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런던 다리 위로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위로 죽음이 드리웠다는 것을 미처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리는 엘리엇의 시처럼 황무지 같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신구약중간기의 황무지같은 암울한 현실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일깨우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소위 ‘수면제 구간’이 있습니다. 모세오경 중에는 레위기가 그렇고, 또 역대상하도 그렇습니다.
왜 역대기에는 족보가 지루하게 나오는 걸까요? 비슷한 구간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당시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동시에 ‘복음’이라는 의미, 그리고 ‘교회’라는 의미도 살펴볼 겁니다. 신학자 김세윤 교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성경이 누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기록했는가?’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놓친다면 성경은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뿐입니다.
마태복음은 대략 주후 80년 무렵, 흩어진 성도들을 위해 마태가 쓴 서신입니다. 그 성도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독자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을 얻으려 했던 '유대전쟁'이 주후 66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킵니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추방하고,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이 시기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 시대였고, 로마 제국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핍박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유대전쟁 이전부터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후 80년 무렵을 살아가던 유대인 기독교 성도들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로도 괴로운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현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중의 올무가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던졌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우리에게 ‘회복’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할 겁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지조차 느끼기 어려운 절망의 늪을 통과하는 우리들이 던지는 질문과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들은 이중삼중으로 처참하고 절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겁니다. 이런 질문은 수백 년간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를 거쳐왔던 유대인들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전 516년, 학개·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제2성전이 재건되죠.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삶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뚜렷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황폐한 유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담하고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땅은 양극화 현상도 심해서, 만만치 않은 삶이 계속되었죠. 이런 절망의 정서는 말라기,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역대기 족보
이때 기록된 성경이 바로 역대기입니다. 역대기에 등장하는 아담부터 시작된 족보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기가 말하는 족보입니다. 그렇다면 역대기는 포로에서 귀환했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자기 자신을 보면 무척 초라하고, 현실은 아무 희망도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어요. 그런 세대에게 제시한 것이 바로 ‘족보’였습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다’라는 내용을 보여 줌으로써 “여러분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담부터 이어지는 혈통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무엘서나 열왕기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연약한 모습도 드러내지만, 역대기에서는 성전 건축과 제사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부터 이어지는 족보, 그리고 성전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비록 지금의 제2성전이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고 형편없어 보이더라도,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과 함께하셨듯이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약속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기를 대하던 유대인들이 얻었던 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족보
그렇게 포로 귀환 이후 500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 사이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여전히 현실은 힘겨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약시대에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나 현실이 개선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기나 싶더니, 그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이후 현실은 더더욱 절망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주후 80년대를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 시대에 계신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반복된 시기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갈라디아서 등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를 믿어도 현실에 나아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예수 믿기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회의를 가진 이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쓴 서신이 히브리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글을 써내려간 사람이 마태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하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리고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를 거치고, 다윗부터 (역대기 수신자들이 살던) 바벨론 포로 시기까지 14대, 또 바벨론 포로 시기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해서 세운 제2성전이 아무리 초라했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함께하시고, 그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80년에 그 제2성전조차 파괴되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신전’, 다시 말해 ‘성전’으로 삼으시고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약속이죠. 그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 제2성전과 동일하게 우리라는 성전에 거하시며 함께하신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며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으시려는 계획을 세우셨고, 그 결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계획을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보면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중간기와 무관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300년 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유대 사회는 헬라(그리스) 문화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전 63년에는 로마 지배를 받게 되니, 유대인들은 300년 넘게 헬레니즘 문화의 지배를 받은 셈입니다. 알렉산더에 의해 전 세계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쓰고, 그리스 문화와 사상이라는 단일 문명권 속에 들어갑니다. 드라크마(그리스 화폐) 같은 통화도 통용되면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민”이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런 시기에, 세계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히브리 성경(구약)이 번역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퍼져 나갈 준비가 갖추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계승한 로마 제국은 어떨까요?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고, ‘황제의 신민’이 되며,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는 자유민을 ‘로마 시민’이라고 했죠. 많은 역사학자들은 “현대 미국 시민권보다도 로마 시민권이 훨씬 우월하고 강력했다”라고 말합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에게 상소할 수도 있었고, 황제가 시민의 보호와 책임을 졌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퇴역하면 노후를 로마가 책임졌고, 굶주릴 때도 로마가 도왔습니다.
복음 - 로마의 새 황제의 즉위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새 황제가 즉위하거나 승리를 거두었을 때, 황제의 전령들은 그것을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라고 외쳤습니다. 황제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울리던 소리였죠.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곳에 임한다”라는 선언을 가리켜 유앙겔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당시에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과 복음이라는 의미는 “기도 응답”이나 “죽으면 천국에 간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엄청난 선언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가슴 벅찬 선언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태는 족보를 제시하고,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계속 강조하며, 마지막(마태복음 28장)에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라는 약속을 기록합니다. 바울도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교회 - 에클레시아
임마누엘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이 된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들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고, 원하는 신을 섬길 수 있고, 일정한 권리를 누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정치 영역에는 여성, 어린이, 노예, 외국인은 배제되었고, 자유민만 모여서 폴리스(도시국가)를 운영했습니다. 이 공동체를 “민회”라고 불렀는데, 로마 시대로 가면서 황제의 통치 개념이 추가되어, 자유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어 에클레시아로 모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로마 시대에 “에클레시아(ecclesia)”는 ‘여성과 어린이, 노예, 외국인을 배제한’ 공동체였고, 책임지는 개념이 담긴 단어였습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 많은 어휘 중에서 바로 ‘에클레시아’를 선택해 썼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교회”가 됩니다. 당시에 에클레시아는 지배층 남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였지만, 바울은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에클레시아”라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3장 내용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기록된 이유가 바로 그들에게 이렇게 큰 의미였던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 복음, 교회 어휘 뜻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
“과연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실까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맞을까요?”라는 질문은 2,500년 전 포로로 귀환했던 백성들에게도, 2,000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반복되는 질문입니다. 새벽마다 이런 질문을 안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퇴근길에 몸을 싣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결코 여러분이 믿음이 없거나, 죄가 있어서이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수백, 수천 년 전 유대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그런 마음을 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전 삼아 함께하실 것이고, 옛날에 성전을 통해 예배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https://youtu.be/Z2MQnCNiAeI?si=HDawAE5qlF4c3Z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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