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히 심오한 표현인데, 이것을 쉽게 풀면 “어떤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그가 사용하는 말에서 드러난다”라는 뜻입니다. 한평생 선한 마음으로 참되게 살아온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수많은 사람을 등쳐먹고 거짓으로 살아온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말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곧 그가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저를 믿으신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말을 속으로 “저거 아니야, 저건 거짓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제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의 말이 곧 저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가 ‘말 자체의 신뢰를 상실한 표현들’을 계속 사용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신뢰하기는커녕 의심부터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저는 조국과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애국과 애족(愛國愛族)은 일평생 제 좌우명입니다. 누가 천만금을 준다 해도, 제 안에서 불타오르는 이 애국·애족의 열정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속으로 “왜 저 사람 저러지?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나?”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1950~70년대까지만 해도 ‘애국·애족’이라는 말은 보편적으로 거리낌 없이 쓰였습니다. 아이들도 “애국하자, 애족하자”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정치인들이 자기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마치 표를 얻으려는 도구처럼 ‘애국·애족’을 입버릇처럼 외쳐 왔지만, 정작 자기들만 축재하고 치부하는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국·애족’이라는 말이 신뢰를 잃고 무력해진 것입니다.
교회가 사용하는 말들이 삶에서 드러나지 않을 때 신뢰를 잃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사용하는 말 자체가 신뢰를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멋있게 “사랑” “평화” “용서” “정의” 등을 외치지만, 정작 그 말대로 행동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사용하는 말들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 사랑을 외치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내 몫을 기꺼이 희생하지 않습니다.
- 평화를 외치면서도, 교회 안에서 싸우고 분열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각자 옥합을 깨뜨리는 희생이 필요한데 아무도 깨뜨리지 않습니다.
-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까지 가서 소송을 벌이고도 끝내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행동인데, 그 고통을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 정의를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까지 왜곡해 가며 자기 이익을 챙기려 듭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 공동선을 우선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조차 욕망이 난무합니다.
결국 “사랑, 평화, 용서, 정의”라는 말이 세상에서 힘을 잃어버리고,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에 불과해졌습니다. 그것들을 다시 살리는 유일한 길은, 교인들이 말하는 대로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에 담긴 고백을 실제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 이름 역시 그 의미와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교회 이름이 주로 동네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로 많은 교회가 ‘뜻있는 이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지은 이름이 ‘허울’만 남은 채, 정작 그 이름에 담긴 선언과 고백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 “성(聖)”자가 들어간 교회라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어야 하는데, 정작 세상보다 더 속된 일을 자행한다면 교인들 스스로 이름을 짓밟는 겁니다.
- “광(光)”자가 들어간 교회라면, 어둠 속 세상을 밝히겠다는 다짐이지만, 정작 욕망의 어둠에 사로잡혀 산다면 이 역시 자기기만입니다.
- “충성”이 들어간 교회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하겠다는 선언인데,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충성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 “사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교회도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사랑을 매일 실천해야 하는데, 삶은 판이하고 말만 번지르르하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희화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교회 이름을 짓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고백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실제로 살아가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교회 이름이 힘을 갖고,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사례
제가 첫 목회를 했던 “주님의 교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인간이 주인 노릇 하는 교회를 너무 많이 봤기에, 교회 이름에서부터 “예수님만이 주인 되신다”는 선언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 “주님의교회”라는 이름을 짓고 끝낸 게 아니라, 그 이름에 합당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세워서 온 교인이 함께 지켰습니다.
1. 목회자 임기 10년: 사람이 오래 자리 잡으면 사람 중심 교회가 되기 쉽기에, 스스로 10년만 시무하기로 하고 떠났습니다.
2. 장로 임기 6년 + 안식년 1년 후, 다시 6년: 그리고 은퇴. 원로목사, 원로장로를 두지 않았습니다.
3. 만인제사장 원리 실천: 20세 이상 세례 교인이면 누구든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4. 헌금자 이름 공개하지 않음: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주님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큰 금액을 내는 경우에도 무명으로 했습니다.
5. 헌금 50% 외부 사용: 하나님 사랑(교회 유지)과 이웃 사랑(교회 밖 선교·구제)을 1:1로 실천했습니다.
6. 건물 소유하지 않음: 사람에 집중하기 위해, 예배당을 짓지 않고 필요하면 빌려 썼습니다.
7. 주중 프로그램 최소화: 교인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하기에, 교회에 붙들어 두지 않았습니다.
8. 예산 세우지 않고 결산만 철저히: 믿음은 경제논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실천사항은 예시입니다. 교회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지요.
하지만 중요한 점은, **교회 이름에 담긴 정신을 실제로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산나 교회라면...?
여러분 교회 이름이 “호산나교회”입니다. “호산나(hosanna)”는 히브리어 “호시아 나(호시아 나)”의 헬라어 음역인데, 시편 118편 25절에 “구하옵나니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쳤습니다. 본래 “호산나”는 “지금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탄원의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투사하며 “호산나!”를 외쳤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욕심을 들어주지 않고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호산나”의 뜻은 내 욕망을 이루어 달라는 주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을 바르게 구원해 주실 분이시기에 내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호산나의 어원
- 히브리어: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나(הושיעה־נ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서 '호쉬아'는 '구원하다'라는 뜻이고, '나'는 '지금' 또는 '구하소서'라는 의미의 접미사입니다.
- 아람어: 히브리어 호쉬아-나가 아람어로 '호샤나(הושענא)'로 변화되었고, 이것이 다시 그리스어 '호산나(ὡσαννά)'를 거쳐 우리말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호산나의 의미
- 구원을 청하다: 본래 호산나는 '구원해 주소서'라는 의미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호산나를 외치며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 찬양과 환호: 시간이 흐르면서 호산나는 단순히 구원을 청하는 기도를 넘어, 왕이나 메시아를 맞이하며 드리는 찬양과 환호의 표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이하며 드리는 찬양이었습니다.
호산나의 의미 변화
- 구약성경: 구약성경에서는 호산나가 주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로 사용되었습니다.
-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 현대: 오늘날 호산나는 교회에서 예배나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리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결국 여러분이 호산나교회라는 이름을 쓴다면, 그 이름은 “주님, 지금 저를 구원하여, 제 욕망을 깨뜨려 주시고, 날마다 저를 둘러엎어 주시며,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공동체적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언을 삶에서 실제로 실천할 때, 호산나교회는 비로소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교인이 많고, 프로그램이 많은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희생 없이 “호산나”를 외치면, 예루살렘 군중이 “호산나!”를 외치다 며칠 뒤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여러분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1. “내가 예배당에 와서 ‘호산나’를 외칠 때, 그 소리는 과연 어떤 뜻인가?”
2. “그저 내 욕망을 이루어 달라는 미신적 외침인가, 아니면 하나님 뜻에 저를 온전히 드립니다 하는 믿음의 고백인가?”
3. “우리 교회 이름이 호산나교회인 것은 단지 붙여진 이름일 뿐인가, 아니면 날마다 내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공동체적 선언인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과 삶을 둘러엎지 않으면, 교회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호산나교회가 진정한 “호산나”의 의미, 곧 “주님, 지금 저를 온전히 구원해 주십시오. 제 자아와 욕심을 깨뜨리고, 저를 통하여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는 통로가 되어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삶으로 드릴 때, 호산나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흐르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스스로를 둘러엎고,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참된 “호산나”의 공동체로 서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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