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가 로마서 10장 17절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만 딱 떼어 놓고 보면, 그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만 많이 들으면 되는 거구나, 또 그렇게 설교하고 성경 공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앞 구절을 보면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6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인간들이 복음을 쫓아 살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으로 전했죠? 입으로 전했습니다. 말로 전했습니다. 그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로는 다 들었습니다. 귀로 안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한 말을 누가 믿었나이까? 여기에서 ‘믿음’은 앞에 나오는 ‘순종’과 동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었는데 몸으로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17절, 로마서 10장 17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에서 ‘들음’이 청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가 가르치는 반 아이 중에서 한 아이를 두고 “저 아이는 정말 말을 잘 듣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아이의 귀가 밝다는 얘기인가요? 청력이 좋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때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듣는다는 말이 아니라, “저 아이는 내가 하는 말을 몸으로 듣는 아이입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이것을 16절과 종합해서 이 말씀을 풀이하면, “그러므로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듣는 것이다.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내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가만히 보세요. 누가 주님의 말씀대로 삽니까? 주님의 말씀을 단 한 번이라도 살아 본 사람이 주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내가 손해를 봐도, 내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듣고 한 번이라도 쫓으면, 위로부터 오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경험한 사람이 또 말씀을 몸으로 듣습니다. 평생 말씀을 귀로만 듣는 사람은 절대로 평생 몸으로 듣지 못합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은 이 예배당에서 저와 함께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을 여러분들 다 귀로 지금 듣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이쪽 귀로 들었다가 저쪽 귀로 흘려버릴 거예요. 귀로만 들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오늘 말씀을 몸으로 듣고, 예배당 밖에 나가서 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사렛 동네에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가 살았습니다. 나사렛 동네는 찾아가 보시면, 상관 지방 달동네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다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고기 잡고 살거든요. 그 갈릴리에서 산으로 올라가서 살 수밖에 없다? 그 당시에 차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올라가서 산에서 산다는 건, 아랫동네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 높은 곳을 찾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화에 그려진 마리아를 보면 아름답고 거하게 그리고, 입은 옷도 백옥같이 하얗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건 다 화가들이 지어낸 겁니다. 나사렛 달동네 빈민촌에 사는 처녀가 먹을 것도 겨우 구해서 먹는 처녀였는데, 옷이 어떻게 그렇게 백옥처럼 희었겠습니까. 그 처녀에게 정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셉이라고, 약혼했고 곧 결혼할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와 천사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에서 33절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름을 거룩한 이라 하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베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졌던 사람이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천사가 어마어마한 얘기를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 성령의 능력으로 아이를 잉태할 텐데,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아니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거야. 너 친족 엘리사벳도 늙도록 아이를 못 낳았지?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아이를 잉태해서 6개월이 되었잖아.” 엘리사벳이 늙어서 낳은 아이가 태어나서 세례 요한이 되었습니다.
“봐, 저 여자도 늙어서 애를 뱄잖아. 그러니까 너도 뱉게 될 거야.”
그런데 엘리사벳과 마리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는 늙었지만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늦게 태어난 겁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면 뭐합니까?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는데요. 마리아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잉태하게 했다”고 해서 아이를 낳으면, 세상 사람이 그걸 믿어 줄까요? 율법에는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안 돼요. 제가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뱉니까. 난 그렇게 부도덕한 일 못 합니다.”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가 그 말씀을 귀로만 들은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 마리아는 몸으로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해서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듣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여러분, 주님을 사랑합니까? 십일조 내면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까? 봉사하면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까? 교회 참석해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합니까? 그거 아닙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계명을 뭘로 지킵니까? 귀로 지킵니까, 입으로 지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몸으로만 지켜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들을 때만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정말 주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마리아처럼 내게 불이익이 닥쳐와도, 내 생명이 위태로워져도,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들음으로써 내가 주님을 고백한 적이 있는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들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사랑하십니다. 주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시거든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듣고 지키면,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바꾸어 말해서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이 내가 그 말씀을 지킬 때, 내 삶을 통해서 그 말씀이 ‘화(化)’ 된다, 인카네이션(성육신) 된다는 뜻입니다. 내 팔을 통해서, 내 손을 통해서, 내 발을 통해서, 내 온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주님의 통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빈민 처녀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 여인 중에 가장 존귀한 성모 마리아가 되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건 이런 거예요.
마리아만 지켜서 이렇게 되었는가? 아닙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 곧 내 몸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주님께서 그를 들어 당신의 통로로 삼아 당신의 섭리를 이 시대 역사 속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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