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흔히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암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외우지만 '개인적' 신앙고백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본래 사도신경은 ‘공적 고백(public confession)’으로서, 세례와 연결된 공개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외울 때 눈을 감는 일은 개인 경건 생활이나 묵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본래 의도가 ‘내 믿음의 내용을 세상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분명히 밝히는 것’이라는 점을 놓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은 “나는 믿습니다(Credo)”라는 동사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믿는다’(credo)라는 말은 단순히 “불확실한 명제를 사실로 여기고 수긍한다”는 뜻이 아니라, ‘심장(마음)을 내어 준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즉, 자신의 모든 존재를 어디에 뿌리내리고 무엇을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를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마치 고대의 마법 주문처럼 조용히 암송하는 개인 기도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함께 선언하는 공동체적 언약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눈을 감지 않고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비로소 함께 그 신앙을 고백하는 이웃들이 보이고, 오래전부터 같은 비전을 품고 살아왔던 신앙의 선배들이 보일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이 고백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온 공적 유산이며, 오늘날에도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 Creatorem caeli et terrae.
- Et(Credo) in Iesum Christum,
-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 natus ex Maria Virgine,
- passus sub Pontio Pilato,
-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 ascendit ad caelos,
-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 Credo in Spiritum Sanctum,
-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 sanctorum communionem,
- remissionem peccatorum,
- carnis resurrectionem et vitam aeternam.
- Amen.
Symbolum Apostolorum
사도신경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에 유래한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은 66권 방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을 다 읽고 “하나님, 이거 제가 다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추려서 명확히 고백한 복이 바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이러한 것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은 선한 능력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우리는 그 무한한 근원에 친밀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연결을 망각했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욕망과 달리 거룩한 영에 이끌려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마리아라는 힘없는 여성은 간음한 여인으로 내몰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도 그 여린 몸으로 진리를 수용했지만, 빌라도라는 남성 권력자는 그 진리를 눈앞에서 보고서도 외면하고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그 권력자는 예수께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분은 세상이 닿을 수 없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들어 올려 하늘의 보좌에 앉히심으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과 평화, 섬김과 희생의 길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신 뜻 그대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회복시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를 불어넣어 주는 성령에 사로잡힌 가운데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미 장차 올 세상의 사람으로 한데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죄 된 삶을 돌이킬 기회를 얻었고, 새로운 생명을 맛보며 하늘과 연결되는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대문자), 예수 그리스도(대문자), 성령(대문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고 콜론을 찍고 이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고 콜론을 찍고, “성령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제일 첫 단락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제가 옛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2004년도에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에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세 번역본으로 만들었는데, 사도신경 원문에 있는 부분이 한국 사도신경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버전을 만들면서도 그 구절을 복원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새 버전이라고 해도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저는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 모두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옛 버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말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새 버전은 이렇죠.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주어 “내가”는 앞에 나왔는데, “믿는다”라는 동사는 제일 뒤에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에,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 원문에는 ‘믿는다’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믿습니다. 라틴어 동사는 인칭 어미가 문법적으로 뒤에 나오는데, 그 라틴어 순서 그대로 번역하면 “믿습니다. 누가? 내가.” 이렇게 해야 신앙 고백이 되지 않겠습니까?
‘믿는다’라는 동사가 라틴어로 “크레도(credo)”인데, 이 “크레도”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크레(cre)”는 심장이고, “도(do)”는 드린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뭔지 아세요? 내 믿음의 대상에게 내 심장을 드리는 것, 내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심장을 드립니다. 내 심장을 드립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어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떤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인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이게 첫 구절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사족이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붙이는 건 다 사족이에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가 뭐죠? 없음에서 있음이 있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미 있는 것을 모아서 합해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전능하시죠. 그분이 내 하나님이고 내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나를 지으셨기 때문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나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나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나의 백그라운드가 되십니다. 이 한 구절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X’가 있을 수 없죠. 하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사랑 'X' 윗부분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X' 아랫부분만 있는 거예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그분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로 구원자를 보내주셨는가? 하나님의 'X' 아랫부분이 예수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나는 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럼 뭘 믿는가?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걸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앙 고백하라고 하면 뭘 합니까? 제가 목회를 30여 년 하면서, 세례식을 할 때 세례 받는 사람들에게 신앙 고백문을 받지 않습니까? 거의 95% 이상이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표적”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을 믿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가신 것을 믿습니다. 떡 다섯 조각으로 5천 명을 먹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 믿음은 전부 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걸 믿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땅에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 이게 고백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너무너무 허전한 고백이죠? 이 고백의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본체가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X' 윗부분이죠. 그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내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는 재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X' 아랫부분입니다. 나는 흉한 죄인입니다. 나는 도덕·윤리적으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오라” 하실 때, 그 ‘다’ 속에 나까지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크리스토스”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분이 'X'의 삶을 살고 돌아가셨는데 부활 못 했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주가 아닙니다. 그렇게 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X'의 길을 살 수 있는 영원한 구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에 올라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사람을 심판하러 오신다. 그럼 심판의 기준이 뭘까요? “보자, 너는 'X'가 있니? 'X'가 얼마나 크니? 'X' 윗부분, 'X' 아랫부분의 비율이 같니?” 그 이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 평가하시겠습니까?
“나는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이 세상 온 물질이 다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이 보시는 건 “너는 학위가 높니? 스펙이 얼마나 좋으니? 네가 억대 헌금을 했니?” 그게 아닙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티아누스’로서의 삶을 살고 있니?” 이게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령님
마지막이 성령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 번째도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째도 “믿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래의 풀이는 문리적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로움이고 감동입니다. 문리적으로는 성령님이 내가 믿는 것의 우수마발(교회는 보편적이다. 성도의 교제, 내 부활과 영생 등) 중의 하나로 언급된 것 같거든요. 다른 분의 해석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모여서 거룩한 공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2천 년 전이라고 하면 주몽과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나던 시대인데, 우리가 그 이야기는 사실로는 안 믿으면서 2천 년 전에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예수라는 청년이 저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내 죄를 씻어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믿습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은혜 속에서,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믿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내가 흉측한 사고를 당해서 내 사지가 다 찢어져 죽든, 내가 타고 가던 배가 전복되어 큰 물고기의 밥이 되어서 죽든, 땅에 매장당해서 내 육체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화장을 해서 한 줌의 재로 끝나든 어떻게 되든, 마지막 날 썩어 들어갔지만 부활한다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 영원히 사는 걸 믿습니까?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믿습니다.
교회의 보편성 - Catholic Church
이런 이런 일을 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데, 그 성령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첫 번째 고백이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함을 믿습니다. 옛 버전에는 “거룩한 공회”라고 되어 있었는데, 2004년에 새로 번역된 새 버전은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되었습니다. ‘공회’를 ‘공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도가 무엇인지 “공(公)”이라는 한 글자에서 보입니다. 영어로 이야기하자면 ‘오피셜(official)’, ‘공식적인 교회’. 여기에 반하는 모든 교회는 ‘프라이빗’ 즉, 개인 전유물이라는 것입니다. 교단에 속해서 교단의 치리를 받는 교회가 공교회이고, 이 계보에 들어 있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정말 어떤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그런 교회는 공교회가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 번역입니다. 이 이후부터 각 교단마다 “교회는 공교회성을 강조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공교회라는 말은 틀린 번역입니다.
헬라어, 라틴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가톨릭.” 그걸 영어로 번역하면 “Catholic Church”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Catholic Church가 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근데 과거부터 “가톨릭 교회”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개신교회에서는 이 “가톨릭”함을 “유니버설”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이든 유니버설이든 뜻은 똑같습니다. “공교회(公敎會)”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력, 지역, 출신 배경을 떠나서 모두가 한데 어우러지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겁니다. 공교회의 거룩함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칼을 들어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야 된다는 열심당원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족의 등을 쳐서 자기 배를 불리는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칼을 들고 독립운동하는 시몬이 볼 때, 이 마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공적(公敵)입니다. 세리 마태가 볼 때, 칼을 들고 독립하겠다는 젊은 시몬은 천하대세를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이 둘은 결코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그늘에서 그들은 한 제자가 되고,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편적인' 공회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가 되어야 함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내가 속한 교회를 보편적인 교회로 만들 것을 맹세합니다'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2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 교인들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성전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사도행전 3장 이후로 쫓겨나고는 성전에서 예배를 못 드렸습니다. 이 집 저 집 흩어져 다니고, 더구나 박해가 터지고 나서는 숨어 다니면서 예배를 드렸죠. 그러나 거기에 사도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초대 ‘모(母)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중해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전초기지로 예루살렘 모교회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서 5대 도시에 속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예루살렘 중심에서 떨어진 변방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당신의 전초기지로 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그 안디옥 교회에 지도자들 명단이 나오는데, 요즘 말로 하면 당회원 명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몬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및 사울이라. 이렇게 다섯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첫 번째 이름은 바나바, 정통파 레위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니게르라 하는 시몬. “니게르”는 영어로 따지면 “블랙”하고 달라요. 블랙은 얼굴빛이 검은 사람이라는 표현이지만, 니게르는 흑인 노예를 일컫습니다. 2천 년 전은 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고, 노예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흑인 노예 출신이 예수를 믿었는데, 안디옥 교회 당회원이 되는데, 정통파 레위인과 똑같이 당회원이 됐단 말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세 번째 인물은 루기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리비아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리비아 출신으로 이름이 “루기오”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습니다. 구레네가 지금의 리비아거든요. 그런 무명의 이방 출신도 안디옥 교회 당회원이 되었습니다. 네 번째가 분봉왕 헤롯의 동생 마나엔입니다. ‘동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트로포스(trophos)’는 한 어머니의 젖을 빨고 같이 자란 형제를 의미하기도 하고, 우리말로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던 죽마고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나엔이 분봉왕 헤롯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인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트로포스’라고 불렸다는 건 분봉왕 집단과 똑같은 상류 계층의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유대인들이 보기에 분봉왕 헤롯은 로마 제국에 빌붙어서 동족을 등쳐 먹는 매국노입니다. 일제 치하 시대로 따지자면 이완용의 동생이 당회원이 된 겁니다. 이완용과 똑같이 살던 사람이 당회원이 된 거예요.
마지막 다섯 번째 사람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바울의 예전 이름이죠. 예수 믿던 사람들을 짓밟던 폭도 아닙니까? 이 사람도 회개하고 당회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 이 다섯 명만 보면 'X' 아랫부분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가톨릭,” 보편적인 교회를 이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계 복음화의 전초기지로 삼으신 것,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교회라면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진 자로 찾아가 복음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그 핵심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X'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을 내가 믿고,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늘도 내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나로 하여금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뜻을 알고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이 땅의 모든 교회는 'X' 아랫부분의 구현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서울에서는 이렇게 자랑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이 다 수준이 높아서 정말 좋은 교회예요.” 그거 교회 아닙니다. 그건 사교(社交) 클럽입니다. 빈부귀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부 다 석사 이상 학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한다.” 교회 아닙니다. 무학(無學)도 그 교회 장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가면 경상도에서 이민 간 사람들이 선호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이민 간 사람들이 선호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거 교회 아닙니다. 예전에 ‘연예인 교회’라고 있었죠. 교회 아닙니다. 보편적인 교회여야 하는데, 연예인만 와라? 연예인 교회가 세워지고 나니까 체육인 교회도 생겼습니다. 교사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선교회로는 될 수 있지만,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사 교회, 체육인 교회, 제가 알기로는 다 없어졌습니다. 연예인 교회도 이름을 바꿨죠. 예능 교회라고.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았거든요.
사도신경이 진정한 우리 매일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도신경을 행사 때 외우는 주문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셔서 그 숱한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왜 그건 다 제외됐는가? 모든 종교에 다 이적 이야기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종교든 그 종교가 표방하는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놓고 'X'를 구현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어느 신이 그렇게 했습니까? 그래서 이 'X'만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표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고백하고, '나도 오늘도 이 한 주간도 주님 본받아서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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