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재정의하다
사도행전 20장 17절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우리 인생은 ‘삶’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됩니다. 늘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삶이 먼저, 죽음이 그다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순서죠. 삶이 있고, 그 끝에 죽음이 온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생사(生死)의 문제’, ‘생사여부’, ‘생사기로’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순서를 따르는 인생의 결론은 늘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무의미한 여정일까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 죽는다면, 이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아닌, “죽음을 통과해 새로운 삶을 얻는” 인생을 이야기합니다. 이 관점을 담은 단어가 바로 ‘사생관(死生觀)’과 ‘사생결단(死生決斷)’입니다.
- 사생관: 죽음을 먼저 생각해야 진짜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사생결단: 진짜 결단은 죽음을 각오할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생결단’의 삶을 살았고, 결국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사는 이력서”가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 줄여 말할 때, “삶 혹은 죽음”이라고 따로 말하지 않고, “삶과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생과 사)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 속에 시작된 연극이 마지막에 무대의 막이 내려옴으로 완결되듯이, 한 인간의 인생도 그 인생 무대에 막이 내려옴으로 종결됩니다. 처음부터 인생 자체가 삶과 죽음이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에, ‘생사(生死)’라는 합성어 혹은 표현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생사가 걸린 문제”, “생사여부”, “생사확인”, “생사기로”, “생로병사” 등등, 이렇게 생사로 어우러지는 단어가 많은 것은 생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표현들에서 항상 ‘생’이 먼저 나오고 ‘사’가 뒤에 나온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생과 사를 순서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이 있고, 그 생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생과 사를 순서의 문제로 본다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 봤자 결국은 죽는다는 결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달리 말해, 우리는 결국 죽기 위해 매일 뭔가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보다 허무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전부터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해 온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사(生死)라는 단어 조합들 가운데, 죽음(死)이 먼저 나오고 삶(生)이 뒤따라오는 낯선 조합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사생관(死生觀)’입니다. 우리는 “생사관”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생관”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바른 관점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삶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생관’입니다.
오늘이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정말 오늘 ‘산’ 겁니까? 사실은 오늘 ‘죽어 간’ 것입니다. 저는 올해 우리 나이로 74세입니다. 제 수명이 몇 년인지 알 수 없지만, 제가 태어난 후로 지금까지 74년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만큼 죽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매일 죽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잘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나는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바른 관점, 즉 ‘사생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도 사실은 조금씩 죽고 있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죽었는가. 만약 아무 쓸모없는 것, 호흡이 멎는 순간 땅을 치고 후회할 것들을 위해 오늘 하루를 다 버린 것이라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죽음에 대한 바른 관점이 있을 때, 그 토대 위에서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생관이 중요합니다.
또 죽음이 먼저 나오는 두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사생결단(死生決斷)’입니다. “생사결단”이라고 하지 않고 “사생결단”이라고 말합니다. ‘결단할 때는 죽음을 먼저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정말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할 때, 무의미하게 살던 옛사람이 먼저 ‘죽어야’ 비로소 바른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死)”가 먼저 있어야, 그 바탕 위에 “생(生)”이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오늘부터 새롭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죽음의 문’을 먼저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리 새롭고 바른 삶을 살고 싶어 해도,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 곧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키는 대로 살고 싶고, 목전의 유익만 쫓아 사는 옛사람이 먼저 죽지 않으면 — 절대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사생결단’이 있어야, 곧 먼저 죽고 그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하루도 단지 알지도 못한 채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그저 생사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후회 없이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죽는 — ‘사생(死生)’의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일이 두 개 있습니다. 첫 번째는 74년 전, 제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난 날입니다. 두 번째 생일은 2013년 4월 29일입니다. 그날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날이 제 ‘두 번째 생일’이 되었습니다. 내 몸속에 내 생명을 위협하는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는 걸 계기로, 저는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곧 ‘사생(死生)의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암이 제게 준 고통은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암으로 인하여 저는 ‘사생의 사람’이 되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거기서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첫 번째 책이 창세기이지 않습니까. 창세기 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족보가 나옵니다(5장 4절~32절). 무려 스물여덟 절로 구성된 긴 기록입니다. 그 첫 부분만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05세를 살고 죽었더라. …”
이렇듯 이 스물여덟 절에 걸쳐 반복되는 구절은 “살고 죽었더라”입니다. ‘죽었더라’가 여덟 번 등장합니다. 구약 전체에서 맨 처음 나오는 이 족보가 웅변해 주는 것은, 결국 “모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900세를 살았든, 아들을 몇 명 낳았든 간에,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은 인간은, 이 땅에서 왕후장상이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든 결국 죽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1장에 새로운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여기에는 ‘죽었더라’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계속 ‘낳고, 낳고, 낳고…’라는 생명의 족보입니다. 구약에서는 “죽었더라”의 반복으로 끝났지만, 신약에서는 “낳고, 낳고”가 이어집니다.
구약을 ‘사(死)의 책’, 신약을 ‘생(生)의 책’이라고 한다면, 이 둘을 합해 ‘사생(死生)의 책’입니다. 성경은 ‘생사(生死)’가 아니라 ‘사생(死生)’입니다. 곧, 무의미하게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참되게 살기 위해 죽음을 먼저 통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말한다면, “정말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생결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요약된 핵심입니다.
방금 예로 든 구약의 창세기 5장 족보에는 “죽었더라”가 여덟 번이나 나오고, 마태복음 1장 17절까지의 짧은 족보에는 “낳고, 낳고…”가 열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분량을 비교해 보면, 구약 쪽(‘죽었다’는 반복)이 훨씬 길지만, 신약에서 “낳고, 낳고”가 훨씬 더 크게 번져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으면, 그 생명은 사망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생명으로 우리를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사생결단의 삶: 바울의 진짜 이력서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3년간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고, 사랑하고, 장로로 세웠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은 언제 남기는 것입니까? 보통은 죽음 직전에 남깁니다. 그러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언을 남겼다면, 당연히 “바울이 죽으려는 순간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을 남기고도 약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위대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여정은, 이 유언을 남기고 난 이후의 십여 년을 통해 완성됩니다.
바울은 이 유언을 남긴 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되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거의 2년 가까이 옥중에 갇혀 있다가, 로마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열네 낮 열네 밤 동안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하며 살 소망마저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바울로 인해 그 배에 탄 276명 전원이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죄수로 압송되어 가는 신세가 되었고, 그 감옥에서 이른바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을 써 교회에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이후에도 바울의 여정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더 써 내려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미리 유언을 남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사생(死生)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저 살다가 결과적으로 죽는 사람’이 아니라, ‘참되게 살기 위해 날마다 죽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또 죽어서 매일 새롭게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유언’은 매일매일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생사의 사람’에게는 죽기 바로 직전의 말이 유언이지만, ‘사생의 사람’은 매일 죽으므로 매일 유언을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과 마주합니다. 태어나는 데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순서가 있어도, 죽는 데는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손자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기도 하고, 젊은 사람이 노인보다 먼저 죽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생의 사람’으로, ‘사생결단’으로 살아가며, “죽기 10년 전에 이미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언을 전한” 바울의 삶과 말씀은 좋은 영적 거울이 됩니다.
바울의 삶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행 20:18)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밀레도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유언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3년간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고 헌신했던 곳이 에베소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직접 에베소에 가서 ‘유언’을 전하면 될 텐데, 왜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을까요? 그때 바울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그의 여정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통편이 지금처럼 정확한 스케줄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 떠나면 내일 배가 있으려나?” 기약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바울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너무 오래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로 직접 들어갔다가는 교인들이 “한 번만 더 만나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식사 같이 해 주세요” 하며 붙들 것이 뻔하니, 시간이 훨씬 지체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꾹 참고, 장로들만 불러서 유언을 전합니다. “장로들이여, 내가 전할 말씀을 듣고, 돌아가서 모든 성도에게 전하십시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부른 그곳은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 ‘밀레도’였습니다. 밀레도는 그리스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개발된 항구도시이며, 철학과 과학, 건축, 예술의 발상지로 유명합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탈레스가 밀레도 출신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피라미드 높이를 막대기 하나로 재는 기하학적 시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비잔틴 제국 시절 지어진 성소피아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가 밀레도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대도시였고, 문화적으로도 앞선 곳이었습니다.
그런 대도시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인생과 죽음에 대한 유언’을 남깁니다. 대도시라는 곳은 사람을 끌어들여, 세상 유익에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결국 생사의 삶, 곧 ‘죽기 위해 사는 삶’을 살게 하기 쉬운 곳입니다. 전주도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도시 아니겠습니까. 이 도시에서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단지 죽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오늘부터 사흘 동안 바울이 대도시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장로들에게 남긴 유언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도 ‘사생의 사람’, 곧 ‘죽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아시아’라 함은, 지금의 터키 반도(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당시 로마제국에서 행정구역상 ‘아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시아, 곧 에베소에 첫 발을 들여놓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행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분도 다 알고 있다.” 바울은 “내가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어떻게 설교했는지 아시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권면했는지 기억하시죠?”도 아닙니다. “내가 에베소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러분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아시죠?”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삶’ 자체가 곧 ‘설교’였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3년 동안 에베소 장로들은 다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사생결단의 삶의 세 가지 특징 (행 20:19-21)
19절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우리 성경에는 문장이 조금 꼬여 보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려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온갖 모함으로 인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긴 것, 여러분도 다 보고 알지 않습니까?”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시험(시련)’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세 번째는 ‘눈물’입니다.
먼저 시련을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생사의 사람’, 곧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은 시련을 기뻐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내가 이렇게 돈도 많은데, 이렇게 성공했는데, 자식도 잘 키웠는데, 그런데도 죽어야 하는데, 심지어 살면서도 시련까지 겪어야 하다니?” 받아들이기 힘들죠. 그러나 ‘사생(死生)의 사람’, 다시 말해 “날마다 죽으므로 참되게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시련은 거꾸로 자기 생명을 더욱 아름답게 가다듬는 정련(精鍊)의 도구가 됩니다.
원석을 생각해 보십시오. 원석은 그냥 두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원석일 뿐입니다. 값진 보석이 되려면, 세공사가 그 원석을 불에 달구고, 갈고, 깎고, 끊임없이 다듬어야 합니다. 원석 입장에서는 ‘시련’이고 ‘고난’이지만, 그것을 통과해야 비로소 보석으로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죄성을 가진 우리가 ‘사생결단’으로 제대로 산다는 것은, 시련을 통해 더 빛나는 믿음, 보석 같은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온갖 모함과 배척을 당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해. 난 나부터 살고 봐야겠어”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도망쳐 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해 — 그들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 — 시련을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사생결단’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겸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세상적인 태도와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저는 못 나서요…”, “저는 상석에 못 앉겠습니다” 같은 태도를 겸손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은근히 교만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은 단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낮은 곳에 두는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를 더 낮은 위치에 두는 것, 곧 “under-stand”하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내가 상대와 같은 눈높이, 혹은 그 위에 서 있으면 결코 ‘이해’가 안 되지만, 그의 아래로 내려가면 저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가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얹어도 병자들이 낫고 귀신이 물러가는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자기를 드러내고 부풀리기’(자화자찬) 쉬운 환경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8삭둥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8절).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10절)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세 번째 단어는 ‘눈물’입니다. 믿는 사람의 눈물은 세상에서 오는 절망과 시련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통곡’으로 바꾸는 동아줄입니다. 사생결단으로 주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시련을 감당하는 사람은 세상의 도움이나 위로가 참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을 붙잡고 울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붙잡고 애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애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마태복음 5장 4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위로는 공허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정말 하루 벌이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이 그 돈을 사기당해 버렸다 해봅시다. 그 사람이 “제발 오늘 하루만 도와달라”라고 하면, 내게 돈이 있으면 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빌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할 수 있는 게 “위로한다”는 말뿐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위로는 텅 빈 깡통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 세상 사람들의 동정이나 권력, 돈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로 일어섰습니다. “내 상황 자체는 여전해도,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라면 그 상황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사생결단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사생(死生)의 사람만이 진짜로 산다
이제 20절로 넘어갑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여기서 ‘거리낌 없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아무것도 꺼리지 않고, 개의치 않고”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여신을 숭배하며, 신전 주변 상업으로 먹고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며 이교도들을 정면 반박했습니다. 그로 인해 엄청난 불이익, 폭동, 모함, 위험에 직면했지만,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기만 한다면 개의치 않고 진리를 전했습니다. 사생결단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대인과 헬라인, 당시에 이 둘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들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았고, 헬라인들은 다신(多神)을 섬기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일하신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전하니, 그들 입장에선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힘을 합쳐 바울을 돌로 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장 15절)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핀셋으로 뽑아내어 쓰시는 ‘택한 그릇’이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이 나를 돌로 치려고 해도, 유대인들이 나를 배척해도,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사생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보셨죠? 기억하시죠?”
우리 삶은 어떤 이력서를 쓰고 있는가?
18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우리말 순서와 헬라어 원문의 순서는 다릅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안다(ἐπίστασθε)’.” 동사 하나만으로도 주어와 시제, 인칭이 다 표현되는 헬라어에서, 바울은 굳이 ‘여러분도(ὑμεῖς)’라는 주어를 붙여 강조했습니다. “(내 삶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러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 강조를 했을까요? 바울은 종이에 자신의 이력서를 써서 내민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챙긴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분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삶’ 자체가 투명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과 나눈 대화를 뒷부분까지 살펴보면(사도행전 20장 33절~35절),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고,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인 것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비량(自費糧)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텐트를 만들어 팔아 자신뿐 아니라 동행자들의 체류비까지 충당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몸소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수고해서 약한 사람을 돕는 삶을 사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일평생 사생결단으로 살아온 바울의 이력서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게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그 삶 자체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 자칭 ‘사도’라고 하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추천서(自薦書)를 들고 다니는 거짓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복음을 파는 장사꾼에 불과했습니다(고린도후서 2장 17절).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한다”(고후 2장 17절~3장 3절 참조)고 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추천장”이라고 선언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어떤 조작된 서류나 허위 포장된 종이 쪼가리를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나를 증명하는 ‘추천장’이다. 그것을 보증해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이력서를 따로 쓸 필요 없이, 전도받은 이들이 곧 ‘글자 없는 추천서’가 되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3년간 여러분 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이 다 보고 알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20장 31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저 지식으로 기억하지 말고, 삶으로 기억해서 여러분도 그렇게 사십시오.”
유언의 참된 무게는 말로만 정해지지 않습니다. 일평생 사생결단으로 살며 삶의 이력서를 쓴 사람이 남기는 말과, 평생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며 남기는 말의 무게가 어찌 같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이력서를 써 왔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 우리의 삶이 “단지 죽기 위해, 헛된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사는” 생사의 삶이었다면, 이제는 그 길을 멈추고 사생결단으로 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의 뜻을 좇아 살기 위해 먼저 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날마다 죽는 삶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힘과 은혜를 줍니다.
설령 우리가 마지막 순간 아무 말도 남길 틈 없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지금부터 우리가 사생결단으로 써 내려갈 삶의 이력서는,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언처럼 남겨 줄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기 위해 살았습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 죽음을 통과했습니까?
우리가 바울처럼 사생결단의 삶을 산다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의 유언”이 될 것입니다.
기도
주님, 나는 나의 처지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죽기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것은 시든 공동묘지를 향해 질주하는 열심이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 임하셔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살기 위해 먼저 죽는 사생(死生)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생의 사람만이 주 안에서 사생결단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일평생 잊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마다, 주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아름다운 삶의 이력서가 써지게 하시고, 그 삶의 이력서가 우리가 마지막 호흡을 거둘 때에, 이 땅에 남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유언’으로 승화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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