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해가 되면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를 데리고 (대중) 목욕탕을 가곤 했습니다. (아마도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기고 개운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는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욕탕을 가는 것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끝나고 나서 먹는 '바나나 우유'였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면 항상 보이는 안내 문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분실물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목욕탕 주인 백)”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귀중한 물건을 맡긴 다음에 안심하고 목욕을 하듯이, 새해를 처음 시작하는 우리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025년도는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처음 경험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할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심을 믿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시고 친히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복덩이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2025년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륜교회 2025년 표어)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복의 근원, 복의 출발, 복의 통로, 복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에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바로, “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사람은 창조되자마자 하나님의 복으로 시작했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이 땅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이후에 가장 먼저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우리가 단순히 복을 많이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아닌가요?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복입니다.” “당신은 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복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를 복으로 부르셨던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서, 2025년이라는 새로운 해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누어 보려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복된 삶으로 초대받은 아브라함이 어떠한 배경에서 복으로 선택되었는가, 그 경위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바벨탑을 지었던 사람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왜 복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음성을 듣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인생 방향 - 동쪽으로 가다
첫 번째로, 이들의 인생의 방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Q. 언어(language)와 말(speech)은 어떻게 다른가?
A. 창세기 11장 1절에서 언어(שָׂפָה/saphah)와 말(דָּבָר/dabar)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 언어(שָׂפָה/saphah)
히브리어 '사파'는 원래 '입술'을 의미하며, 말을 하는 방식이나 발음 체계를 가리킵니다
언어의 형식적인 측면, 즉 말을 사용하고 연결하는 체계와 법칙을 의미합니다
지역에 따른 사투리나 발음의 차이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말(דָּבָר/dabar)
히브리어 '다바르'는 실제로 발화되는 내용이나 개념을 의미합니다
언어의 실질적인 내용이나 의미를 나타냅니다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구체적인 단어나 표현을 가리킵니다
* 결론 :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인류가 '완전히 동일한 언어 체계와 의사소통 내용'을 공유했음을 나타냅니다.
. 단순히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넘어서, 발음 체계와 의미 체계가 모두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모든 사람이 죽고, 노아의 가족으로부터 다시 인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언어가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한쪽 방향으로 이동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 방향은 동쪽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이동하던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동방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방’으로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케뎀(qedem, qedmah)”입니다. 이 단어는 ‘동쪽으로’, ‘동편으로’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성경에서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 이 “케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등장하는데, 모두 ‘죄인들이 가는 방향’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그들은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동편을 통해 점점 동쪽으로 쏠리는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막으신 것이죠. 그 후 사람들이 죄악 된 방향으로 걸어갈 때,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영화 '에덴의 동쪽' 제목의 유래)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이 아우인 아벨을 죽였습니다. 창세기 4장 16절 말씀에 보면,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땅 놋(Nod. 방랑)”으로 가게 됩니다.
또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던 롯이 갈라지게 되는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13장 1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 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소돔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를 살펴보면, 동쪽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했던 것입니다.
성막을 만들 때도 문은 동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동쪽으로 갔던 사람이 성막 안으로 들어오려면 동쪽 문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지을 때 문 자체를 동쪽으로 두어, 그리로 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게 한 것이죠.
그런데 노아의 가족을 통해, 하나님이 큰 홍수를 통해 이 땅의 죄악을 심판하셨고, 노아 가족을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동쪽으로) 인생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인생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같은 힘으로 날아가도, 아주 미세한 방향 차이에 따라 파울(foul) 볼이 되기도 하고 홈런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복된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출발은 “내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아멘. 내가 가진 것이 많으냐, 준비된 것이 많으냐, 어떤 힘이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달려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리가 좀 부족해도, “복”이라는 방향으로 몸이 기울어져 있어야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방향이 복이신 하나님께 기울어져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만 복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새해가 밝았습니다. 시간이 벌써 지나 5일째가 되었습니다.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벌써 5일이 지났구나.
찬송가 543장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Trusting as the moments fly, Trusting as the days go by, Trusting Him, whate’er befall, Trusting Jesus, that is all.
https://governance.tistory.com/394832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식어지고,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과 더 멀어지기만 한다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방향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것이 복의 출발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생의 동기 -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탑을 쌓았다.
첫 번째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탑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쌓았던 첫 번째 동기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to make us a name)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의 인생에 남아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몰입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길어봐야 얼마 살지도 못하면서, 이름 하나 남기려고 애쓰고 살아가니, 얼마나 허망합니까?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란, 남들보다 더 높은 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바벨탑이 계단식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지역에 세워졌던 탑들, 즉 지구라트(Ziggurat)가 이런 계단식으로 지어졌고, 현재도 유적지에 가 보면 그러한 탑을 볼 수 있습니다. 계단식 모양으로 한 층 한 층 쌓아 올렸는데, 남들보다 더 높이 쌓으면 그만큼 권력과 힘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학자 가운데 '필로(Philo)’라는 사람은, 이 바벨탑을 지을 때 벽돌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만큼 탑을 보며 자기 이름이 남겨지길 원했다는 것이죠.
특히 고대 바벨론 지역에 있는 저런 탑의 꼭대기는 제사를 지내는 ‘산’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세울 때에는 한 가지 의도가 더 있었습니다. 4절을 다시 보면,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즉 그들은 하나님처럼 동등한 위치로 올라가고자 했습니다. 탑을 쌓아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벽돌을 아무리 높이 쌓아도, 그 끝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원래는 자연석을 이용해 탑을 쌓았기 때문에 일정하게 높이 쌓을 수가 없었는데, 3절 말씀처럼 벽돌을 굽는 기술이 생기니까 이전보다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진흙(mortar)이 아니라 역청(tar)을 사용하니 서로 더 잘 붙고 방수 기능도 있었기 때문에, “이젠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겠다!”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역청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때 방수 효과를 위해 알려 주신 기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료를 가지고, 지금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이 탑을, 혹시라도 또 다른 홍수가 올까 봐 대비해서 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 것이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마음을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웠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벽돌 몇 장 더 쌓고, 기술이 조금 늘었다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의학이 조금 발달했다고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작은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조금 알았다고 “사람의 성(性)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했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과 나란히 서서 선악을 판단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받고, 에덴 동편으로 쫓겨났던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날 땅에서 또 다른 ‘선악과’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탑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나란히 동등한 위치에서 선악을 다스리자...'라는 교만한 인생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패망밖에 없습니다.
잠언 16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패망밖에 없습니다. 복을 받기 원한다면 교만을 꺾어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본질적인 악, 최고의 악은 교만이다. 그에 비하면 부정, 탐욕, 술 취함 그리고 그 외 모든 악은 새 발의 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으로 모든 죄가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물을 내려다보며 멸시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멸시하고 내려다보는 한, 자기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높은 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여겼지만, 정작 자기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영적 눈이 감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새해에는 우리의 모든 이름을 지우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이름만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아름다우시고 선하십니다. 그 이름을 붙잡으면, 하나님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우리 인생을 덮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둘째, 흩어지지 않기 위해 탑을 쌓았다.
두 번째로, 이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탑을 쌓은 두 번째 이유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에 충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흩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노아 홍수 이후에도 노아에게 다시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9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똑같은 명령을 주신 것이죠. 그런데 바벨탑을 쌓았던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흩어지는 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보호자가 없기에 흩어져서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흩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떠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높은 탑을 쌓으면 사람들이 무서워해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곳에만 머무는 고인 물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열방으로 흩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이 어디든지 함께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저는 오륜교회와 성도님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만 복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길 원하시는 복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달래고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을 쌓고 ‘탑’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바벨탑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가인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4장 16~1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노드 땅에 거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 가인이 성을 건설하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을 떠났고, 의도적으로 동편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간 것이죠. 그러다가 노드 땅을 만나 거기서 정착합니다. 그런데 ‘노드’라는 이름의 뜻이 ‘유리함’, 즉 방황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내적 평안은 좋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에서 옵니다. 가인은 놋(Nod) 땅에서 여전히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인 에녹(Enoch, 히 Chanok 하노크)을 따서, 그 성을 ‘에녹성’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성을 쌓았을까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 14절을 보면, 가인이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주께서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라고 고백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존재적인 불안 때문에, 자기를 지키려고 성을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모 세대가 가진 두려움을 자녀에게도 물려준 것이죠.
“더 높게, 더 단단하게 성을 쌓아야 안전한 인생을 살 수 있어.” 하는 불안을 다음 세대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넘겨준 것입니다. “좋은 대학 가야 해, 돈이 있어야 해, 너무 착하면 무시당해.”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에녹성’을 물려준 것이죠.
그러나 그 성이 진정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요? 가인이 쌓은 에녹성도, 바벨탑도 결국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2025년을 시작한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입니까, 가까워지는 방향입니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흩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만을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우리 삶 속에 바벨탑이 세워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에녹은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성경에는 두 명의 ‘에녹’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에녹은 가인의 아들입니다. 그는 평생 성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두 번째 에녹은 아담의 칠대손 에녹입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수는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아담의 일곱 번째 자손이라는 말은, 약속의 자손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창세기 5장 22~2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 아멘.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아담의 칠대손 에녹은, 평범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딱 두 가지밖에 기록이 없습니다.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마치 1년이 365일이듯, 그는 1년 365일을 하루같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아멘.
한 해의 첫 주일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데, 우리도 나머지 360일 넘는 시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우리도 방향, 속도, 마음이 하나님과 일치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맞아야 합니다. 첫 번째,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방향이 다른데 동행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속도”가 같아야 합니다. 방향은 같은데 속도가 다르면 함께 걷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마음”이 합해야 합니다. 방향도 같고 속도도 같아도, 서로 싫어하면 동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 하나님과 방향이 일치했고, 속도도 맞췄으며,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였습니다. 속도가 빠르든 늦든, 어느 곳을 가든지, 모든 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에녹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제단을 쌓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왜 하필 아브라함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이동 방향은 동쪽에서 서쪽으로입니다. 그는 바벨론 땅에서 부름 받아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동해 갑니다. 그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삽니다.
가는 곳곳마다 ‘탑’을 쌓는 대신 ‘제단’을 쌓아 올립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해, 바벨탑이 아닌 제단을 쌓는 사람. 그가 바로 복으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한 해를 복되게 살기 원한다면,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 가까워지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걸어가는 모든 길에서 바벨탑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쌓아 올리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찬양과 기도 - 민수기 6장 24~26절
찬양. 하나님의 약속 by 김석균 목사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 원하노라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네 삶 속에서 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리
땅의 기름진 것으로,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너를 복 주시고 지키실 하나님이
너의 영혼 잘되도록 은혜 베푸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시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땅에 기름진 것으로,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 주시옵소서. 아멘.
그러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 방향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겠습니다.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걸어가는 모든 날 동안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제단을 쌓아 올리는 인생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말 복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그 만복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으신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복’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제단을 쌓으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머리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항상 함께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https://youtu.be/Yza-vZ3WfZY?si=kngmEmwW5BC6ts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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