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을 걷다보면 '도를 아십니까?'라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종국에는 제법 큰 돈에 제삿상을 사도록 겁주려는 목적이지만, 솔깃해지는 때도 가끔 있게 되는 질문이다. 그릇된 '도'를 내세우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목적어가 아니라 동사인 '아십니까?'에 촛점을 맞추면 어떻게 될까?
2.
얼마 전에는 교회당 현관에서 안내 봉사를 하다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악수를 하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분을 알아보고 '시장님,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를 했고, 그 분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그 분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우리가 다시 마주치면 그 분은 전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내 고등학교/대학교 동창인 문호상 군은 박시장의 미디어특보였고 지금은 선대위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박시장을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시장도 그를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고...
나와 문호상 군도, 비록 지난 수십년간 별로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서로 최근에 마주친 나와 박시장은 서로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박시장'에 대해' 내가 조금 알고 있을 수 있으나... 따라서 누가 내게 박원순 시장을 아느냐고 물으면 문맥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질 것이지만, 대개는 '모른다'가 맞는 얘기일 것이다.
3.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7장에는 무척 심각한 얘기가 나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하나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너희는 나를 모른다'고 탄식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셨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딱 잘라 말씀 하신다.
사람은 그저 선한 일을 하고 어쩌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들을 알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인지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한 노출이 있어야 한다. 그저 선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분의 뜻을 알며, 그 분과 '야다'의 깊은 수준으로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교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이 나를 확실히 아시도록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
5.
나는 서울시장도 잘 알지 못한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어찌 알까? 내 사람됨과 내 선행과 내 공로를 바라보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예, 나는 하나님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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