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단어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우리가 오해하듯이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하죠, "아유, 제가 어떻게 합니까? 전 못해요. 상석에 앉으세요. 아니, 저는 저기 말석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고 겸손하다고 합니다. 근데 실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 교만한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지금 바울이 말한 겸손, 타페이노프루네신이라고 하는 말은 위치의 문제입니다. 낮은 마음, 마음을 다른 사람보다 낮은 데 두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하다를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합니다. 내가 그 사람과 똑같이 서 있으면 절대로 이해가 안 돼요. 그 사람 밑에 있어야 "아,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저 사람이 이럴 때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는 겁니다. 헬라어로 인내하다를 휘포메노라고 합니다. 휘포는 '더 밑에'라는 뜻이고 메노는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사람 위에 있거나 대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 사람의 밑에 들어가면 내가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되기 때문이죠.
거꾸로, 교만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내가 하나 하고 열 개 했다고 풀무질하는 겁니다. 10원 밖에 없는데 만 원 있다고 풀무질하는 거, 이게 교만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너무 좋은 표현입니다. 내가 스스로 교만해서 나에게 풀무질을 꽂아놓고 계속 풀무질을 해보세요. 어떻게 돼요? 풍선이 터지듯이 나는 터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가죠.
여러분,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복음의 능력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희한한 능력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병자도 살아나고, 심지어는 바울이 작업할 때 걸치는 앞치마, 혹은 작업할 때 흐르는 땀을 닦는 수건에 손만 대어도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풀무질하기 굉장히 좋은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어, 저 사람 내가 기도해 줘서 나았어. 저 사람에게 축복 기도해 줬더니 저 사람 부자됐어." 얼마든지 풀무질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큰 일들이 많이 일어났거든요.
그런데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자기를 가리켜서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다." 쉽게 말해서 팔삭둥이라는 거죠. 요즘은 인큐베이터가 있기 때문에 만삭 되지 못해서 태어난 사람이 그 자체로 결함이라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조롱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뭐 2천 년 전까지 안 가더라도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모자란 사람을 다 '팔삭둥이'라고 그랬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 큰 능력을 행하면서도 사람들 앞에 "나는 팔삭둥이다."라고 겸손히 말하며 스스로를 풀무질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 사람들 저렇게 나은 것,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팔삭둥이, 주님께서 다 저렇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낮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에베소 사람들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모든 시련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장로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 아래에서 여러분을 이해하고 내가 온갖 환난을 다 겪었지만, 내가 그들 아래에서 거하면서 인내하는 것, 여러분들 다 보고 아시죠? 그렇게 말한 겁니다.
세 번째는 눈물입니다. 믿는 사람의 눈물은 하나님과 자신을 동여매는 동아줄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시련을 감수하는 사람, 그 사람은 사생의 사람이라는 말 아닙니까? 그 사람은 사생결단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시련을 감수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시련이 크고 절망의 폭이 넓고 깊다고 해서 사람을 찾아가서 울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고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생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참된 위로가 오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애통하는 자, 창자가 끊어질 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사람 앞에서 우는 자가 복이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누구를 위로한다고 할 때, 어떤 경우에 위로합니까? 저 사람이 하루 벌어서 하루 자식들과 먹고사는데, 그날 번 것을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와서 "제가 오늘 하루 임금을 사기를 당해서, 제 자식들이 굶게 생겼으니 오늘 제 하루 임금만큼만 좀 빌려주십시오. 제가 열심히 일해서 하루에 조금씩 조금씩 갚겠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하루 임금 분 돈을 빌려줄 돈이 있으면 돈을 빌려주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이 위로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나한테 그 사람에게 빌려줄 돈이 없거나, 돈이 있어도 빌려줄 마음이 없을 때 위로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로는 빈 위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위로했던 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다 텅텅 빈 깡통 위로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3년 동안 그 이방 땅에 가서 그 우상이 창궐하는 그 우상의 도시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온갖 고난과 환난과 시련을 다 당해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빈말의 위로가 아니라, 내 상황은 하나도 변치 않지만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그 상황을 내가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거나, 아니면 그 상황을 내가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여전히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문제가 되었던 상황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시련이 주님의 위로 속에서 더 이상 시련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 앞에서만 울었습니다. 사생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장로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과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얼마나 어려운 일 많이 처했는지 여러분들 아시죠? 그때 내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붙잡고 "의지해 살고 싶다." 하고 눈물 흘리는 거 여러분들 보셨습니까?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울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위로만 붙들고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 다 아시죠?
20절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유익한 것은 누구에게 유익한 거예요? 바울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공중 앞에서나, 공개적으로나, 각 집에서나, 사적으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여러분 다 아시죠? 여러분에게 유익하다면 내가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거리낌 없이 내가 복음을 다 전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는 이 말은 그 유서를 그대로 옮기면, "어떤 불이익도 개의치 않고" 이 말입니다. 여러분, 에베소는 고대 사회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건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어 불가사의하다는 신전이었습니다. 그 신전은 여신을 위한 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사제들이 그 속에서 일을 했고요, 동서남북에서 그 신전을 참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잠을 자는 숙박업을 하는 사람이 있겠죠. 그 사람들한테 밥을 파는 식당업을 하는 사람이 있겠죠. 그 사람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있겠죠. 이탈리아의 프로 축구팀이 굉장히 상업화되어 있는데, 이탈리아 국민의 3분의 1이 직접, 간접적으로 프로 축구팀하고 관련돼서 먹고 산다고 그래요. 아마 예전 에베소 시민도 한 3분의 1 정도는 다 그 에베소 신전 때문에 먹고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보건대, 죽은 돌을 보고 사람들이 경배를 하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바울이 그 아데미 여신을 가리키면서 "에베소 시민들, 그 돌덩어리가 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절대로 신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적으로, 아니 공개적으로 그것 때문에 바울이 욕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불이익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장로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에베소 시민들에게 유익한 것이 있다면, 내가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내가 그들을 위해서 사생결단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거, 여러분들 보고 다 아시죠?
21절입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거 얼른 읽어 보면 뭐 별거 아닌 것 같아요. "아, 바울이 헬라인이고 유대인들에게 전도했고..." 여러분, 이건 엄청난 시련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국사범으로 못 박아 죽인 사람들 아닙니까?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하나님이야. 회개해. 그리고 주 예수를 믿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전 정체성을 바울이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바울이 가는 데마다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이유, 간단합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헬라인에게 회개하라고 그랬습니다. 헬라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은 다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신들은 각각 지역을 쪼개서 통치하는 지역을 가지고 있거나 자기 구역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각각 다른 영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헬라인이라고 하면 여러 신을 믿었습니다. 그 헬라인들에게 "너 틀렸어.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야. 회개해. 돌이켜서 예수를 믿어." 이건 역시 헬라인의 영적 정체성을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둘 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바울은 일평생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상반절입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이게 아닙니다. 이방인들, 그 이방인들은 헬라인을 포함한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죠. 임금들, 지체 높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남녀노소 빈부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 그럼 그게 뭡니까? 세계 만민입니다. 바울은 세계 만민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바울은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부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울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일행 중에 있는 바울을 핀셋으로 뽑아내셨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내가 부정하던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핀셋으로 뽑아 내신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의 생명의 법을 전하게 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래서 누구에게든지 이 말을 하면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겠지만 생명을 걸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쭉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돌을 던질 때, 헬라인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거든요. 왜 헬라인들이 그러겠습니까? 바울이 "네 믿음이 틀렸어. 회개해. 예수 믿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습니까? 돌 던지는 거. 어떻게 바울이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고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생결단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내가 헬라인이라고 몸을 사렸습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던진다고 내가 입을 봉합했습니까? 내가 누구에게든지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걸고 사는 것, 그 사생결단의, 여러분들 다 보고 아시죠? 바울이 지금 이렇게 유언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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