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회당의 예수님이 보이신 '권위' 엑수시아 exousia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을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찾으셨던 회당이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 가버나움 회당에서 주님께서 처음 말씀을 가르치실 때의 상황을 마가복음 1장 21절에서 2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심에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아서 가버나움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치시는데 그분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사람과 같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계속 말씀을 전해 왔던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말 ‘권위’라고 번역된 ‘엑수시아’는 파워, 힘, 권세를 뜻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권세, 세상의 힘, 세상 권력의 파워를 뜻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의 ‘엑수시아’, 생명의 힘, 생명의 권세, 생명의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뒤집고,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명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권세는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사랑'에서 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서기관들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들의 가르침에서 단 한 번도 생명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는 생명력이 없었을까요? 그들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자식이든 누구든, 정말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 꾸짖을 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서, “이 사람이 바르게 되기를 원한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꾸짖는 것과, 꾸짖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꾸짖음은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고, 얼굴의 눈빛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사랑과 정죄는 결코 같은 파장이 아닙니다. 꾸짖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죄의 파장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사랑과 생명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생명은 ‘영원한 사랑’이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곧 ‘생명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말과 이벤트로 하는 사랑입니까, 삶으로 실천되는 사랑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의 이벤트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행하는 사랑의 이벤트를 경험하고, 교회가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구호를 듣고, 내가 새로운 생명을 느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런 분은 극히 드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을 외치기는 하는데, 사랑을 삶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호로 그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벤트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실현이나 자기 가치 구현일 뿐입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하고, 맛있는 것을 주고,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자기 가치 구현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 때, 상대에게는 생명력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사랑을 구호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을 외치기만 하고,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이 웅장한 예배당, 여러분의 품위 있는 자세,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시선'입니다 - 회당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혹시 성지순례로 갈릴리에 가버나움에 가신 분들은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가버나움에 가면 관광객들을 위해 신축된 것인지, 아니면 2,0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계실 때 사용하던 회당과 같은 모양의 회당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꽤 큽니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바닥에 앉지 않고 다 섭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앞에서, 혹은 그들 한가운데서 가르칩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월등히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높은 자리에서 여러분 얼굴들을 다 볼 수 있습니다. 회당은 앞에 계단이 한두 개 정도 있습니다. 그 계단에 서면, 서 있는 사람이 앞줄에 있는 사람들 얼굴만 보고 뒤에는 안 보입니다. 더구나 설교자가 한가운데 서 있으면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 얼굴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손 마른 사람은 불구자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불구자를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옆에 지나가도, 옆에 앉아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 가득 차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딱 꽂혔습니다. 사랑은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돈이 보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은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어려움에 처한 손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라고 표현된 헬라어(엑세람메넨)는 수동태 완료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이 선천성 불구자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질병에 의해서 혹은 사고로 인해 불구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앞을 볼 수 없는 맹인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맹인 중에도 두 종류가 있죠. 선천성 맹인과 후천성 맹인이 있습니다. 선천성 맹인도 참 어렵게 살지만, 그럼에도 후천성 맹인에 비하면 선천성 맹인이 훨씬 적응이 빠르다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안 보였으니까 만지고 인식하고 하는 것이 다 몸으로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0살까지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질병이나 사고로 앞이 안 보이게 됩니다. 모든 걸 더듬어서 인식해야 합니다. 익숙해질 때까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선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손이 말라 붙은 불구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갑자기 불구자가 됨으로 지금 그 삶이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빠졌음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 아닙니까? 똑같은 장면을 누가복음 6장에서 증언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6장 6절에 의하면 이 사람의 마른 손이 ‘오른손’이라고 했습니다. 역시 의사답지요. 여러분,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부분 사람들은 주로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주로 오른손으로 가장의 의무를 다하던 이 사람의 오른손이 불구가 된 겁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 오른손이 불구됨으로 말미암아,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살아가려 할 때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전해 줍니다.
외경인 ‘히브리 복음서’에는 이 사람의 직업이 미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미장질을 하며 번 돈으로 하루하루 처자식을 먹여 살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른손이 불구가 됐습니다. 왼손으로는 오른손만큼 미장질을 잘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한 번도 왼손으로 미장질을 해보지 않은 사람을 쓰려고 하겠습니까. 미장 일꾼들은 많은데. 그러니까 이 사람이 미장질을 하던 오른손이 말라붙었다는 것은 그 가정의 경제가 지금 말라붙은 거예요. 그 사람의 어린 자식들의 미래가 말라붙은 겁니다. 가장이 미장질을 하지 못하니, 어디 가서 돈을 벌어도 미장질로 벌었던 돈보다 몇 분의 일밖에 못 벌 겁니다. 그러니까 온 집안이 말라붙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그 사람에게 가닿았습니다. 사랑은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오른손이 말라붙음으로 그 가정이 다 말라붙어 가는 그 가련한 사람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회당에서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는 가운데 주님의 시선이 그 손 마른 사람에게 닿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의 인생은 계속 말라붙다가 불행하게 끝났을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혹, 사람에게 닿아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보다 돈 많고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이용해서 나의 미래를 뭔가 유익하게 하려는 투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람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이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처럼, 지금 궁핍에 빠져서 한 사람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그 집안이 온통 말라붙어 가고 있는 그런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합니다.
'한가운데로 나오라'며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7절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세워 주시려 하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를 고발하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저 사람이 고치나 안 고치나 보자. 고발할 거리를 찾아야지.” 지금 주시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매우 철저하게 만들고 관습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이 무너졌는데, 그 집에 살던 사람이 그 무너진 집더미에 깔려 있어 지금 당장 구출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 싶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잔해를 치우고 사람을 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미 죽었거나, 지금 당장 죽을 지경이 아니어서 내일까지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 싶으면, 안식일에는 내버려둡니다. 여러분,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집이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주인이 “살려주세요!” 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와서 확인합니다. “맥박 한번 보자, 눈 한번 뒤집어 보자. 내일까지는 살겠다.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그냥 있어라. 내일 구출해 줄게.”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28절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겠습니까. 사람이 집더미에 깔려 있으면 금방 빼내 줘야지, 어떻게 “너는 죽을 상황이 아니니까 안식일에는 그대로 있어라. 내일 되면 구해 줄게” 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언행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그들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만히 두면, 자기네들의 기반이 흔들립니다. 자기네 기득권이 흔들립니다. 만약에 민중이 예수님에게 동조해서 난을 일으키면, 자기들은 설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회당 안에서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보신 그때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고쳐주나 안 고쳐주나? 고쳐주면 곧 고발해야지.” 하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고치시느냐, 안 고치시느냐”만 따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능력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안식일에 행사하느냐 안 하느냐입니다. 여러분, 한 손 마른 사람을 말 한마디로 고칠 수 있다면, 그분이야말로 메시아 아닙니까?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고칠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뒤흔든다는 이유만으로 그 메시아를 고발하고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가 고치기만 해봐라. 우리가 고발할 거야.” 하며 예수를 주시하는 그들의 눈빛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음험합니까. 여기 손 마른 사람 한 가정이 무너질 판인데, 그들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 사람을 미끼로 삼아 “네가 고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람의 눈이 제일 무서울 때는 자기의 욕망과 기득권을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를 주시하고, 왜 주시하는지 안다. 저들은 저 손 마른 사람을 미끼로 삼아 나를 고발하고 죽이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손 마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시선만 던지신 것이 아니라, “형제여, 일어서세요. 그리고 이 앞으로, 한가운데로 나오세요”라고 공공연하게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한세병자가 찾아왔던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능력 뿐만 아니라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한센병자가 찾아왔던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한센병(나병)은 저주받은 병 취급을 받았습니다. 2,000년 전은 더했습니다. 한센병에 걸리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동네에서도 격리되어 살아야 합니다. 마을에 나오면 다른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을에 나오기만 해도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돌을 던져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센병자가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하고 왔다는 겁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고쳐주십시오!”라고 매달린 게 아니라 “주님이 원하신다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뒷말은 생략했습니다. 앞 구절로 이미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충분히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앞에 온 그 한센병자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찾아온 그 한센병자에게 지극한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고름투성이로 썩어 문드러진 그 한센병자의 몸에 친히 손을 대셨습니다. “오느라 수고했지. 나도 너를 사랑한다.” 이 한센병자는 한센병 발병 이후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이웃에게도 버림받고, 친구에게도 버림받아 격리시설에서 지냈습니다. 누가 그의 몸에 손을 대어 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대는 순간, 예수님의 체온이 그 한센병자의 온몸에 퍼지는 순간, 그는 영육 간에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사랑은 관심입니다.
성전 미문의 지체장애자에게도 베드로의 사랑의 행동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의 기도 시간인 오후 세 시에 맞춰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성전 미문 앞을 지날 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 문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니카노르 문’을 ‘Beautiful Gate(미문)’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 중 가장 아름답고, ‘고린도의 황동’으로 만들어져 있어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비출 때 번쩍번쩍 빛났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합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날 때부터 선천성 하반신 불구인 사람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의 나이는 사도행전 3장에 따르면 40여 세가 넘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누군가 그를 메어다가 그 자리에 내려놓고, 저녁이면 데려갑니다. 말하자면 ‘앵벌이’입니다. 그가 구걸해 얻은 돈을 자기 몫으로 다 챙길 수 있지도 않습니다. 그를 데려다 주는 사람들이 그 돈을 가져갑니다.
그 아름다운 미문 앞에 앉은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에게, 고린도 황동으로 된 그 문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는 들어갈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나가자 “한 푼 줍쇼” 하고 구걸합니다. 성경은 그가 베드로를 본 것을 헬라어 동사 ‘에이덴(aiden)’이라 기록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본 것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처럼.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발걸음을 멈추어 그를 ‘블레포(blepo)’—뚫어지게 응시합니다. 사랑은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베드로가 멈춰서 그를 응시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그대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에게 “우리를 주목하시오!”라고 말합니다. 흐물거리는 눈으로 구걸하던 그가, “무언가 주려나 보다” 하고 베드로를 ‘에페코(epecho)’—주의 깊게 바라봅니다. 앉아 있는 거지와 서 있는 베드로의 시선이 부딪칠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형제여, 당신이 요구하는 금이나 은은 내게 없소.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주겠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말만 한 게 아닙니다. 그 거지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반신 마비로 지낸 평생 동안, 자기 손을 잡아 일으켜 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체온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몸에 들어가자, 그는 벌떡 일어나 미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이 구호로 머물지 않고, 시선으로만 머물지 않고, 관심의 표출인 행동으로 드러날 때, 이렇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은 그의 손을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도 “형제여,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오시오”라며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왜? 자기들도 답을 알지만, 답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아는 답과 반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죠. 얼마나 비겁합니까. 손 마른 사람을 미끼 삼고,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다 알면서도, 예수를 고발하고 죽이려는 이들이,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는 한 마디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5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는데, 대답을 하지 않자 분노에 가득 찬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주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한 사람쯤은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라.” 손이 말라붙었는데 어떻게 내밉니까? 그런데 그는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른손으로 미장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던 가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손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손만 회복된 게 아니라, 그 아내와 자식, 가정이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면, 저 완악한 자들이 나를 고발하고 모함하고 죽이려 하겠구나” 아셨지만, 이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안식일에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6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과 그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지만, 돌아온 것은 스포트라이트나 박수갈채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 안식일에, 죽을 지경도 아닌데, 손 마른 사람을 고쳤다!”며 헤롯 당과 짝이 되어 예수를 죽이려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義)를 과시하는 자들이고, 헤롯 당은 로마 제국에 빌붙어 권력의 주가 되는 자들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던 이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손잡았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내가 모함당하고 온갖 곤욕을 치르더라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를 던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기득권과 욕망을 고수하기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짓밟는 사람입니까? 세상에서는 후자가 더 잘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공동묘지 이상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호산나 vs. 십자가에 못박으라
오늘 본문에서 본 일이 예수님 공생애 초기라면,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상황이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 7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아 예수님을 태워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스가랴 9장 9절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내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지금 예수님은 “내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다. 알 사람은 알아라” 하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8절에 보면, 무리의 대다수가 예수님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폅니다. 붉은 카펫이 없으니 자기들의 겉옷을 카펫 삼고, 꽃이 없으니 나뭇가지를 뿌려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열광적으로 환영합니다. 왕의 행렬치고는 너무 초라합니다. 나귀 새끼 타고, 제자들의 옷으로 안장을 삼고, 무리들이 깔아놓은 겉옷이 카펫입니다.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행렬인데도, 사람들은 전혀 우습게 여기지 않고 진지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지금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했다고 합니다. 우리말 ‘소동’이라 번역된 헬라어 ‘세이오(seio)’는 지축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야구장에서 만원 관중 속에서 홈런이라도 터지면 지축이 흔들리듯이, 예수님을 향한 환호가 그 정도였다는 겁니다. “이 이가 대체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11절에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사람들은 “저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400년 만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라는 말에 담긴 경외심은 대단한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초라한 몰골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외칩니다. 마치 이들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메시아에게 자신들을 의탁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열광하던 그들 대부분이 불과 며칠 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친 이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이렇게 극적인 반전을 보이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9장 37절(공동번역)에 따르면, “예수께서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이 열광한 이유는 예수님의 ‘신통력’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이신 그 능력을 본 적이 있거나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통력을 이용해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고자, 자기 욕망을 예수님에게 투사해 예수님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 열광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자기들 욕망에 취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욕망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배신하신 게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배신당한 겁니다. 그래서 극렬히 예수님을 환영하던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친 겁니다.
그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44절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군중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환호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에 고무되거나 부푼 마음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클라이요(klaio)’—비통하고 애통한 눈물입니다. “네가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너희 눈에는 그것이 가려져 있구나.” 평화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본디 ‘평화의 성’이라는 뜻인데, 정작 예루살렘 사람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예수님도,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많아도 평화가 있을 수 없지요. 주님은 그걸 한탄하셨고, “너희가 결국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멸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 로마 제국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해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무너졌고, 서쪽 축대의 일부만 ‘통곡의 벽’이라 불리며 남아 있습니다. 그저 로마 제국에 대항하면 어떻게 철저히 짓밟히는지를 보여주려 남겨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 와 계셔도, 그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욕망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자기들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뿐입니다.
무리인가 제자인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예루살렘 군중 쪽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닮은 예수의 제자 쪽입니까? 돈, 물질, 부동산 등을 먼저 보는 우리의 눈을 버립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람을 먼저 보는 눈을 가집시다. 사람을 먼저 보게 되면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 사람을 먼저 보고, 그들에게 삶으로 관심을 표하는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방탕하게 살 때도,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마비되었을 때도, 그분의 시선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발견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밤이나 낮이나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그분의 사람이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그때 여러분을 통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이 황량한 땅에 당신의 사랑의 역사를 끝도 없이 펼쳐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나는 오른손 마른 불구자를 사람으로 간주하지도 않았고, 주님께서 그 불구자를 고쳐주신 일이 내 기득권을 해치는 것으로 여겨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나는 욕망의 눈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님을 이용하여 욕망을 이루려 악을 쓰고,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예루살렘 군중이었습니다. 이러고도 겉으로는 그럴듯한 크리스천인 척 위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시간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언제나 사람을 먼저 보셨던 주님,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도, 가련하고 무지한 인간들을 먼저 보시고 고통과 비통함으로 우셨던 주님, 정말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람으로 언제나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도와주십시오.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이 늘 사람에게 먼저 가 닿게 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사랑이신 주님께서 이 시대를 위해 마음껏 사용하시는 사랑의 증인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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