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에는 경전이 있지만 그대로 살아갈까요?
모든 종교는 저마다 고유의 경전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이란 그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특정 종교를 신봉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종교의 경전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의 경전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이 없으면 종교도 없고, 그 종교를 신봉하는 신도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의 경전을 소중하게 받들고 그 경전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인들이 자기가 선택한 종교의 경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경전대로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슬람교의 종교적 열정은 강렬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슬람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적 열심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들은 한 달 동안의 라마단 금식 기간에,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거나 피울 수 없습니다. 한 달 내내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또 특별 절기인 하지(Hajj)가 되면 불과 열흘 사이에 전 세계에서 매년 200만 명 이상의 이슬람교도들이 성지 메카로 몰려듭니다.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 보니, 사람들이 발에 밟혀 압사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날 정도입니다.
이런 특별 절기를 제외하더라도, 이슬람교도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다섯 번씩 기도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사원을 찾아가 기도해야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현재 있는 위치에서 메카를 향해 몸을 숙여 기도합니다. 수천 명이 맨발로 사원에 모여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기도하는 모습은 사진만 보아도 보는 이들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터키에 갔을 때, 버스 기사님이 기도 시간이 되면 매번 사원으로 가느라 하루에 몇 번씩 기다려야 했던 경험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이처럼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열정은 타 종교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런데 그 열정만큼,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대로 실제로 사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20여 년 전, 우리는 그들의 민낯을 본 적이 있습니다.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 후세인을 응징하기 위해 다국적군이 결성되어 바그다드를 함락시켰을 때, 그 독재자 후세인의 폭정에 시달리던 바그다드 시민들은 연합군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는 후세인 동상에 밧줄을 걸어 쓰러뜨렸지요. 그 직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바그다드 전체에서 대약탈이 벌어졌습니다. 국가 기관이나 공공건물, 외국 공관, 대저택, 상점은 물론, 박물관·병원·약국까지 무차별적으로 약탈당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사원에 찾아가 기도하는 이슬람교도들의 경건한 모습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이라크 국민 중 99% 이상이 이슬람교도인데, 그날 약탈을 벌인 이들 역시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였습니다.
우리는 코란을 잘 모릅니다만, “남의 것을 훔치면 손목을 잘라라”라는 율법이 있다는 정도는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 바그다드에서는 그 코란의 율법이, 그 율법을 안다고 여겨지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했습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매일 다섯 번씩 사원에 가서 기도했던 것일까요? 그런 모습을 통해 코란의 내용과 정신이 과연 구현될 수 있겠습니까? 그 약탈을 자행한 이슬람교도들이 코란의 내용을 정말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을까요?
이슬람교의 경전은 이슬람을 모르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 특히 이슬람 경전을 배운다는 사람들, 그 경전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이들에게서 왜곡됩니다. 바그다드에서 약탈극을 벌이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다섯 번 기도하러 간 그들, 그 표리부동한 삶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친 이슬람교 사제들의 책임이겠습니까?
힌두교도 종교적 열정이 강하지만 베다 대로 살지 못합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뭄바이에서, 힌두교의 제의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파괴의 신으로 알려진 시바 신전에 들어갔는데, 신전 앞에는 검고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시바 신을 믿는 힌두 교도들에게 남근(男根)은 신성하게 여겨집니다. 그 돌은 남근 모양이었습니다. 신도들은 그 돌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이 가져온 물과 우유를 그 돌 위에 부었습니다. 흘러내린 물과 우유를 손으로 훑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르고는 그대로 예식을 마쳤습니다. 신전에는 무조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는데, 밑바닥으로 흘러내린 우유와 물이 때 국물이 되어 발 밑에 고여 있었습니다. 발은 물론 양말까지 다 젖어 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이어 보존·유지의 신으로 알려진 비슈누 신전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힌두 교인들은 윤회설을 믿는데, 다음 생에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슈누 신을 더욱 열심히 섬기고 재물을 바치는 듯했습니다. 신전으로 이어지는 수백 미터 골목 양옆에는 재물 파는 가게들이 빼곡했고, 신도들은 꽃과 과일, 떡, 과자 같은 공물을 한 아름 사서 신전으로 올라갑니다. 신전 마당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고, 사제들은 우통을 벗은 채 그 많은 공물을 받느라 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재물을 바친 이들에게는 사제가 붉은 물감을 손가락에 찍어 이마에 점을 찍어 주고, 그것으로 제의가 끝납니다.
힌두교에는 뛰어난 서사시로 알려진 베다(Veda)라는 훌륭한 경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간 신전 어디에서도 그 경전을 낭독하거나 강독하는 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경전의 내용을 몰라도 됐습니다. 붉은 점 하나 받으면 그게 ‘면죄부’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베다 경전은, 그 내용을 알 필요도 없이 공물만 바치는 신자들과, 그들에게 경전 내용을 알려 주지 않고 공물에만 관심을 두는 사제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무아도 왜곡되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불교의 핵심 사상은 ‘무아(無我)’입니다.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마치 내가 있는 듯 착각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따른다. 이 무아를 깨달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방되어라.” 이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는 죽음이 임박하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불태워 없애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죽음의 방식마저도 무아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태운 뒤, 젓가락으로 사리를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은 무아를 가르치기 위해 ‘내 시신도 태워서 없애라’ 하셨는데, 왜 사리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요.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승이 죽으면 다비식 후 사리를 수습하고, 사리가 몇 개 나왔네, 안 나왔네 하며 스승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유(有)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정작 불교를 안다고 하는 불자들에 의해 왜곡됩니다.
기독교도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첫 번째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장 16~17절).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여기서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모트 타못”인데, ‘죽는다’는 뜻의 히브리 동사가 두 번 연달아 쓰여 아주 강력하게 ‘예외 없이 죽는다’는 의미를 전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을 받은 여자는(창세기 3장 3절)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바꿔 버렸습니다. 누가 그렇게 바꿨습니까? 첫 번째 여자가 바꿨습니다. 자기 욕심과 본능을 충족시키려, 하나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역사의 시작입니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이것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엘로힘)이시다!” 하고 숭배했습니다. 아론은 초대 대제사장이 될 인물이었는데도, 사람들의 욕망에 굴복해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도록 부추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후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를 세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짜 선지자들도 난무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등에 보면, 스스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짓말을 일삼는 선지자들이 많았지요. 신약시대에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고린도후서 2장 17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장사꾼처럼 불순물을 섞어)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설교자나 전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에 불순물을 섞어 설교하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20장 29~30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양 떼를 해칠 뿐 아니라, 너희 중에서도 어그러진 말을 하여 제자들을 자기에게로 끌어가려는 이들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성경도, 성경을 모르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 욕심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이들에 의해 계속해서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드러납니다.
말씀 왜곡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성을 가진 우리가, 말씀 왜곡의 함정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를 봅시다. “이때로부터”라고 할 때, 그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직후입니다. 로마 황제의 칭호가 붙은 도시,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을 정도로 황제 숭배가 극심한 그곳에서, 베드로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당신이 메시아이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가장 위대한 고백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반석 같은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시점, “이때로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받고 죽임 당한 뒤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비로소 밝히셨습니다(마태복음 16장 21절).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는다”는 말씀을 듣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낚아채며 야단을 쳤습니다. “주님,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 고백했으나, 실제 마음속에서는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한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고, “사람의 일”은 기껏해야 정치적·경제적 번영을 바라며 예수를 따라다니는 베드로의 안목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의 삶이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마태복음 16장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세기 로마시대에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 육체적인 욕심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듯이 내 옛 자아를 못 박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예수님을(말씀을, 로고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16장 25~26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우리가 평생 지키려는 이 목숨이란, 결국 한 줌 흙이 될 육체적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왜곡한다면, 만일 전 세계를 다 얻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지켜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고, 그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갑시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말씀 왜곡일 수 있습니다. 하와처럼, 베드로처럼, 아론처럼, 하나님 말씀을 자기 욕심에 맞추어 해석하고 이용하는 삶은 결국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체도 언젠가 썩어 문드러질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한 말씀 안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다 결실하지 못했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옥토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땅이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밭을 갈아엎고, 돌과 잡초를 제거하고, ‘자기를 비움(부인)’으로 씨앗이 깊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인의 과정 없이 옥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옥토가 되어 말씀을 받아들이면, 이제는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참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혹 말씀을 왜곡해 왔다 해도,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예수쟁이로 살아가십시다. 날마다 말씀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생명을 내어드리며, 좁은 길을 걷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다수는 늘 “넓은 길”로 가면서도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했고, 말씀을 왜곡해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처럼, 적은 수의 ‘소수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오셨습니다. 이 밤이 바로, 우리 각자가 생명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 부인의 좁은 길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역사적인 밤이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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