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 선하신 유일신 하나님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록 막연하게나마 어떤 신적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인류의 대다수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을 믿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신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를 신으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이 선악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신은 선한 존재라고도, 악한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하다', '악하다'라는 판단은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적인 구분일 뿐이라는 것이죠. 신은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판단, 인간적인 구분을 초월한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범신론적 신관이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신과 이 세상을 거의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표현이자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신관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신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범신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종교적인 신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관과 대조되는 신관이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신은 선악을 초월한 신비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입장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시죠. 이러한 신을 믿는 것은 때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신비롭기만 한 존재라면,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 신이라면 믿기가 편하고 좋겠지만, 기독교의 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악이 있잖아요. 성경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둠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전투적인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선악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여기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범신론에서의 신은 마치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선과 악이 모두 용해되어 사라지는, 그런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신, 하나님은 그런 바다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불칼 같은 존재입니다. 불처럼 선을 사랑하시고, 칼처럼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우리 인간 안에 숨겨진 모든 악을 반드시 도려내고야 말겠다는 작정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칼은 사실 사랑의 칼입니다. 의사의 칼과도 같습니다. 정말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라면 그 환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하고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암을 도려내기 위해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그래야 환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죠. 기독교의 하나님은 만사 오케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명령하시고, 너희는 이 세상에서 악의 편이 아니라 선의 편에 서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선과 악 - 이원론
"선한 신이 만든 세상이 왜 이렇게 나빠졌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전통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루이스는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루이스는 이런 예를 듭니다. 물고기는 축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요? 모르겠죠. 물고기는 원래 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축축하다는 개념이 없을 겁니다. 물 바깥에 사는 생명체들이라야 축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 바깥의 세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만약 이 세상이 원래부터 악하기만 한 곳이었다면, 인간은 악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해 '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라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은 악의 바깥 세계를 알고 있는 존재이고, 사실은 원래 그 바깥 세계에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을 자기 자신에게 느낀다는 것, 심지어 이 세상에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까 말했던 범신론에서는 이러한 질문, 즉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지, 신의 관점에서는 진짜 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런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범신론은 선악의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간단한 대답을 제기하는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신이 있고, 그와 대등한 악한 신이 있어서 이 세상은 이러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영원한 전쟁터라는 종교 사상, 철학 사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나쁜 것들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은 원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선한 신, 즉 하나님과 대등한 악한 신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했는데, 그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해서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신학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인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거기에 대한 답이 요청되는 것이죠.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아까 얘기했던 이원론은 따지고 보면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한 신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악한 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 두 신 위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 신의 절대적인 표준을 상정해서 그 표준에 비추어 어떤 신을 선한 신이라 하고, 또 다른 신을 악한 신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선과 악은 깊이 생각해보면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악은 선에 기생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에서는 선악을 이야기할 때, 악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있지만, 그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고, 선이 결여된 상태를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악은 있지만 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악은 궁극적으로 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원론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이 싸우는 영원한 전쟁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이 세상에 합법적인 왕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일부 지역에서 말하자면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반드시 언젠가 진압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온 우주의 왕이 이 세상에 반란 지역으로 변장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침투해서 지금 이 세상에서 거대한 반란 진압작전, 수복작전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 거대한 수복 작전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좋았던 세상이 지금은 비록 나빠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소망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 인간의 자유의지 -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
그렇다면 다시 중심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걸까요? 기독교의 대표적인 답변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나빠졌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이지만, 사랑이나 기쁨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을 위해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컴퓨터가 있다면, 그 컴퓨터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왜 감격스럽고 기쁜 일일까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랑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기로 선택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지만, 오직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이러한 인격적인 사랑과, 인격적인 사랑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행복은 사랑과 기쁨의 철저한 자유와 자발적인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이웃과의 연합에서 생겨나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평온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러한 모험을 하신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고, 또한 우리가 이후에 보겠지만, 이 모험에 따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죄를 지었을까?
또 다른 질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금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라고 묻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탁월한 존재일수록, 타락하지 않으면 더 찬란한 존재가 되지만, 타락하면 더 끔찍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 존재니까요. 하지만 천사가 타락하면 마귀가 됩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 우리는 천사의 타락이 먼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루이스는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여 우리가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아까 얘기했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거죠. 내가 중심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 모든 너, 모든 상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으로 여기고 취급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내가 중심이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악마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죠.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마라."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중심, 진정한 주인,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시도를 "가망 없는 시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인간의 역사, 즉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가 가망 없고 부질없는 시도인 것은,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듭니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마침내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세상과 인생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엇을 하실까?
하지만 이런 세상,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바로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다시 부르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루이스는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양심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양심이 더 예리해집니다. 불칼 같은 하나님의 영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의 소리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인간들이 있었고, 그러나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100% 순종했던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꿈 - 신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인데,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잘 들어보지 못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좋은 꿈"이라고 부릅니다. 세계 여러 민족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신화가 있습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 신적인 존재가 어떤 죽음과 부활을 겪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민족이나 나라, 부족에 하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에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 도처에,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예수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더 이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일종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꿈,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 바로 신화입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신화는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닮은 그러한 신화들은 바로 그런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유대인들에게는 먼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가리켜 주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신화를 보내주셔서, 특히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셔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는 손가락 역할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실제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 암시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말하자면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듯이, 신화가 사실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다시 말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꿈같은 것들이 참말로 현실이 되었다." 인류가 꿈꾸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들의 홍수 신화 등을 이야기하며, 성서의 내용들도 그냥 여러 신화들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서의 내용과 유사성을 보이는 신화의 내용들이 성서의 내용을 미리 '꿈'꾸게 한 것이었기에 유사함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이 점이 재미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 참된 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 번째로 하신 일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진정한 신, 참된 신이 무엇인지를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 대다수는 어떤 신을 믿기는 했지만, 그 신은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의로우신 분이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셨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들은 단지 성전에서 인간들이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만족하는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신은 이 땅에서 사회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혹독한 심판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신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육신
네 번째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루이스가 살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유럽의 지성인들, 혹은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면서, 예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만 여기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말씀 중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루이스는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령 제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는데, 어떤 제3자가 저에게 와서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서로에게 짓는 모든 죄는 동시에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위인이나 훌륭한 교사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논리를 들이대며 그들을 코너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셨다. 이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다. 만약 거짓이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했거나, 아니면 자신을 잘못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예수님은 최고의 사기꾼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선택지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뿐이다." 당신이 보기엔 예수님이 사기꾼 같습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나요?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남아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좋은 점도 있고 훌륭한 말씀도 하셨지만, 그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단지 훌륭한 사람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요? 없죠? 그렇죠? 그러니 루이스는 당대의 유럽 지성인들에게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는 어정쩡한 태도는 역사적 기독교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논리가 어떻습니까? 루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논리를 우악스럽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논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분명한 것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예언자 이상의 분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 이상의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자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류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지 좋은 어드바이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굿 뉴스, 복음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복음 - Good News
그럼 굿 뉴스란 무엇일까요? 가령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은 좋은 어드바이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좋은 말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인류는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있고, 그로 인해 구덩이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말을 전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영어로 굿 뉴스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뉴스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이 땅에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니, 믿기 어렵죠?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한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어야만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으며,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기독교의 핵심을 믿지만, 더 나아가 이것을 한번 이해해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걸까? 그 사실을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죠. 여러 가지 설명과 이론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 대한 벌로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설명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루이스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논리를 소개합니다. 교회에서 잘 듣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왜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가?"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이론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이론이나 설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밥을 먹으면 힘이 납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그 이론들은 계속 업데이트되며, 완벽한 이론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이론은 있을 수 없으며,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이 세상 바깥에서 이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천지창조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 이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론은 부차적이라고 이야기한 다음, 자신이 선호하는 다른 이론을 소개합니다.
구원 = 하나님께로 돌아감 = 회개 = 항복
그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인간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구원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지 그런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돌아간다는 말처럼 모순된 표현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개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회개의 본질이 사실 항복이라는 것입니다. 항복.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개선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여기까지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며 중심이신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며, 내가 왕이며,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깨달을 때, 인간은 내 안에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질 때 진정한 기독교적 인간관과 죄에 대한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회개는 반역자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내 몸과 영혼 안에 깊이 새겨진 고집과 자만과 죄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죽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뜻을 꺾고 내가 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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