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만찬 내용에 대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세 번째 차이는 요한복음이 성령님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공관복음서는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내용에 대한 증언을 제외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는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 마지막 유훈의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성령님의 은혜를 입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각색 병자를 치유하고 그래서 성령을 마치 마술적인 힘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이지, 그 모든 이적 자체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요한 사도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훈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을 요한복음에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은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성령 충만한 분은 어떤 분입니까? 한국 교회가 생각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초인적인 금식기도, 누구보다 열심인 봉사, 신유의 능력 행사, 이런 분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근데 여러분, 금식기도를 많이 해서 "내가 40일 금식기도를 내 평생에 몇 번 했다고 자랑하시는 분들",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자랑하시는 분들", "내가 기도하면 어떤 환자도 다 낫는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 가운데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이 계십니까? 한국 교회에서 성령 충만하다고 알려져 있는 분들일수록 독선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분이라고 하는 분들은 오히려 교인들이 경원하고 꺼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성령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유훈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일깨워 주신 부분만을 우리가 순서대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아버지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 보내실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한자로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 그러니까 은혜를 주고 지켜주는 스승이다, 이런 말인데, 그렇게 탁월한 번역은 아닙니다. 이 보혜사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 성경에 '파라클레토스'로 번역되어 있는데,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돕는 자,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라는 말입니다.
내가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데 내 힘이 부족해서 내가 넘어질 때, 내 손을 잡고 나를 도와 이끌어 주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세상으로부터 모함을 당하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내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내 속에서부터 나를 위로해서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해서, 내가 망연자실 하늘만 보고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이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이십니다. 그 돕는 자,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 그분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그 보혜사 성령님께서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모든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필요한 지혜를 주님께서 채워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식은 세상의 것입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학위를 딸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하늘의 것입니다. 노력한다고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정말 대단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세상의 높은 지식에 도달한 사람들 가운데에 지혜가 모자라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의 지식은 얻었지만 하늘의 지혜는 못 얻은 겁니다. 그건 우리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하늘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에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말씀하신 가운데에, 마태복음 10장 18절에서 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관리들과 왕들 앞에 끌어다가 증거가 되게 하려니와, 그때 너희가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이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시는 겁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상류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학교 문턱도 넘지 않은 갈릴리 빈민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을 잡아다가 신문하고 문초할 때, 너희들이 행해야 할 지혜의 대답을 성령님께서 너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바울이 날 때부터 일어서지 못하는 선천성 하반신 마비를 일으켜 세우고 난 후, 베드로가 성전에서 그런 일을 행하자, 대제사장들이 그 베드로 일행을 완전히 물리치려고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들 앞에서, 권력을 지닌 대제사장들 무리 앞에서 베드로가 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읽어 보십시오. 무식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 베드로 속에서 성령께서 지혜의 말씀을 채워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52장 13절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내 종이 형통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높이 들어서 아주 귀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형통이라는 단어. 그리스도인들이 형통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근데 그 뜻을 오해합니다. 성경에 있는 형통을 세상의 형통과 똑같은 단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일이 되면 형통하다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안 되면 형통한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보면 "저 사람은 자기가 사업하는 대로 돈을 많이 벌었네, 저 사람은 자기가 계획한 대로 출세하고 높은 직책에 올랐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을 떠받들고 존귀하게 하네." 아닙니다. 그건 세상에서 하는 얘기죠. 그런 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되게 할 리가 없죠.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댁에 가셔서 이사야서 52장 13절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형통하리니' 그 앞에 '지혜롭게 행하리니'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형통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되면 나는 망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들이 마음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은 욕망의 법칙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할지라도 "이건 안 돼."라고 끊어버리는 사람, "내가 지금 울면서 씨를 뿌려야 해도 이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 이게 지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대로 지혜롭게 행하는 자를 사람들이 높이고,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지혜를 누가 주시는가? 성령님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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