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적이고 건강한 삶이 전부일까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전에 제가 호주 시드니에 갈 때마다 만나 뵙던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제 학교 직계 선배님이셔서, 그분이 늘 제 숙소를 찾아오셔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분을 시드니에서 마지막으로 뵌 것이 10년 전인데, 그때 그분의 연세가 80세였습니다. 80세 되신 장로님이 저를 만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 5시면 저녁 식사를 끝냅니다. 그리고 밤 8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골프를 칩니다. 일부러 한인들이 계신 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정해 놓고, 낮에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독서와 산책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매일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내 나이가 80 임에도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장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 저도 장로님처럼 살면 당연히 피곤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장로님께서는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신다면, 장로님 스스로 장로님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순간 문득 마지막 호흡을 거두실 때, 계속 이렇게 살아오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시드니를 떠나는 날 아침, 장로님이 다시 숙소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 말기를 맞은 제 삶을 다시 정리할 수 있도록, 생각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현필 선생의 육체 건강 all-in과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오래전에 대학 입시학원을 만들고 영어 학습서를 써서 명성을 떨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영어 학습서는 워낙 유명해서, 저도 고등학교 때 그 학습서로 영어 공부를 했고, 제 윗세대와 제 아래세대의 90% 이상이 그 학습서를 사용했습니다. 그분이 연세가 드신 후에는 건강 전도사가 되셨습니다. 매달 건강 잡지를 발간하며, 건강 관련 단행본도 여러 권 발행하셨지요. 건강 관련 강연도 다니셨는데, 서울에서 발행되는 전국지 일간지에서 매주 한 면 전체를 그분의 건강 칼럼으로 채울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장수 세계 기록을 새로 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셨습니다. 주장 내용도 시드니에 사시던 그 장로님과 비슷했습니다. “저녁은 5시에 먹어라, 그리고 밤 8시에 잠들어라. 그러면 자는 동안 위장이 깨끗이 청소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운동하면 누구나 장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려면, 모든 직장인은 회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어느 직장인이 5시에 저녁 먹고 8시에 잠자리에 들겠습니까. 이웃이 어떻게 사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무관하게 오직 자기 육체 건강만을 위해 모든 것을 쏟으라는 것이 그분 글의 핵심이었습니다. 고작 몇십 년 살다가 썩어 문드러질 육체를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하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는 그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세계 장수 기록을 경신하겠노라 호언장담하시던 그분은 1999년에, 86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사고로 숨을 거두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 기사를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립선 말기암 수술 후 요양소에서 겪은 에피소드 -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저는 2013년도에 전립선 말기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4차례 방사선 치료와, 2년에 걸친 호르몬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 중에 강도천에 있는 요양소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 요양소에서는 입소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몇 호방에서 명상 프로그램이 열린다”라고 공지가 되길래,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걸까?’ 궁금해서 그 방을 찾아갔습니다.
참석자는 저를 포함해 네 명이었습니다. 남자 청년 한 명, 여자 청년 한 명, 중년 부인 한 분, 그리고 저. 그중에서 남자 청년과 여자 청년, 중년 부인은 앞자리에 앉았고, 저는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여성 강사가 앞에 앉은 세 분을 향해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못 했습니다. 강사가 남자 청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당신은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청년이 한참 침묵하다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사가 “제가 기다릴 테니 생각해 보세요” 하자, 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청년이 “일이 잘 풀릴 때가 행복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사가 그다음 옆에 있던 여성 청년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미 좀 준비를 했던지, 그 여성 청년은 “맛있는 걸 먹을 때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중년 부인에게는 “공기 좋은 숲길을 트레킹 할 때가 행복하다”라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강사가 이제 뒷줄에 앉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행복하십니까?” 저는 “제 삶에 절대적인 의미를 느낄 때,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몇십 년 전과 비교해도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이젠 매일 아침저녁으로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고, IT 기계 발달로 한 사람이 처리하는 일의 양이 예전 같으면 수십 명이 하던 일을 혼자 감당합니다. 젊은이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스펙을 쌓느라 정신없이 바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는데, 이게 내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행복이 무엇인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 행복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 못 하거나,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 남자 청년처럼 “일이 잘 풀릴 때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평생 불행합니다. 인생은 일이 풀리지 않는 날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여성 청년처럼 “맛있는 걸 먹을 때가 행복”이라면, 언젠가 돈이 없거나 건강이 나빠져 더는 먹지 못하게 될 때 불행해집니다. 중년 부인처럼 “공기 좋은 숲길을 트레킹 할 때가 행복”이라면, 나이 들어서 거동이 불편해지고 더는 트레킹을 못 하게 되면 인생 만년에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삶의 의미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오늘 있다 내일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삶의 의미 속에서 둥지를 트는데, 인간의 절대적인 삶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 - 하나님의 예정을 고백하다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교회를 대적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감옥에 보내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강권적인 빛 가운데 사로잡혀 회심했지요. 그때 바울이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핀셋으로 바울 한 사람만 집어내셨습니다. 제일 못된 자였던 바울을 택하신 겁니다. 왜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셨을까. 바울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셨다”라고 깨달았습니다(에베소서 1장 4절).
바울은 ‘왜 저 일행 중 나만 부르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나를 아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거룩하고 흠 없이 세우셨기에, 제 때가 되어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핀셋처럼 집어내셨구나”라고 믿음의 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바울의 삶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고, 바울은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누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 이하를 보면,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떠나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해 터키 내륙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님께서 막으시고, 무시야를 지나 동쪽으로 가려했는데 또 막으시고, 서쪽 해안 드로아로 가게 했습니다. 드로아에서 의사 누가를 만나 일행으로 삼고, 마케도니아 사람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빌립보를 거쳐, 루디아와 간수 가정을 주께로 인도하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를 지나 고린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사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얽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지요.
고린도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원래 본도(Pontikos, Pontus 소아시아 북부에 있는 곳) 출신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가서 텐트 만드는 사업으로 성공했으나,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추방을 당해 고린도에 정착해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텐트 만드는 기술이 있었고, 그 부부와 함께 일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떠날 때 함께 따라가고,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겹치고 겹치지만, 한 치 오차 없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셨다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복기(復碁) 해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이미 아시고 사랑하셨고, 이토록 치밀하게 내 길을 인도하시며, 나를 통해 구원 역사를 펼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님에 감사했습니다. 그 절대적 의미 속에 깃든 행복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에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놓고 유언처럼 말하지요. “성령께서 각 성에서 내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증언하지만, 나는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겉보기에는 비장한 선언 같아도, 이것은 바울의 행복 선언문이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결박과 환난의 길로,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장 6~8절에서, 바울은 참수형을 앞두고도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위해 준비되었으니, 그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내게 주실 것이다”라고 기쁨에 찬 고백을 남깁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주님의 면류관’을 기다리는 행복감. 하나님 안에서 자기 삶의 절대적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복입니다.
이재철 목사 인생을 반추하며 깨달은 행복
저 역시 전립선 말기암 치료를 받고, 유서까지 쓰며 죽음을 눈앞에 뒀던 때를 지나왔습니다. 그 와중에 생각해 보니, 제 인생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인도하셨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아홉 살 되던 해, 네 살이던 제 처의 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 때문에 장인·장모님이 다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셔서 태어난 딸이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 집안의 가정사를 통해, 언니 대신 제 처를 태어나게 하시고, 저를 구원하기 위해 제 처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제 삶이 절대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더군요.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 행복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삶의 의미,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일이 잘 풀릴 때가 행복이라고 여긴다면 평생 불행할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는 게 행복이라면, 언젠가 그런 자유가 없을 때 절망할 것입니다. 공기 좋은 숲길 트레킹이 행복이라면, 거동이 불편해질 만년에 불행해질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환경이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 아닙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삶의 의미’ 속에서 둥지를 트는데, 그 절대적 의미는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한 분 한 분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흠 없이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여러분 삶을 드린다면, 여러분의 삶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며, 그 절대적 의미 속에서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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