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라는 행위가 한때 한국 기독교계 일부에서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거룩한 땅으로 변하기를 원한다'는 소망에서 시작하였겠으나, 그 열정이 지나쳐 타 종교 부지를 무례하게 침입하거나 학교 내의 단군상을 부수는 바람에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땅밟기'의 성경적 근거를 그들은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지,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특히 그 '장소'를 정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필요나 편의에 의해 정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땅밟기를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미신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보다도 침묵을 먼저 요구하셨습니다. 흥분을 시키거나 행동을 결합시키기 위한 어떤 소란도 없었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돌면서 결코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공격적이지 않았습니다.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차라리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결코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스라엘이 미워하고 진멸해야 할 원수였더라도 그것은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삶 속에서 여리고성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정복해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여리고성을 향해 우리는 미움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 대상이나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 지역의 필요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무찌르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당 앞에 흡연자들이 몰려들어 담배 냄새가 나고 꽁초 쓰레기가 널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비난하며 물리적 힘으로 몰아내기보다는 그곳을 더욱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해야 할 대응 방안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능력 주시기를 구하며 섬기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 과정이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혹시 기쁜 소식을 '기분 나쁘게' 전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과 전도는 항상 사랑과 겸손, 그리고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의미를 가지며,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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