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생사(生死)’가 아닌 ‘사생(死生)’으로 사는 사람
사도 바울은 단지 생각 없이 죽기 위해 살아가는 ‘생사(生死)’의 사람이 아니라, 참되게 살기 위해 먼저 죽는 ‘사생(死生)’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뜻을 위해 사생결단의 삶을 살았고, 그러한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사는 이력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라는 이력서 자체가 바로 유언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유언의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20장 22절에서 24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건, 목숨을 내어놓는 사생결단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대조: 말뿐인 결단 vs. 실제 결단
말뿐인 결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이른바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오늘 밤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35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버려도, 나는 결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야, 네가 지금 그러는데, 바로 오늘 밤이 다 가기 전, 닭이 울기도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거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살겠습니다.”
곁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말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자,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습니다.
실제 결단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나의 생명조차 귀히 여기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결국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목숨을 걸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위해 제 생명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정말 바울처럼 끝까지,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죽기까지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입으로는 호언장담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이해관계에 따라 주님을 부인하는 쪽입니까?
바울은 어떻게 죽기까지 결단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바울은 이렇게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는 사생결단의 선포를 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죽기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20장 22~24절) 이전의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하면서, 바울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고, 심지어 바울이 텐트를 만드는 작업 중에 앞치마나 땀을 닦는 수건을 가져가도 그것만 만져도 병이 낫는 일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에베소의 마술사(정확히는 ‘마법사’)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던 점성술 책을 다 불살랐습니다. 그 책의 값이 5만 드라크마였다고 합니다. 1드라크마는 한 사람의 하루 임금입니다. 그러므로 5만 드라크마라면, 한 사람이 쉬지 않고 5만 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곧 137년 치 임금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 사역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럴 때라면, 보통 사람 같으면 에베소에 정착해서 여생을 편히 보낼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사도행전 19장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바울은 그냥 에베소에 눌러앉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 이미 에베소에서 세계 최대급 사역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같은 교회가 있고, 아가야(그리스 남부)에는 고린도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들렀다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후에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고 결심합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바울은 강물처럼 살았습니다. 강물은 가만히 고여 있으면 강물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소명을 따라 계속 흘러갔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생명력 넘치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후(19장 21절 참조),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했던 마케도니아 지방과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기 위해 에베소를 떠납니다.
20장 1절을 보면, “그때에 소요가 그치매…”라고 합니다. 이 소요란 무엇인가 하면, 에베소 사람들이 신봉하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우상 숭배 세력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사건입니다(데메드리오 사건). 도시가 한바탕 뒤집혔고, 간신히 수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같은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며, 이전에 자신이 세운 교인들에게 여러 말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20장 2절). 그러다가 아가야(고린도)로 갔는데, 그곳에서 3개월을 머무르며 사역하다가 수리아(예루살렘 방면)로 배를 타고 가고자 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득이하게, 배를 타고 한 번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다시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서 아예 육로를 통해 돌아가기로 합니다(20장 3~5절).
그때 각 소아시아(터키 지방), 마케도니아, 헬라 지역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모았고, 그 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러 대표자들이 같이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4절에 나오는 여러 사람이 바로 그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은 먼저 드로아로 가서 바울을 기다렸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마친 후 에게해를 건너 드로아로 갔습니다(20장 5~6절). 이 시점부터 사도행전에서 주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가 이 시점에 바울과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이르러 7일을 머물렀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바울의 설교 중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바울의 기도로 살아나는 기적도 일어납니다(20장 7~12절).
바울의 ‘자발적 고독’: 사생결단의 결심을 완성시키는 원동력
그리고 마침내 드로아를 떠나는데, 20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아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갔으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바울이 일행에게 “너희는 먼저 배를 타고 가라. 나는 걸어서 가겠다”라고 ‘정해 주었다(διατάσσω)’는 것입니다. 바울이 함께 동행하는 제자들에게 명령한 적이 거의 없는데, 여기서는 명령어가 쓰였습니다. 동행들은 필시 말렸을 겁니다. “선생님, 지금은 연로하시고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굳이 이 먼 길을 걸어가려 하십니까? 우리랑 같이 배를 타고 가시죠.” 그러나 바울은 “너희는 배를 타고 가라. 나는 걸어서 갈 것이다”라고 정해 주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드로아에서 아소까지는 30km~40km라고도, 혹은 더 멀리 잡으면 60km 가까이 된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루가 걸릴 수도, 이틀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왜 걸어갔을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 고독하게 독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20장 23절). 성령님께서 각 성에서 그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길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20장 24절).
그 결단을 하기 위해, 바울은 들어와에서 아소까지 혼자 걸으며 하나님 앞에 고독하게 자신을 세운 것입니다. 동행들 틈에 있으면 그들과 대화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더라도 주님을 위해 가겠다는 결심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 홀로 걷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울이 배고프면 낡은 배낭에서 마른 빵을 꺼내어 씹어 먹고, 밤이면 돌바닥 위에 잠자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독의 시간이자, 사생결단의 결심을 완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고별 설교, 곧 유언을 남깁니다(사도행전 20장 17절 이하). 이미 바울은 마음을 정했습니다. “성령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셔도, 나는 가겠다.” 이 결단은 밀레도 이후 투로(21장 4절)와 가이사랴(21장 10~14절)에 가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심지어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로 손발을 묶으며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당신을 이렇게 결박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입니다” 하고 예언해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21장 13절).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만류가 아무리 거세도, 바울은 주저함 없이 같은 고백을 유지합니다. 그 내면의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지만, 결국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하나님과 단둘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자발적인 고독’을 통해 십자가라는 사생결단을 이루셨습니다.
결론: 고독이 만드는 ‘사생결단’의 삶, 그리고 생명의 유언
결국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바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사는 이력서’였고, 그 삶의 이력서 자체가 유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사생결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동력은,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한 ‘자발적인 고독’이었습니다. 스스로 시간을 떼어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며(고린도전서 15장 31절), 매일매일을 사생결단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릅니다. 외로움은 인간관계에서 소외되어 버림받은 느낌이지만, 고독은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외로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들과 부대끼기만 좋아하고, 하나님과 독대한 적이 없어서 혼돈과 미몽 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는 거룩한 고독은 우리의 삶을 결단케 하는 힘을 줍니다. 그 시간이 쌓여 갈수록, 우리는 바울처럼 사생결단으로 살 수 있고, 그 사생결단이 결국 우리의 삶을 ‘생명의 유언’으로 완성해 갑니다.
한마디로, ‘고독’은 참된 삶의 유언을 이 땅에 남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도
주님, 나는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어울리기만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삶의 실제 방향은 언제나 주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은 항상 혼돈과 미몽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그걸 인생의 본질이라 착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나의 어리석음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 세상으로부터 나를 구별 짓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한 자발적인 자기 격리, 그 고독한 시간이 내 영적 즐거움이 되게 해 주십시오.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거룩한 고독을 더욱 사모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고독이 ‘살기 위해 먼저 죽는 사생결단’의 삶의 토대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생명의 유언으로 승화되는 원동력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외로움을 싫어해서 사람들과 부대끼기만 좋아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다릅니다.
외로움은 버림받은 상태이지만, 고독은 의도적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 앞에 선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독의 길을 걷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기 원하는 모든 성도들, 그 심령과 걸음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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