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출발점, '구원'
여러분께서 생각하고 계신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왜 기독교만 이렇게 다른 종교에 비해 구원을 강조하고, 또 독특한 구원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는 모든 신앙 행위의 시작은 사실 기독교에서는 ‘구원론’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첫 단계부터 너무나 대충 넘어가 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래,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빠르게 진행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현상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빨리 학습을 주고, 빨리 세례를 준 뒤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은 ‘최근’에야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주의의 간소화, 그리고 그 한계
복음주의가 형성되면서, 복음주의의 캐치프레이즈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자”였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님의 길을 예비하자는 것이지요. 그것 자체는 훌륭하고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 복음을 빠르게 전하려다 보니 복음을 더욱 간단하고 간결하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지하철 전도나 청년들과 전도, 선교지 전도 등을 해 보면, 상대방과 3분 정도밖에 대화할 시간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복음의 핵심만 아주 간단히 “딱딱딱” 전하게 되는데, 그 현장에선 그것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다르지 않습니까? 내년에 교회를 떠날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이어가실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도 늘 3분짜리 복음만 제시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체계적으로 쌓으며 성장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간단화된 복음 제시 방식이 교회 안에 문화로 자리 잡고, 또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 등과 맞물리면서 “구원”에 대해 까다롭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 세계 복음화를 향한 열정은 복음의 간소화를 낳았고,
- 결과적으로 3분 복음 같은 짧은 메시지가 교회 안에서도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이들에겐 깊이 있는 복음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죄로부터의 건짐
구원이라는 것은 “건져냄을 받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누군가가 끄집어내 주는 것,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까? 흔히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대답하기 쉽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못박아 두었습니다. 즉, 죄로부터 건져내심을 받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건져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죄’는 단순한 행동의 결과가 아닌, 내 안에 자리 잡은 지배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많이 말하지만, 사실 복음은 먼저 “죄가 무엇인지”부터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깨닫도록 돕고, 그 후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올바른 순서가 됩니다.
구원의 첫 과정은 ‘각성(覺醒)’입니다.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내가 죄의 지배 아래에 있구나. 이게 참 비참한 상태이구나” 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죄의 실체를 깨달아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죄와 죄들: sin과 sins의 구분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내 영혼 안에 독립된 개체로서 자리 잡은, 하나의 경향성’을 뜻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등에서 말하는 바로 그 ‘죄’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합력하여 악을 이루려는 강력한 비전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악한 행동들을 성경은 “죄들(sins)”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의 죄(sin)’에서 무수한 ‘죄들(sins)’이 뻗어나오는 구조입니다.
‘죄(sin)’는 나무, ‘죄들(sins)’은 그 열매입니다.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 Sin (원죄, 본성적 죄): 인간이 타락 이후 본질적으로 가지게 된 죄의 뿌리, 즉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죄는 ‘행위’라기보다 ‘존재의 상태’이며,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Sins (개별적 죄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잘못된 생각, 말, 행동을 의미합니다. 탐욕, 거짓, 교만, 음란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죄들은 sin이라는 뿌리에서 비롯된 ‘열매’입니다.
다른 종교들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보통 “너는 그릇된 행동을 했으니 죄를 지었다”며, 그 죄를 씻기 위해 이런저런 속죄 의식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네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과나무를 예로 들겠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서 수백 개의 사과가 열립니다. 그 수많은 사과(열매들)를 “죄들(sins)”이라 한다면, 나무 자체는 “죄(sin)”에 해당합니다. 땅이 비옥하면 더 많은 사과가 열리고, 땅이 척박하면 몇 개 열리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죄들의 열매’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대형 악행을 해 본 적 없는 분들은 “내가 정말 죄인인가?” 하고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술이나 담배 등의 특정 행위를 끊는 문제만 죄와 싸우는 것으로 좁혀 보면 안 됩니다. 어떤 행위를 끊는다고 해서 내 안의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다른 모양으로 언제든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 = 행위’가 아니라, ‘죄 = 나를 지배하려는 독립된 개체’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 죄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죄의 실체’이며, 더 나아가 그 죄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참된 회개의 출발점이 됩니다.
죄와 함께 멸망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죄는 내가 아니라 내 영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사랑하며 죄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를 영원히 멸하실 것인데, 죄와 끝까지 한몸으로 살겠다고 매달리는 사람 역시 죄와 함께 멸망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너는 천국, 너는 지옥” 식으로 임의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지 않으면 죄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구절을 보면, 죄가 “열심히 자기 역할을 수행”한 뒤에 받게 되는 월급(삯)이 “사망”이라는 뜻입니다. 그 죄가 최후의 심판 때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을 때, 죄를 붙들고 함께 살기를 고집한 이들은 함께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또 지금의 설교자들을 통해 “죄를 버리라, 그 죄를 미워하라”고 외치게 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고, 복음의 호소입니다.
죄의 지배에서의 해방, 그러나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죄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죄로부터 ‘놓임을 받는다(해방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풀려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극단적으로 해석해 구원파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으며, 이제 거듭난 내가 자유롭게 되었으니, 죄도 다시 나를 지배하려고 싸움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죄가 주는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의 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즉, 죄를 끊고자 하는 싸움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내주, 신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
그 싸움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거듭난 신자에게 성령의 내주(內住)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의 최고의 복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를 받지 못했기에, 죄와 싸워도 자력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고, 대체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모시게 되었고, 그분이 죄와 싸우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죄와 싸우며 걷는 거룩의 길 기독교의 거룩은 죄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를 이겨내는 삶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행위를 바꾸려는 것은 끝없는 종교적 부담을 초래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거룩’이며, 그 길을 걷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신앙생활을 고행하듯이 “술 끊었다, 담배 끊었다, 이제 또 다른 것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만 접근하면, 끝없이 종교적 부담감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 자체를 미워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죄를 깨닫는 것이고, 그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며, 성령의 내주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완성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정리하자면,
1) 죄와 죄들(sin과 sins)을 구분하고,
2) 죄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며,
3) 죄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참된 구원과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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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첫 단계부터 너무나 대충 넘어가 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래,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빠르게 진행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현상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빨리 학습을 주고, 빨리 세례를 준 뒤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은 ‘최근’에야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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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분은 다르지 않습니까? 내년에 교회를 떠날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이어가실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도 늘 3분짜리 복음만 제시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체계적으로 쌓으며 성장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간단화된 복음 제시 방식이 교회 안에 문화로 자리 잡고, 또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 등과 맞물리면서 “구원”에 대해 까다롭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 세계 복음화를 향한 열정은 복음의 간소화를 낳았고,
- 결과적으로 3분 복음 같은 짧은 메시지가 교회 안에서도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이들에겐 깊이 있는 복음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죄로부터의 건짐
구원이라는 것은 “건져냄을 받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누군가가 끄집어내 주는 것,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까? 흔히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대답하기 쉽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못박아 두었습니다. 즉, 죄로부터 건져내심을 받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건져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죄’는 단순한 행동의 결과가 아닌, 내 안에 자리 잡은 지배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많이 말하지만, 사실 복음은 먼저 “죄가 무엇인지”부터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깨닫도록 돕고, 그 후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올바른 순서가 됩니다.
구원의 첫 과정은 ‘각성(覺醒)’입니다.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내가 죄의 지배 아래에 있구나. 이게 참 비참한 상태이구나” 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죄의 실체를 깨달아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죄와 죄들: sin과 sins의 구분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내 영혼 안에 독립된 개체로서 자리 잡은, 하나의 경향성’을 뜻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등에서 말하는 바로 그 ‘죄’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합력하여 악을 이루려는 강력한 비전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기인하는 수많은 악한 행동들을 성경은 “죄들(sins)”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의 죄(sin)’에서 무수한 ‘죄들(sins)’이 뻗어나오는 구조입니다.
‘죄(sin)’는 나무, ‘죄들(sins)’은 그 열매입니다.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 Sin (원죄, 본성적 죄): 인간이 타락 이후 본질적으로 가지게 된 죄의 뿌리, 즉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죄는 ‘행위’라기보다 ‘존재의 상태’이며,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Sins (개별적 죄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잘못된 생각, 말, 행동을 의미합니다. 탐욕, 거짓, 교만, 음란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죄들은 sin이라는 뿌리에서 비롯된 ‘열매’입니다.
다른 종교들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보통 “너는 그릇된 행동을 했으니 죄를 지었다”며, 그 죄를 씻기 위해 이런저런 속죄 의식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네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과나무를 예로 들겠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서 수백 개의 사과가 열립니다. 그 수많은 사과(열매들)를 “죄들(sins)”이라 한다면, 나무 자체는 “죄(sin)”에 해당합니다. 땅이 비옥하면 더 많은 사과가 열리고, 땅이 척박하면 몇 개 열리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죄들의 열매’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대형 악행을 해 본 적 없는 분들은 “내가 정말 죄인인가?” 하고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술이나 담배 등의 특정 행위를 끊는 문제만 죄와 싸우는 것으로 좁혀 보면 안 됩니다. 어떤 행위를 끊는다고 해서 내 안의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다른 모양으로 언제든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 = 행위’가 아니라, ‘죄 = 나를 지배하려는 독립된 개체’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 죄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죄의 실체’이며, 더 나아가 그 죄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참된 회개의 출발점이 됩니다.
죄와 함께 멸망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죄는 내가 아니라 내 영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사랑하며 죄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를 영원히 멸하실 것인데, 죄와 끝까지 한몸으로 살겠다고 매달리는 사람 역시 죄와 함께 멸망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너는 천국, 너는 지옥” 식으로 임의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지 않으면 죄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구절을 보면, 죄가 “열심히 자기 역할을 수행”한 뒤에 받게 되는 월급(삯)이 “사망”이라는 뜻입니다. 그 죄가 최후의 심판 때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을 때, 죄를 붙들고 함께 살기를 고집한 이들은 함께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또 지금의 설교자들을 통해 “죄를 버리라, 그 죄를 미워하라”고 외치게 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고, 복음의 호소입니다.
죄의 지배에서의 해방, 그러나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죄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죄로부터 ‘놓임을 받는다(해방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풀려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극단적으로 해석해 구원파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으며, 이제 거듭난 내가 자유롭게 되었으니, 죄도 다시 나를 지배하려고 싸움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죄가 주는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의 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즉, 죄를 끊고자 하는 싸움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내주, 신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
그 싸움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거듭난 신자에게 성령의 내주(內住)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의 최고의 복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를 받지 못했기에, 죄와 싸워도 자력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고, 대체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모시게 되었고, 그분이 죄와 싸우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죄와 싸우며 걷는 거룩의 길 기독교의 거룩은 죄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를 이겨내는 삶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행위를 바꾸려는 것은 끝없는 종교적 부담을 초래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거룩’이며, 그 길을 걷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신앙생활을 고행하듯이 “술 끊었다, 담배 끊었다, 이제 또 다른 것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만 접근하면, 끝없이 종교적 부담감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 자체를 미워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죄를 깨닫는 것이고, 그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며, 성령의 내주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완성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정리하자면,
1) 죄와 죄들(sin과 sins)을 구분하고,
2) 죄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며,
3) 죄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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