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때때로 매우 버겁고,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고통과 두려움,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게 된 이유나 배경은 다양합니다. 친구나 가족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분도 있고, 단순히 삶이 심심해서 교회를 찾은 분도 있습니다. 사업 실패나 병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믿음 생활을 시작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생활이 외롭거나 도움이 필요해서 교회를 다니다가 교인이 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셨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말들은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이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와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전제로 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예정'과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예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교회에 나갔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인도하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주어진 환경에서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신 적은 있지만, 그때에도 결정은 저의 결정이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해서 운명적으로 결정된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는 가르침을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던 원인은 질투와 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요셉을 팔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용하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꺾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여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예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야 하고, 죽었던 영혼을 살려주셔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고 살려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가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그 일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 종종 그것을 '공짜 은혜'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핵심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unworthy, undeserved grace'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임한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잘 쉬지도 않고 계속 사역을 하다 보니, 교인 중 한 분이 저에게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조금 쉬엄쉬엄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플로리다의 별장을 사주셨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만약 누가 진짜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그 별장을 혼자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넉넉하게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장을 사주신 분이 저에게 조건을 요구한다면, 저는 그 별장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지, 조건을 달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공짜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단순히 공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서 고난과 혼란,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한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사랑,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증과 인치심이 되셨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을 다니면서 많은 교인들을 만날 때,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지치고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고난의 현실에서 다시 일어섭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 시간에 주의 은혜 가운데 우리 성도들의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고, 상한 심령들을 만져주시며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삶의 어려움과 신앙의 여정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매우 버겁고, 때로는 눈물이 마를 만큼 고통과 두려움, 불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성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의 시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계기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나 가족의 권유로, 어떤 사람은 심심해서, 또 어떤 사람은 사업 실패나 질병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또한, 생활의 외로움이나 도움이 필요해서 교회를 찾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정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몰랐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셔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와 대치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이를 '예정'과 '섭리'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던 사건을 예로 들어보면, 그들은 질투와 미움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로 요셉을 팔았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40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그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꺾거나 무시하지는 않으십니다.
바울의 예정론 강조 이유
바울은 '예정'에 관해 강조합니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지만, 그 자유의지는 능력에 제한을 받습니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하지만 온전히 자유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의지는 능력의 제한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도 저를 구속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늘을 날 수 없다면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은 제 자유의지가 구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게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날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시고, 영혼을 살리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며 쓴 편지의 첫마디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이유는, 비록 성도들이 엄청난 고난을 겪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주관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현재 삶에서 많은 어려움과 큰 고난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했던 말이 예정입니다. 이 예정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을 시작하셨으니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이 예정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우리를 견디게 만드는 힘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바울은 예정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순종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이를 깨닫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이루신 은혜가 바로 속량, 즉 죄사함입니다. 우리는 찬송가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많이 부르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피를 깨끗하게 하거나 정결하게 하는 해독제 같은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강조하며,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견디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의 힘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예정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 중에도 낙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바울의 사역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3년 동안 사역하며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동과 핍박으로 인해 에베소 교회는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도 그들의 상황을 염려하며 편지를 보냅니다. 그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강조하며, 비록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는 사탄에게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황당한 이야기가 믿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공의로 느껴지십니까?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아서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일이 공의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 정도는 언제나 하실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반역하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감사하지도 않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놀랍고 엄청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낙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사랑, 곧 구속과 죄 사함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 종종 그 은혜를 우리 죄인에게 거저 임한 사랑, 즉 'free grace'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free grace'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은혜의 핵심은 단순히 'fre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unworthy, undeserved grace'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한 것입니다.
공짜 커피와 빵?
우리 테너에는 연령에 상관없이 성실하게 살아오며 건강한 삶을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매월 첫 주 찬양이 끝나면 서로 번갈아가며 식사나 빵과 커피를 대접합니다. 한 번 자원하여 대접하면 여러 달 동안 무료로 대접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공짜' 빵과 커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처럼 별것 아닌 사람을 대화에 끼워주고, 힘든 삶을 나눌 때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며, 매주 아침마다 반겨주는 교제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느낍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교회에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 종종 'free grace'로 강조합니다. 틀리지는 않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은혜의 핵심은 단순히 '공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unworthy, undeserved grace'입니다. 그래서 비록 부족한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한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며,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현재 어려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며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의 삶은 버겁고 고난이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했던 메시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고난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사랑에 힘입어 나아갑시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사랑에 힘입어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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