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못할 가해자로부터 입은 상처로 고통받는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이중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들로부터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데다가, 더욱이 자신을 책망하실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또다시 피해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용서가 안 돼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돼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은 미워해도 죄는 미워하지 말라고하니까 그게 너무 어려운 거죠. 그래서 이 성경 말씀에 부담이 돼서, 입으로는 친구에게 용서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마음은 전혀 풀리지 않았어요. 그 친구는 내 말에 이제 자유로워졌는데, 저는 왜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일까요?"
너무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이제 두 가지 관점으로 답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왜 주님은 용서하라고 명령조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두 번째는 "우리가 만약에 용서를 못 한다면, 용서를 안 한다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일까?"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용서에 대한 명령의 말씀을 하셨다고 우리는 대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도합 490번 정도 용서하라는 의미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용서의 과정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아주 어려운 지난한 일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용서의 여정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과정 4단계
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용서는 선택이다"입니다. 이 책에서 라이트는 기독교인이나 종교인들이 용서를 마치 의무나 도덕적 명령처럼 여기는 것과는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용서를 우리가 분노를 스스로 해석하고, 심리적인 건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라이트는 용서를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판단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피해자가 이러한 감정과 판단을 가질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정의합니다. 오히려 그는 상대방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비롭고, 연민으로, 심지어는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여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라이트는 인간의 선택으로서 용서의 과정을 네 단계로 소개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 안의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에 대면하는 과정입니다. 이 첫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네 단계 중 첫 단추이기 때문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이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1단계가 가장 중요한 단계일 수 있으며, 따라서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용서를 절대적인 명령이나 의무로 여긴다면, 1단계부터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1단계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조차 가지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프리 머피라는 철학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에게 원한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원한의 정당성을 언급하며, 오히려 가해자에게 원한을 가지는 것이 그 사람을 도덕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라고 설명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가 말하는 요지는, 피해를 입힌 가해자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는 원한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만약 우리가 길을 가다가 유기견에 물리거나, 숲 속에서 짐승에게 물린다면, 그 동물에게 복수를 하려고 원한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개나 늑대가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상담 현장에서, 정말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할 수 없어 힘들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용서의 첫 번째 단계는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품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인지적 결단의 단계입니다. 상담에서는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그 감정에 대해 상담사가 충분히 공감해 주는 과정이 중요한데, 이 1단계가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 다음 2단계로서, 상처 입은 피해자는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이 옵니다. 과거를 떠나기 위해 복수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결정이 필요합니다. 이 선택은 복수할 수 없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 현재를 위해, 희망찬 내일을 위해 스스로 그 권리를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제 임상 경험에 따르면, 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면 내담자들은 갑자기 달라집니다. 과거의 자신이 아닌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생기고, 얼굴 표정부터 변화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 단계는 가해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려는 시도로, 더 전문적인 작업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때로는 가해자가 가족 구성원이나 중요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가해자의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가해자와 자신의 관계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가족 구성원인 경우에 어느 순간 이런 시점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그 아버지가 엄청난 폭군인 줄 알았는데, 직장이나 사회에서 참 지독한 거절감을 경험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강한 척 감춰왔던, 지극히 작은 자였구나."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부정적인 상처 경험을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내담자는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니며, 피해자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용기와 해방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상담사가 아닌 내담자 스스로가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과거에 부정적인 상처 경험을 제가 했어요. 그래서 이제 그거는 내가 아픈 상처야, 아픈 과거... 이렇게 치부하고 살았는데,
"아, 이런 의미가 있었어!"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것은 상담사가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해방입니다.
라이트가 소개한 용서의 4단계는 매뉴얼처럼 순서대로 진행되는 상담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현재와 미래로 성장시키기 위한 여정입니다. 상담사는 이 여정에서 동반자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용서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상담사는 용서를 단순히 의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삼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용서를 무조건 빨리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여정은 한두 번의 선포나 선언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긴 과정임을 강조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해자를 무조건 빨리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용서의 과정은 미움과 분노의 시간을 포함하는 긴 여정이어서 한두 번의 선포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척 긴 과정임을 강조하신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이 됩니다.기독교인 형제와 이웃에게 성급한 용서를 은근히 권했던 일들을 반성하고 사과합니다.
영화 밀양 - 기독교인들의 용서에 대한 오해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가장 큰 용서에 대한 오해는, 용서가 단순히 죄를 지은 사람(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서 입으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고백하는 행위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잘 드러난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년 개봉)입니다. 이 영화는 용서를 하늘의 신적인 명령으로 여기고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한 성급한 용서가 얼마나 더 큰 아픔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신애(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나이인 33세, 믿음/소망/사랑의 信愛)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합니다. 하지만 부유하게 보였는지 아들이 유괴되고 돈을 요구받다 살해되는 비극을 겪고, 신애는 교회에서 하는 치유 집회에 참석했다가 통성 기도 자리에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꺼내 놓고 울게 된 후,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신애는 자신의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과 마주하는 1단계를 충분히 겪지 못하고, 성급하게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아무와도 자신의 아픔을 나누는 장면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인이 된 다음에 구역 모임에 참여해 신앙 간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노방 전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용서의 1단계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즉 자신의 분노와 원한을 충분히 표현하고 충분히 공감받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신애는 이런 모든 과정을 다 무시하고 바로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가해자를 사랑하겠다고 결단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아들을 죽인 유괴범 가해자를 직접 찾아가 용서를 선포하겠다는 행동은 오히려 신애에게 더 큰 상처를 남깁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용서의 완성을 상대방에게 찾아가서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라고 선포하는 행위라고 여긴다면, 그 잘못된 환상을 이 영화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서가 참으로 길고 긴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신애의 교회 자매였다면, 오히려 형무소로 찾아가겠다고 하는 신애를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며 극구 말렸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애통해하고, 더 많이 원한을 품어도 괜찮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교인들도 처음에는 말리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완성을 가해자를 직접 찾아가서 ‘나는 너를 용서한다’고 고백하는 행위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초신자인 신애의 결정이 무척 대단하게 보였는지, 결국은 교도소로 같이 찾아 갑니다.
신애 아들의 살인범은 뻔뻔하게도 피해자인 그 신애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사과도 없이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난 이미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화해해서 용서를 다 받았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아마 신애 입장에서 그랬을 거예요. ‘나만 빼놓고, 당사자 자신은 쏙 빼놓고, 하나님과 가해자만 서로 짝짜꿍 했다고.’ 아마 절망감과 버려짐 경험을 했을 것 같습니다.
용서의 과정은 정말 긴 애도(grieving) 작업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의 긴 여정에서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과정이 어렵지만, 내면의 치유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귀중한 경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 짧은 33년의 인생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중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으셨지만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버려지셨습니다. 심지어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과 유기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지독히 어려운 과정임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정이 어렵지만, 내면의 치유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임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서 신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지요.
Forgiving as Forgrieving
플러 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셨던 옥스버거 교수는 ‘용서는 길고 긴 애도 과정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신조어를 하나 만드셨는데, ‘Forgiving as Forgrieving(용서하는 과정은 애도하는 과정이다)’이라는 말이다. 일부러 ‘Forgivenness’라는 완결된 단어를 쓰지 않고 'Forgiving' 즉 ‘용서하는 과정은 애도하는 과정이다’라고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Forgrieving’를 얘기할 때 일부러 'Forgivenness' 라는 말을 안 쓴 이유도, 용서는 무조건 끝까지 가야 하는 완결된 사항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냥 과정인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누구와 함께하고, 내가 누구와 애통해하고, 누구와 함께 동반자로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용서는 그저 이 고통을 피하는 부인, 부정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빨리 용서해 버리고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는 고통을 직면하고 서서히 회복해 가는 길고 긴 여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화 ‘밀양’에서는 신애가 하나님에게 절망을 합니다. 그 영화를 보면 결국 신애가 하나님을 떠나요. 신앙을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애는 용서의 과정 중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도 용서의 과제는 성급한 용서 행동을 지시하거나 감독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공동체로서의 신앙 공동체는 반드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그의 분노와 내면의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일들이 먼저 선행돼야 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요.
용서하지 못하면 불순종인가?
마지막으로, 용서를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0년 동안 상담을 해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더 큰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용서를 절대적인 의무로 선포하신 이유가 용서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관계에서 소외된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다시 포함시키기 위함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범법자를 위해 오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아주 엄격한 종교법에 의해 '관계'마저 거절당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병이 있는 동안은 반영구적으로 죄인으로 숨어 지내야만 하는 나병 환자들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범주 안에 다시금 모두 품으려고 하는 의도로 ‘나는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서의 말씀이 포함된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기도문은 개인 기도문이 아니라, 공동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주어’가 복수형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마치 어느 공동체에서 함께 손잡고 드리는 기도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용서 안 해 주신다는 조건부 용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피해자 편에서 함께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공동 기도문도 탄생한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늘 사회적으로, 때로는 종교적으로 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주기도문을 외웠던 사람들은 늘 그들로부터 갑질을 당하던 을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겪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내가 좀 더 가까워지려고 몸부림쳤던 구성원들의 공동 기도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주기도문은 그런 피해자들의 끈질긴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는 기도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용서는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고 긴 여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정신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원망과 분노, 두려움을 먼저 드러내고 먼저 돌봐야 합니다. 용서는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긴 여정을 함께 가는 겁니다. 이때 눈물과 피를 쏟아내며 절망하고 두려워했던 겟세마네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경험을 돕는 일이 저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만, 용서를 목표로 2단계, 3단계, 4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
기독교인들에게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조건 실천해야 될 절대명령이자, 어기면 큰일 나는 조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에 대한 그 말씀도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쁜 소식, 복음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용서하는 인간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용서의 길고 험난한 과정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동반자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용서의 과정은 마치 골고다로 가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울부짖고, 의심과 분노를 쏟아냈던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여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혹시 자신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폭력적인 가해자가 있다면, 그가 도덕적인 주체를 포기한 흉악한 인간이어서 도저히 끝내 내가 용서가 불가능할 것 같더라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떠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 대한 용서는 이제 하나님께 맡기셔도 됩니다. 용서가 끝까지 힘들다면, 그냥 이렇게 고백합시다 ‘아, 주님이시여,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대신 저는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용서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의 여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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