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입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아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구원의 의미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영국의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투하(投下)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믿는 신(神)에게 인간이 찾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에게 오라”라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유일한 종교, 기독교)
만약 우리가 그 하나님께 찾아가야만 했다면,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찾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침투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꾸짖고 심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병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가진 자들만 고쳐 주겠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출신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병자들을 어떻게 고쳐 주셨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한센병자를 치유하심
주님께서는 한센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옛날에는 “나병”이라고 했지요. 온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당시 한센병은 전염병으로 알려졌기에, 그 병에 걸린 사람은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격리되었습니다. 만약 한센병자가 그 격리 구역을 벗어나 사람 사는 마을로 들어오면, 주민들이 돌을 던져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센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꼭 한 번 만나겠다” 하는 마음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 썩어 문드러지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깨끗함을 받으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의 손을 내밀어 한센병자를 만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아멘. 그 순간, 한센병이 깨끗해졌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어느 날 로마 제국의 군인, 백부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집 머슴(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온 것입니다. 중풍병을 앓는 종이 너무 고통스러워한다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고, 종이나 머슴은 정규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로 그 머슴을 고치기 위해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래, 가자. 내가 고쳐 주마” 하셨는데,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제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도 윗사람의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움직이고, 제 부하들도 제가 명령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갑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도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게 될 줄 믿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 즉시 종이 나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와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심
또 어떤 날, 주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 열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아 재산을 다 탕진하고도 병을 고치지 못했지요. 유대인들은 하혈하는 여인을 부정하다고 여겼는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에 차마 앞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뒤로 가서 주님의 옷자락만 슬쩍 만졌는데,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말랐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도, 주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맹인들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치자, 주님께서 그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셨습니다. 한쪽 손이 말라 붙어(불구가 되어) 생활이 어려운 사람의 손도 펴 주셨고, 귀신이 들려 말 못 하는 농아도 귀신을 쫓아내어 말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의 질병과 약함을 차별 없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아멘.
예수님의 기적과 인간 문제 해결
주님은 병든 자들만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다가 당면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로 건너가던 중에 돌풍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는데, 주님이 폭풍을 꾸짖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또 다른 날, 제자들만 탄 배가 역시 돌풍에 휩쓸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주님께서 산 위에서 기도하시다가 바다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수많은 병자와 가난한 이들이 모였던 베싸이다 들판에서는, 아이 하나가 가진 작은 도시락(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굶주림을 걱정하셨고, 제자들이 찾아낸 어린아이가 지닌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엄청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모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당신이 만나신 모든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주님께서 당신을 찾는 모든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만나는 모든 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면, 평생 병을 앓고 있거나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서입니까? 기도가 부족해서입니까? 아니면 회개를 안 해서 그렇습니까?
1970년대 한국교회에는 기도원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가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기도하면 무조건 병이 낫는다”라고 설교하는 기도원장들을 만났지요. 그러나 실제로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원장들은 하나같이 “아직도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며, 회개가 부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치병에서 낫지 못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 기도와 믿음과 회개가 부족해서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반대로, 무병장수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어 재산도 불어나고, 자식들도 모두 잘되는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믿음이 좋아서, 회개를 철저히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질문: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의 근거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66권이나 되며, 그 방대한 말씀을 다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핵심을 압축한 것이 사도신경인데,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고쳐 주셨다”거나 “바다 위를 걸으셨다” 같은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왜 사도신경에는 이런 표적(表迹)은 포함되지 않을까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내용은 주로 15장까지입니다. 그런데 16장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행적이 ‘병고침’이나 ‘기적’에 집중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됩니다. 그 이유는, 육체가 낫고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깨뜨려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는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16장 이후로 넘어가야 합니다. 16장 이전의 관점은 이 땅에서 무병장수하며 풍족하게 사는 것이지만, 16장 이후의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믿음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성장과 십자가의 의미
그러나 16장 이후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지만, 그 즉시 예수님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받고 죽임 당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꾸짖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16장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16장 이전의 육체적 안일과 세상적인 욕망에 매여 살던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래야 16장 이후로, 곧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라고 장담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대제사장 무리에게 잡혀 심문받을 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며, 심지어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 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베드로는 16장 이후로 완전히 넘어가,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혹시 나는 평생 병을 앓거나 실패를 경험했는데, 그것이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회개를 안 해서라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 무병장수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이 진정 믿음이 좋아서, 기도를 많이 해서, 회개를 잘해서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정말 ‘내가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마태복음 16장 이전식의 기적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인가?
바울의 고백과 참된 믿음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기적적으로 고쳤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탄의 가시”라 부른 평생 지병을 앓았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낫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통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말했습니다. 그의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머물러 있지 말고, 16장 이후로 넘어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고백하고, 부활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병이 낫고 사업이 잘되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도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 수 있음이 참된 복입니다.
사도신경과 기적의 의미
사도신경에는 오병이어 기적, 바다 위를 걷는 사건, 병자 치유와 같은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들은 다른 종교에도 어느 정도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이요, 사도신경의 요체입니다.
맺는말
우리 모두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육체적 안일과 세상 욕망에 갇힌 삶을 자복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믿음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들로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주님,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뿌리를 두고 육체를 우상처럼 섬기면서도, 마치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인 양 스스로 속아온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미신을 믿으면서도 그걸 믿음이라고 착각했던 영적 무지를 사하여 주옵소서.
곧 썩어 문드러질 이 육체만을 위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의 조명 아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참된 표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면서 부활의 소망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16장 이후를 믿음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살아갈 때,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하게 하시고, 어두운 세상이 빛을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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