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에베소서 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정유나 자매
- 탈북민 방송인
- 짐 로저스 (세계 3대 투자사 회장. 북한 투자에 관심이 높음) 수행비서
- 유튜브 「정유나TV」 운영
Icebreaking - 북한 동포를 품고 기도하세요
북한 동포에 대해 여러분의 심장에 새겨지는 오늘 강연이 되기 원합니다. '심장'은 북한에서는 단순한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진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채널A. 약칭 '이만갑')방송을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코로나 시절에 북한 청년들이 모여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께 소위 '행패질'을 했습니다. 울며 부르짖으며 기도한 것입니다.
남북한은 정치적, 교육적 통일은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북한 사람들은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서 서로 소통과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통합되지 않는 통일은 통일이 아닐 것입니다. 통일은 영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울부짖는 기도 중에 ‘가라, 교회로 가라. 네가 가서 크리스천들을 깨워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50%가 크리스천이 되면 통일이 될 수 있다.”란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북 동포들과 1:1 상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북한에는 김일성 일가의 동상이 4만 개 정도나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도저히 이북 동포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통일이 완전한 통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 이루어질 텐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한 주민들은 우리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로 일하신다고 김은호 목사님도 설교하셨듯이. 우리가 울며 매달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친가족처럼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제 간증 제목은 ‘주님 만이 왕이십니다'인데, 사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의 주민에게 왕과 신은 김일성 부자 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렇게 주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북한에서는 음악부터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것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북한 사회처럼 이념과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오직 ‘신앙'과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만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북한에서는 복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말씀만 접해도 공개총살시켜 버립니다. 공개적으로는 ‘미신을 퍼뜨려서' 총살시킨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여'를 맘껏 외치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요?
북한 오지에서의 어린 시절
여러분이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나도 원한 것도 아닌데 북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요즘 ‘헬조선'이라며 대한민국을 폄훼하는 신인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나라이름도 ‘조선'이지만 그 자체가 ‘헬 hell’입니다. 그곳을 생각해 보면 결코 대한민국을 폄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1988년 북한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히는 자강도 전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스키부대 대대 참모장이었습니다. 스키부대는 특성상 비밀 유출 방지와 특수훈련을 위해 산간오지에 주둔합니다. 그래서 제 어린 시절 추억은 온통 산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군부대 주둔지엔 동갑내기도 없어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과 울창한 산에서 오미자, 다래, 두릅을 따고 계곡과 폭포수에서 수영을 하고 가재를 잡고,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학교에 가던 삶이 일상이었습니다.
어린 제가 꽁지머리를 촐랑이며 걸어가면 군인들이 ‘새끼 참모장’이라고 놀렸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습니다. 공부도 학급에서 제일 잘했고, 노래나 시낭송 대회가 열리면 늘 1등을 독차지했습니다. 담임선생은 늘 “유나는 커서 인민배우가 돼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인민학교에 다니던 때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때였지만, 특수부대에는 공급이 좋았던 터라 저는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체신국의 교환수였습니다. 교환수는 인물 체격과 출신 성분이 모두 좋아야 합니다. 나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대개의 북한 여성들이 매우 헌신적이며 고생을 하듯이 우리 어머니도 아이를 낳고 보름 만에 추운 자강도의 냇물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습니다. “희생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런 어머니의 헌신 속에서 저는 자랐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 장군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원래 강신희였으나 세례를 받으며 개명함)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김일성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났기 때문에 스스로 신이 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부를 잘했던 저는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 자강도 소재지에 있는 수재학교인 강계 1 고등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자강도는 장군님의 제2의 고향’ ‘강계정신’ 등의 빨간 간판이 곳곳에 걸려있는 풍경이 낯설기는 했지만, 도시 생활은 나름 나쁘진 않았습니다.
가볍게 언급된 AK-47소총 이야기가 나옵니다. 냉전 시절 미군에서 사용한 M16에 대응되는 소련제 소총이 AK-47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있진 못했습니다. 1997년 여단 참모장(대좌) 직책으로 백두산에 동계훈련을 나갔던 아버지가 스키에 손가락들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1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대에선 부친에게 여단 고문으로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친은 고향인 함북 회령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1999년 저는 아버지와 함께 회령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회령에서는, 대좌에서 원스타로 승격되신 아버지는 국토관리 조직을 담당하셨기에 뇌물을 엄청나게 받아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국경도시에서 받은 충격
국경도시인 회령은 내가 자란 세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이미 한국 문화를 접하며 동창들은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도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정숙교원대학 교원학부 음악과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은 인민학교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곳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 저는 가야금을 전공하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교 3세이던 그 친구가 남조선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처음 그 친구가 한국드라마를 보자고 했는데 그때 저는 특수부대 참모장 딸로서 자부심이 있었고 충성을 맹세한 집안이었기에 정말 놀랐습니다. 왜냐면 한국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김정은을 어버이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빠보다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을 보며 감사인사를 했어야 했던 저라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드라마를 보게 되면 교화형에서 사형까지 그리고 수용소로 직행이며 3대가 전부 끌려가서 고문과 고된 노동으로 살아서는 나올 수 없고 진급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을 아주 나쁜 곳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저는 그 친구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저에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장군님 타령이냐며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안 보겠다고 했지만 얼마나 재밌길래 죽음을 불사하고 한국드라마를 보자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한국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난생처음 접하는 한국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가 늘 말하던 “벽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을동화’를 시작으로 ‘황태자의 첫사랑’ ‘목욕탕집 남자들’ ‘순풍산부인과’ ‘이브의 모든 것’ 등 숱한 한국 드라마가 회령에서 돌고 있었습니다. ‘이브의 모든 것’도 보았습니다. 드라마는 거짓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회령에는 드라마 외의 영상도 많이 돌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 탈북을 결심하다.
그렇게 제가 북한에서 속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드라마를 접한 뒤 저는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대학에서 배워주는 혁명역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꿈속에서도 원빈이나 송승헌이 나올 때쯤 저는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그때가 2006년 1월이었습니다.
제가 혼자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뼛속까지 당에 충성을 맹세한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탈북을 결심한 걸 알면 저를 죽이거나 아니면 당에 신고하셔서 저를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을 알기에 저는 혼자서 두 달 만에 두만강을 넘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탈북 결심을 한 저는 수소문을 통해 강을 넘겨줄 사람을 찾다가 한 국경경비대 중대장을 소개받았습니다. “얼마 주면 중국에 보내줄 거냐”라고 묻자 중대장은 50달러라고 했습니다. 저는 집에 와서 집 천장에 숨겨둔 아버지의 비자금을 훔쳤습니다. 외화를 돌돌 말아둔 덩어리가 3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꺼냈더니 1200달러였습니다. 그 돈이면 당시 회령에서 집 서너 채를 살 수 있었습니다.
중대장에게 50달러를 주고 두만강을 건너던 그날은 2006년 3월 2일이었습니다. 미신에 따라 ‘삶은 달걀을 깨 먹고' 집을 몰래 나오다가 엄마에게 뒷덜미를 잡혔습니다. 걱정했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엄마가 봐도 북한에는 비전이 없다'라고 하시며, 탈북을 허락하셨습니다. 내게 “너는 참대나무 같은 아이였다.” “모험이 없는 인생의 변화는 없다. 신이 있으면 너를 지켜주시겠지...”라고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개찰구 옆에 숨어서 통곡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회령을 떠나왔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요게벳이 떠오릅니다.
https://youtu.be/cAmq9LH46Xg?si=axZ7WBxCh9cutskr
중국을 관통하여 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는 일행을 이끌고 한국 식당으로 찾아갔고, 그 식당 주인 내외의 도움으로 일행은 방콕으로 와 한인교회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교회를 아주 나쁜 곳으로 가르칩니다. 피를 뽑거나 장기를 파는 그런 곳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조금은 두려웠습니다. 다행히 제가 경험한 선교사님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시고 너무 잘해주시고 좋으신 분들이었습니다. 많은 도움도 주시고 성경공부도 가르쳐주시고 찬송가도 같이 배우며 불렀습니다.
어느 날은 안수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영적체험이었던 거죠. 환한 빛이 보이고 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제게 왜 믿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영적체험을 하면서 주를 영접하는 영접기도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난민수용소가 아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요새에서 행복하고 안전한 보호를 받다가 3개월 만에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으로 무사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탈북과 복음화 과정
아버지는 탈북한 딸 때문에 북한에서 6개월을 고문당하시고 어머니는 노동단련대에서 고된 노동과 고문을 당하시고 오빠는 군인이셨는데 더 이상 군인이 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께서 저를 잡으려고 자기의 신분과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4월 중순 즈음에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으로 들어가셨는데, 저는 이미 태국에 들어가 있던 상황이라 대한민국까지 오셨습니다. 제가 대한민국 입국 후에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있었는데, 4층 창문이 열리더니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여서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저희 아버지가 저를 내려다보시면서 저를 찾고 계셨죠. 저는 그때 아버지 얼굴을 보고 바로 무릎을 꿇었고 살려만 달라고 싹싹 빌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저를 붙잡으러 왔다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거야 하시면서 오히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를 안심시키셨어요.
저는 이렇게 하나원을 거쳐 2006년 11월 사회로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조사 기간이 길었습니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 보니 하나원을 거치지 않고 한미일의 합동 조사만 6개월을 받은 끝에 이듬해 3월 사회로 나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분당에 임대주택을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와 저는 열심히 돈을 모아서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어 있던 어머니를 모셔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공항에서 어머니를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치는데 제 이름을 부르셔서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몸무게가 38kg으로 너무 마르시고 땡볕에서 중노동을 하다 보니 하얗던 어머니 얼굴이 새까맣게 돼버린 모습을 보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오빠는 저와 아버지, 어머니의 탈북으로 인해서 군복무는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처럼 너무 고집을 부려서 한국에서 모은 돈을 보내주면서 한국드라마 한번 보라고 했더니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바로 한국으로 가겠다고 해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직계가족은 다 대한민국에 들어와 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우리 할머니의 기도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 같습니다. 감사한 것은 어머니와 오빠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고 늦게 예수님을 믿게 된 아버지의 믿음이 오히려 어머니를 훈시할 정도가 되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도 갈팡질팡을 오래 했습니다. 제가 방황할 때 저는 병에 걸렸고, 내가 겨우 교회 뒤편에 앉아서 겨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게 ‘유나야 잘 놀았니?’라고 물으시며 방콕에서 보았던 금가루 3명을 상기시키시며 그 세 명이 바로 우리 아버지, 어머니, 오빠였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뉘우치며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당부와 기도
여러분, 북한을 위한 기도에 지치지 마세요. 그 기도 응답이 3만 4천 명의 탈북민들인 것이니까요. 여러분의 기도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야 할 나라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도: 하나님, 제가 북한에 태어나고 어려움을 겪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로 인해 지금 대한민국의 삶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333 기도를 할 때 예레미아 33장 3절 말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를 제일 좋아합니다.
또 에베소서 5장 8절 말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를 정말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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