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살 소망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이제 모든 인생이 끝장난 것 같은 국면도 당했습니다. 여기에서 또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주시지 마시지 왜 주시는가?
사도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환난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행여라도 내가 나를 의지하고 살까 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건져 올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가 모여서 인생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1초, 1초를 건져 올리지 않으면 이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그 시간만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C.S. 루이스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인생을 매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건져 올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그런 터널을 거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라. 단순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내 의지나 능력으로 환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환난을 극복하는 그런 위대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들이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환난은 이 세상에 국한된 환난입니다. 내게 죽음이라는 환난이 올 때, 누가 나를 건집니까? 어떻게 내가 나를 건집니까? 그러므로 나를 궁극적으로 건져 올리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만 의지했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에서'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 그토록 극심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며, 또 건지실 것입니다. 또 건지실 것이라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이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이 굉장히 어렵죠? 표준 번역이 아주 쉽게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로 협력해 주십시오. 그것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받은 은사의 선물을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로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우리가 이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며, 또 건지시는 그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고, 또 기도한 그분들이 우리가 건짐을 당한 것으로 인해서 마치 자기가 건짐을 당한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건짐을 당한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분들도 그렇게 살게 되겠죠. 사도 바울이 왜 마지막을 이렇게 끝냈을까요? 오늘 1절부터 11절까지 고린도후서 편지의 도입부인데, 그 도입부의 마지막 절이 11절입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썼을까요? 나, 사도 바울도 여러분들의 기도가 필요한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쓰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또 건지시고, 건지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내가 위대한 사도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위대함에 있지 않음을 너희들 잊지 마십시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위로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감격적으로 반복할까요?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와서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자기가 써 보낸 눈물의 편지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믿음을 회복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였던 것입니다. 그 위로가 지금 하나님의 위로가 넘칩니다. 그 위로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거짓 사도들이 들어가서 자기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그 교인들을 회유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할 때, 그때 당한 사도 바울의 영적 아픔과 고난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고린도 교회를 위한 위로와 구원의 통로가 헌신의 통로가 될 때, 결국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 바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략하게 세 가지를 마음속에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당하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으로 인해 내가 그것을 참으면 아름답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로를 쏟아부어 주실 그릇을 지금 만들고 계시는 것이거든요.
두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의 사람,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나 결단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건지시는 이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고, 그 이후에도 계속 건져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위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로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고 쓰여 있는데, 바로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셨잖아요. 그 보혜사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뜻이 위로자라는 뜻이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위로자이신 그 성령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환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의미로든 혹시 여러분들의 삶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그 이후에도 건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내가 의지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다면, 바로 여러분들의 삶 자체가 이 시대를 위한 위로의 메시지, 고린도후서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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