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목숨걸고 티나게 신앙생활을 해야할까?
일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는 순교와 배교 사이의 갈등이 나옵니다.
한국동란 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생사가 오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되었지, 밖으로 뭐라고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그 말 한마디가 목숨과 바꿀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넣겠다는 조서가 발효되었음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창을 열고 (노출한 채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한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도 왜 굳이 드러내 놓고 기도했을까? 예수님도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내게 다가오는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면 까짓것 한 번쯤 배교의 표현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개처럼 살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입술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신앙의 지조나 성실함이 아니라... 누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냐...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진짜 내 마음에서 내 삶의 주인은 누구실까요?, 내 주인은 누구실까요?
기독교를 탄압하는 세력이 내 주인일까요? 기독교인을 죽이려는 공산당이 내 주인일까요? 다리오 왕이 내 주인일까요?
내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유연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막대기 먹고 체한 사람'처럼 원칙을 고수할 때가 온다면, 그것은 내 유연함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리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로 인한 내 고난이 초점이 아니라, 그로 인해 가리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관심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정한 제목의 기도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내가 주인'되거나 '내가 주인 삼은 것들'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더라도 그것은 배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진짜 내가 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느냐... 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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