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의 조건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어떤 조건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아볼까요?
먼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 불안은 인간 뇌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인 파충류의 뇌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인류 진화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강력한 감정입니다.
다음으로 '희소성'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면 다른 사람은 못 갖고, 다른 사람이 가지면 나는 못 갖는 희소성 때문에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울어도, 애써도, 모든 자원을 동원해도 안 되는 일들에서 좌절감이 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고통이 우리를 덮칩니다. 내가 잘못해서 닥친 고통은 감수할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교통사고 같은 어처구니없는 고통은 설명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이겨내면, 그 다음에는 '권태'가 찾아옵니다. 인생이 지루해지는 것이죠.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삶의 조건들, 느닷없이 닥치는 고통, 희소성, 불확실성, 그리고 권태로움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의 의욕과 생명력을 마치 믹서기처럼 모조리 부숴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현대인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인들 역시 삶을 괴롭히는 괴물들과 싸웠습니다.
제가 소개할 고대 신화는 이집트 신화입니다. 신화라고 하면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기 쉽지만, 신화는 상징을 통해 삶의 본질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괴물 '아펩(Apep)'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괴물은 어둠을 상징합니다. 어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 즉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일으키고, 이는 결국 삶을 위협하는 감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혼돈 속에서도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기는 태어나고, 연인들은 웃으며, 맥주를 마시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 모든 것은 태양신 '라(Ra)'의 덕분이라고 여겼습니다. 라는 매일 아침 어둠의 괴물 아펩과 전투를 벌여 빛을 가져옵니다. 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혼돈을 물리치고 삶의 생명력을 회복하며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근대 과학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근대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채택하여 세상을 자연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로만 해석합니다. 이전까지 신화와 종교는 인간 존재와 삶의 목적을 설명하며 의미를 부여했지만, 근대 과학은 이를 부정했습니다. "왜 물은 100도에서 끓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단지 "온도가 100도 이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연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의 세계가 무너진 현대인들은 대개 개인주의적 쾌락주의를 선택합니다. 쾌락주의는 삶의 즐거움을 늘리고 고통은 줄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삶의 무의미와 허무를 극복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SNS를 예로 들면, 행복한 장면을 찍어 올리고 서로 비교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이 누추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쾌락주의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말한 생존의 비결은 단순한 쾌락 추구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의미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힘을 줍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쾌락을 쫓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실현하려 할 때,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삶의 희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희열은 단순히 물질적 만족에서 오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이는 우리 삶에 지속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 신화 속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는가?"이고, 두 번째는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에 목말라 있습니다. 온갖 비교를 멈추고, 자신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의미와 가치를 소박하게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런 소박한 가치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삶의 의미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허무와 우울을 이겨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여정을 통해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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