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 수요 직장인 예배에서의 설교 @20250108
본문: 마태복음 5장 4–5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서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시작되는 영적 여정
예수님은 팔복을 언급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1복)에서 시작하여 “애통하는 자”(2복), “온유한 자”(3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4복), “긍휼히 여기는 자”(5복), “마음이 청결한 자”(6복), “화평케 하는 자”(7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8복) 순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십니다. 이 순서 속에는 영적 여정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복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빈 상태, 즉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철저한 겸손과 자기 비움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영적 빈곤함을 깨달아 '나는 주님 없이 마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진실하게 나올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교만에서 벗어나 주님께 나의 삶과 마음을 전부 맡기게 되고, 이때 '나'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바라보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 – 죄와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마음... 진정한 위로를 받는 사람
이에 이어 '애통'이 나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마 5:4)
우리는 흔히 ‘애통’이라는 단어를 매우 부정적인 상황과 연관 지어 떠올립니다. 누군가 울고, 슬픔을 겪고, 좌절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왜 애통이 복이 될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죄와 연약함, 불의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슬퍼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것이 곧 ‘애통’입니다.
애통은 단지 내 삶에 닥친 고난이나 슬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죄와 세상의 죄를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의 죄에 대한 통회가 없이는 온전한 회개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진심 어린 슬픔이 없으면, 죄를 미워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시에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여 함께 우는 것도 애통의 의미에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누군가와 함께 울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며 마음을 나누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슬퍼하고 우는 행위를 넘어서, 다른 이의 아픔까지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깊은 공감의 마음입니다. 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 모든 슬픔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마 11:28).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 애통할 때, 예수님께서 위로와 안식을 주십니다. 그 위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런 애통함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해지며, 다음 단계인 ‘온유’로 나아가게 됩니다.
‘온유한 자’ – 힘을 제어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사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마 5:5)
예수님께 위로받고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 애통함 속에서 회개와 회복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온유'라는 성품을 갖추게 됩니다.
온유의 참된 의미: 프라위스(praus)
온유의 헬라어 단어인 ‘프라위스’는 여러 의미 중에서 ‘길들여진 망아지’를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망아지는 원래 힘이 넘치고 제멋대로 뛰어다니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의 손에 의해 길들여졌을 때 그 힘은 무질서하게 흩어지지 않고, 주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집중하여 쓰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온유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힘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성경에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다”(민 12:3)라고 할 만큼 온유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에게 불만을 품었을 때, 모세는 개인적 감정으로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의탁하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할 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장면을 보고는 분노하며 그들을 질책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 역시 스스로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며 엄히 꾸짖으셨습니다(마 21:12-13). 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마 23:33)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은 'X새끼' 같은 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에 대한 모욕과 조롱은 참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죄가 범해질 때에는 거룩한 분노를 내보이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와 온유 - 언제 화를 내야 하나?
우리는 언제 화를 내야 할지, 누구를 위해 화를 내야 할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화를 낼 때, 내 감정이 상했음을 이유로 분노합니다.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내 이익을 침해했을 때 화부터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개인의 손해와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위해 힘을 쓰는 상태”입니다.
나의 감정이나 이익을 위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위해, 공의를 위해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절제된 태도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분별력 있게 화낼 줄 알고, 또한 무분별한 감정폭발은 삼가는 것. 이것이 온유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자이며, 예수님은 이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것 – 예수의 죽음을 통한 유산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업(유산)은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상속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라는 가장 귀하고 영원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단지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은 자로서” 살게 됩니다. 즉, 우리가 있는 가정, 교회, 직장, 사회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분노를 발하고,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 위로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고, 갈등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적용과 결단
1. 우리의 애통함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죄로 인해 애통해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내 중심의 슬픔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향해 흐르는 눈물을 흘리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2. 분노의 방향을 점검하자
- “나는 언제 화를 내는가?” “그 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점검해봅시다. 내 감정과 유익을 위해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위해 화를 낼 줄 아는 온유함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 받은 ‘기업’으로 살자
-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은 자입니다.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갈등이 있는 자리에도 하나님의 평강과 질서를 이루는 통로가 됩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맛보고, 또한 예비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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