세속이다. '그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그것이 거룩이다. 직장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면 거룩한 일이고, 그냥 밥벌이가 되면 세속이다.
목회 기간 중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26년간 미국에서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한 후 60세가 되었을 때인 5년 전에 목회 사역을 은퇴하고 다른 사역들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목회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나는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웃었고 인정받지 못할 때 울었다. 내가 하는 일이 진척되고 열매가 있을 때 좋아했고, 열매가 없으면 섭섭해했다. 목회 중에 성공과 부흥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했다.
내 교만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내가 성실하고 순수한 열정의 목회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장애가 있지만 누구보다 더 성실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 화가 나고 섭섭했다. 내 눈에는 모두 마르다처럼 보였다. 내 시선이 그리스도께 고정되지 않고, 내 성공과 인정에 목말라했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목회의 시작 - 헌신, 나의 강함이 되신 주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고2 때 목사가 되기로 헌신했다. 고1에 교회에 처음 나간 후 고2 때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아서 목사가 되기를 기도했다. 목회가 되는 열망은 있었으나, 나는 태어난 후 8개월 만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사실 나는 장애로 인해 오히려 더욱 열심히 살았었다. 운동도 많이 했고 더 밝게 살려했다. 내 약함을 들키기 싫었다. 20분 정도의 통학거리를 큰길로 간 적이 없고 뒷길로 갔는데, 친구를 만나면 가방을 들어다 준다고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목회에 대한 열망은 강했지만, 잘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4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기도했다. "다리 좀 고쳐 주세요." 나를 강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훌륭한 종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채 대학 2학년이 되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수학을 전공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신유 집회 간판을 보고 30여 명의 노인들이 주로 참석한 작은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다른 신유집회처럼 소란하지 않아서 좋았는데 특히 미국인 목사님 다섯 분이 강단에서 성도들을 한 명 한 명 올라오게 해서 안수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내 순서도 되어서 3~5분 정도 안수하고 나를 위해 진심으로 해주신 그 순수하고 뜨거운 기도에 너무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설교에서 그 감동이 뒤집어졌다. 섭섭하고 속상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라는 설교 내용 때문이었다. 그 설교대로 하면 내가 드린 4년 동안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것은 내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너무 속상했다.
설교하신 목사님을 찾아가서 따졌다. '정말 기도하면 무슨 병이든 다 낫습니까?' 내게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나뿐만 아니라 바울이라는 성경의 반증이 있었기 때문에 따질 수 있었다. 바울은 39가지 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한 가장 힘든 병을 낫게 해 주시기를 바울이 세 번 기도했으나 낫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바울은 나았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네가 교만하지 않도록 가시를 두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 약함으로 내 강함을 드러낼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이후 바울은 다시 그 병 낫기를 기도하지 않았으니, 그 병은 나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그날 내 병이 나았다. 그날 나는 마침내 '내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를 멈추었다. 나를 강하게 해 달라는 기도에, '하나님이 나의 강함이 되어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요약 참고: 저는 태어나서 8개월 되었을 때,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산 셈입니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제 마음속에는 항상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장애로 인한 불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나가게 되고 2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작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좋은 목사 되겠습니다." 정말 제가 주를 위해서 살 텐데, 이 장애를 가지고는 온전히 섬기기가 어려우니까 하나님 제 장애를 고쳐주십시오. 이건 정욕으로 구한 것도 아니었고 좋은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4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고, 우연히 참석한 신유 집회에서,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설교 말씀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기도했는데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내 다리를 고쳐주지 않은 것이 결국은, 내 믿음이 부족해서라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대체 뭘까.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그게 너무 힘들어서 따로 찾아간 목사님은 바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가 있었는데,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병이 안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 몸에 육체의 가시를 둔 것을 그가 깨달았다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질병으로 여기며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병은 나은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에게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제 병이 나았습니다. 소아마비는 저에게만큼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 제약은 있으나 인생의 장애는 되지 못합니다. 이미 지금도 저를 통해서 사람들을 세우시는 일을 해 나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리 다 보지 못하는 긴 시간 속에서 제 인생을 시작했고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신뢰합니다. 결국은, 믿음으로 구한다고 말할 때 내가 원하고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셔서 응답될 것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의심했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이 안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의심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일까?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 도대체 이 고난의 이유가 뭘까?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어야지, 그냥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정신만 통일하면 모든 기도가 다 응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목사가 되었으나 내가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니, 주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는 강하지 못하지만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 주겠다. 너를 떠나지 않고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것이 내 목회의 시작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이니까 주님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가 크게 보이면서 주님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장 못했던 것은 '주님만 보는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마르다의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르다에게 잘못은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 섬김이 부담이 되고,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이 섭섭해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교인들의 모습이 '지쳐있음'으로 대표된다. '이제는 봉사하지 않고 교회만 다닐 거예요'...라고 한다. 사람에게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시작한 일이 자기 의가 되고 성취가 되어서 주님을 놓쳤다. 목회도 마리아가 될 수 있고, 고난도 마리아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뛰어넘어, 마리아를 넘어, 주를 바라보고 싶다.
믿음은 있는 그대로, 제자리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제자리에 놓고 보는 것이다.
단지 손가락 2개로 세상을 가릴 수도 있다. 두 손가락을 붙여서 자기 눈을 가리면 된다. 마찬가지로, 사역을 하다 보면 힘든 일은 pop-up이 되어 눈에 다가와서 그것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게 된다. 기도하면 pop-up들을 눈에서 끌어내려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때 주님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지금 당신의 장애물 때문에, 주님을 못 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문제가 크고 중요하지만, 그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봐야 한다.
주님과 시선을 마주쳐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나를 자주 바라보았다는 측면에서, 나는 목회에 실패했다. 그런데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주님이 한 번도 나를 놓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언제나 나를 보셨다. 이제 주님의 시선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마주 보고 싶다.
한국교회도 힘들다. 옛날의 부흥을 위해 노력해도 쉽지 않다. 점점 더 시들해지고 낙심하게 된다. 그럴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놓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한눈을 팔아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신다. 주 예수님만 영광 받으소서
기도
나를 놓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것들이 보여서 실망하고 원망할 때도 주님은 한결같은 눈길을 주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주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김은호 목사님 정리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약함이 강함 될 수 있고, 우리가 받는 고난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신앙생활은 시선이 중요하다. 주님만 바라봐야 하는데, 사탄은 인생의 풍랑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지금 나는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주님만 바라보도록 기도하자.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도하자.
내가 추가로 정리한 포인트
거룩과 세속으로 나누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종교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방치하고 지나친 것은 본인들이 가장 중요한 '거룩한 일'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일'인 이웃 사랑은 소홀히 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요?
주의 일과 세상 일로 나누어서 교회 일은 거룩한 일이고 가정이나 직장의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구분도 너무 단순한 나눔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등의 말씀은 의식주는 세속적이고 사소한 일이어서 후순위로 미루고 종교적인 일에 치중하면 세상 일은 저절로 될 것이라는 생각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이상학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아픔에 대해서도 우리와 같이 체휼 하신 예수님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거룩/세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삶을 사느냐입니다. 거룩과 세속의 대립으로 여러 일들을 바라보면 '종교적'이 되어 원론적이거나 편협되거나 정죄하게 될 위험이 큽니다.
정체성의 변화: 장애인 vs. 목사 - 중요한 것은 주님이 드러나는 것
노 목사님이 강하게 보이고 싶었던 장애인 부분과 발을 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한 것을 상당 부분 말씀하신 것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또 수십 년간 목회를 하시면서 스스로와 투쟁하신 부분과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강하게 해 주세요, 온전하게 해 주세요가 육체적인 '강함'의 부분이었다면, 성공과 부흥의 목회자가 되게 해 주세요,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목회자... 등등도 여전히 '강함'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것보다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강함이 되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라는 질문에서 '나는 너와 함께 있었다'가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한 시절도 있었으나, 그 말씀의 의미도 깨닫게 됩니다. 목사로서의 성공도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것이 목회의 성공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믿음, 죄, 낙심하지 않는 기도 등에 대한 제 설익은 이해들도 목사님의 여러 책들을 통해서 다시 진단되고 깊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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