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구하면 다 응답해주신다는 특권을 주신 이유는? 진짜 다 응답해 주시는가? 당신은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도 먼저 세 가지 질문을 여러분들께 드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14절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행할 것이다. 다 응답해 줄 것이다.”라는 말씀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다 응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엄청난 특권 아닙니까? 근데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이런 특권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다 시행하리라. 다 응답해 줄게.”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진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응답이 됩니까? 여러분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었다, 평생 예수님께 기도한 모든 기도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응답되었다고 고백하는 분이 있으면, 그 사람은 100%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이렇게 “뭐든지 기도해라, 내가 다 응답해 줄게.”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 번째 질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14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너희들이 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으로 살아라.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만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까?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예배드리고 평생을 기도했는데,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지금 살고 있지 못하다면 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기도는 개인적인 소원에서 시작해 다른 이를 위한 중보로 확장되고, 주님과 동행하며 필요한 것을 맡기는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 세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떻게 진전되어 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한센병 환자의 치유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나병 환자, 한센병자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을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지금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예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 이제 방금 산에서 주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 사람들이 지금 주님을 따릅니다. 나병 환자로서는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공개 장소입니다.
옛날에 나병 환자는 불치병 아닙니까?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반드시 격리된 장소에 수용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마을 속에 살면 다른 사람에게 다 전염시키니까요. 그런데 나병 환자가 수용소에 있어야 할 율법을 어기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개 장소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경고를 줍니다. “너 들어가라.” 그런데 안 들어가면 돌로 쳐 죽입니다. 왜냐하면 나병이 전염되지 않은 모두를 보호하기 위함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계신데 한두 사람이 예수님 곁에 있다 해도 나병 환자는 그 앞에 나갈 수 없는데, 지금 예수님 옆에 수많은 군중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나병 환자는 반드시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2절입니다.
“한 나병 환자가 나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 나병 환자는 돌에 맞아 죽으면 죽으리라, 이겁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불치병인 나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나가서 주님 앞에 간구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내 속에 문드러지는 이 문둥병이 새롭게 소생될 수 있습니다. 좀 고쳐 주십시오.”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이 한센병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냥 말만 하셔도 되는데 그 썩어 문드러져 가는, 고름 투성이의 그 환처에 당신의 손을 갖다 댔습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그 순간에 썩어 문드러지는 이 살이 깨끗하게 소생한 겁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하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건 불치병이에요. 썩고 문드러집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격리된 장소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야 해요. 그런데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아가서 간구를 했더니, 고름 투성이의 살이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하게 소생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말려도 “예수님이 나를 깨끗하게 해주셨다!”고 춤을 추면서 동네방네 다니며 소리소리쳐서 외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지 않습니까? “너 이제 병 나았지? 내가 누군지 알지? 너 나가서, 너 병을 고쳐 준 사람이 나 예수라고 간증하고 다녀라.” 그래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내가 너를 깨끗하게 고쳐 주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내가 너를 이렇게 고쳐 주었다는 거,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만 제사장을 찾아가라. 그리고 율법에 정해진 예물을 바쳐서 제사장에게 네 몸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입증받으라.” 왜냐하면 예전에는 제사장이 의사의 역할도 같이 행하였습니다. 누군가 마을에 사는데 “제사장님, 저기 저 사람 살이 허옇게 변하면서 뭐가 이상해집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가서 봅니다. “오, 너 한센병 걸렸구나. 너는 지금부터 격리되어서 수용소에 들어가.” 그러면 못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서 한 사람이 나았다면, 이 사람이 낫기 때문에 이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도 좋다는 공지를 제사장이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사장을 찾아가서 네가 나았다는 것을 입증받아서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하거라.
그러나 내가 너를 고쳐 줬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간의 육체의 병만 고쳐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실 뿐더러, 내가 내 소원을 주님 앞에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은 기도의 최종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든지 나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을 받고 문제 해결함을 받는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문제를 예수님에게 아뢰고,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셔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이 영적인, 신앙적인 경험이 없으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문제가 해결받을 때부터 그분은 나의 주님이 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육체적인 건강 문제 때문에 교회 문턱을 넘어서서 세례받은 교인이 되고, 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것은 기도생활, 신앙생활의 ‘동기’일 뿐이지 이것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기도해서 물질적인 빈곤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그러실 겁니다. “너, 아무에게도 가서 이 말하지 말거라.”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 문제가 한 번 해결되었다고 해서 일평생 기도할 때마다 내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대상으로서 주님을 상대하고 기도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미신과 구별되지 않게 됩니다. ‘복(福) 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미신은 말이죠, 내 주머니에 있는 돈 혹은 나의 재능으로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는 겁니다. 신앙은 내가 믿는 신은 절대로 내가 달래고 얼럴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 신이 원하는 삶을 내가 살기 위해 그 신 앞에서 부단히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강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뭐든지 내 욕심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병 환자가 자기 육체가 깨끗해졌는데, 평생 그 수준에 머물러서 평생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 신앙생활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겠습니까? 그의 기도생활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위에서 “평생 기도하신 분”이라는 분들 계시잖아요. “기도에 용하다”는 권사님들도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런 분들일수록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이 ‘나병 환자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만 기도하고 쟁취하면서, 안 이루어지면 또 금방 원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내 문제를 놓고 주님을 찾는 것은 좋은 신앙의 동기이고, 내 문제를 놓고 주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기도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 기도는 반드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위한 간구
그다음 단계가 ‘백부장’ 단계입니다. 두 번째 인물이죠.
5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와 간구하여.”
2천 년 전 예루살렘에는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 제국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작게는 5천 명, 많게는 6천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을 다스리는 장교 아닙니까? 그러면 로마 제국이 군대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으니, 군대가 권력의 총집합체입니다. 그런데 그 5천, 6천 명이 주둔하면서 한 나라를 식민 통치하는 권력의 총집합체인 그 군대에서 백부장은 1%밖에 안 되는, 곧 상위 권력자인 겁니다.
이 권력자가 식민 통치를 받는 식민지 청년을 지금 찾아와서 그 앞에서 간구를 합니다. “간구했다”는 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참 어려운 일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일제에 36년 동안 식민통치를 당했는데, 그때 일본 장교가 한국(조선) 청년 하나가 좀 ‘용하다’,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청년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당신한테 간구합니다.”라고 한다면 이 그림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근데 이 백부장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간구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뭔가. 6절을 보면,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자기 문제를 들고 온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들고 온 거예요. 근데 그 다른 사람이 누구냐. 자기 집 하인입니다. 여러분,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에 머슴이 있지 않았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머슴 종이 되는 거죠. 그래도 우리나라 머슴은 주인과 인격적 관계가 어느 정도는 있었죠. 농담도 주고받고, 탈을 쓰고 주인을 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 성경에 기록된 표현은 “파이스(pais)”, 즉 ‘노예’라는 말입니다. 2천 년 전 로마 제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과 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1% 상위 권력자 그룹에 들어가는 백부장이, 식민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청년 예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를 합니다. 그것도 “자기 집 노예”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 문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나”와 관련된 사람, 내 남편, 내 자식, 내 아내, 우리 부모님처럼 직접적 혈연이거나 이익이 있거나 하죠. 그런데 이 백부장은 자기와 ‘급이’ 전혀 맞지 않는 노예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
당시 중풍병은 불치병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고급 장교’가 예수를 찾아와 무릎을 꿇기까지, 그 노예를 낫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봤겠죠. 그런데도 안 되니 마지막으로 예수를 찾아와서 “주님,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지금 괴로워합니다.”
7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의 중심을 보시고 “가자. 내가 고쳐주마.” 하시니,
8절, 9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께서 지금 “가자, 너희 집으로 가서 고쳐 줄게.”라고 하셨다면, 웬만하면 “예! 어서 오십시오!” 하고 주님을 모시고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다릅니다. “주님, 저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떻게 주님 같은 분을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백부장밖에 안 되어도, 제 부하들에게 ‘너 이거 해’, ‘저기 가’, 하면 그들이 다 제 명령을 따릅니다. 주님, 여기서 그냥 명령만 하십시오. ‘제 하인 나으라’고. 그러면 제 하인이 낳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 백부장은 자기 눈앞에 있는 식민지 백성 청년 ‘예수’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메시아임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오셔도 됩니다. 당신은 내 눈앞에 계시지만 이미 우리 집에도 계십니다. 명령하십시오.”라고 하는 거죠. 이 위대한 신앙고백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에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거예요.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이 헬라어 원문에 “토수토스(tosoutos)”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처럼(이만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토수토스’, 즉 “이처럼 대단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하고 감탄하신 겁니다.
11절에서 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메시아임을 알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메시아를 못 알아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종교생활이 주님과 무관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네 믿음대로 된다.” 그 믿음대로가 뭡니까? 백부장이 구한 건 자기 유익이 아닙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노예’의 유익을 위해 그가 기도한 겁니다. “네 믿음대로!” 그 즉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여러분, 한센병자 나병 환자는 자기 문제를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자기하고 전혀 급이 맞지 않는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찾아와 무릎 꿇고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내 문제를 놓고 하던 ‘나병 환자식’의 기도는 반드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백부장’의 기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기도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때 그 사람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겁니다. 기도는 노동이라고 하잖아요. 기도는 쉽지 않거든요. 근데 내가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혈연을 떠나서 누군가를 위해 진땀을 흘리며 기도한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에 개입하셔서, 주님의 때에 응답되는 것을 내가 확인할 때, 내 믿음의 경지가 넓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경험 신앙’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좋은 신앙의 동기일 뿐, 우리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상황 속에서 살아가면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때,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삶 속에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아, 주님의 능력이 저런 데서도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때 내 믿음의 경지가 넓게, 넓게 확장되는 겁니다.
그런데 백부장도 기도의 마지막 종착지는 아니라는 거예요. 백부장 수준의 기도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베드로 장모의 치유
마지막 단계가 ‘베드로’입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당시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 부모는 반드시 아들이 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장모는 원래는 베드로의 처남이 모셔야 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 장모에게 베드로 아내 말고는 자식이 없었는지, 그 집이 몰락했는지, 아들들이 전부 다 망했는지, 어쨌든 베드로는 결혼해서 장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첫 번째 나병 환자, 두 번째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 그리고 이번엔 베드로의 장모 열병. 이게 다 불치병이에요. 열병도 걸리면 그냥 열 나다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열이 펄펄 끓는 걸 보셨습니다. 이건 베드로에게 큰 문제 아닙니까. 예수님 옷자락 딱 붙잡고 “예수님, 안 그래도 예수님 청하려고 했는데, 우리 집에 잘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장모님 좀 고쳐주세요!” 해야 될 것 같은데…
15절입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베드로는 한마디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당신이 보시고, 당신의 손으로 만져서 고쳐주셨습니다. 기도 안 했는데, 간구 안 했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낫게 해주셨어요. 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문제로 시작해서 기도의 문턱을 넘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지경을 넓혀 가다가, 마지막 지점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멘. 이 지점에 올라가면, 나한테 필요한 거나 나의 요구를 위해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왜?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한, 나한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할 때, 베드로의 장모가 앓아 누운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아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기도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가 속한 공동체가 새로워지게 하고, 그가 자리한 한 사회의 한 부분이 정화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이제 기도와 관련된 성구들을 함께 묵상해 보십시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한 번 같이 찾아보실까요?
여러분, 마태복음 6장은 전부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의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근데 그건 설교의 전문(全文)이 아니라 핵심을 한 줄로 정리한 것이고요.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 전문이 기록된 것은, 산상수훈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산상수훈의 첫 번째 주제가 뭐냐면 ‘복’이에요.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체계적인 설교를 하시면서, 첫 설교의 주제가 복이라는 것은 지금과 똑같이 2천 년 전에도 사람들이 복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전부 기복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얘들아,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이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된 거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된 거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된 거야.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야.” 이렇게 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 주셨습니다.
그 설교가 연이어진 두 번째 주제가 ‘기도’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도도 잘못하고 있었거든요. 기도도 전부 자기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얘들아, 기도할 때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한 번 말하는 걸 자꾸자꾸 반복해서 하나님한테 되풀이하지 마라. 이방인들은 그렇게 되풀이해야 ‘응답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어.” 왜 그럴까요? 이들이 믿는 신은 전부 형상을 가진 우상입니다. 쇠든, 나무든, 돌이든 형상이 있어요. 성경 말씀처럼,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걸 신이라 하여 기도하는 거예요. 근데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니까, “내가 기도했는데 들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일 가서 또 해야 돼요. 언제까지? 자기최면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우상을 향해 기도하는 건 ‘자기최면 거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최면을 걸어서 “어, 우상이 들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8절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대전제가 뭡니까? “내가 지금 기도해서 말을 안 하면 주님이 모르신다.”라는 전제로 기도하죠. 그런데 내가 말하지 않으면 주님이 모르시는 분이라면, 그런 신을 왜 믿습니까. 주님께서는 “네가 구하기 전에 너에게 필요한 건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신 거예요.
여러분, “내가 기도해서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모른다.”라는 전제와, “내가 기도해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 아신다.”라는 전제는 기도의 내용과 질, 수준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전자는 “하나님이 모르실 테니 매일 똑같은 말이라도 반복해서 ‘주여 삼창’ 해가며 간절히 외쳐야만 된다.”라는 식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믿음의 기도입니까?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이 1월이라고 합시다. 3월이 되면 대학교 새 학기가 시작되죠. 2월 말이면 등록금을 내야 되잖아요. 어느 날 학교에서 등록금 고지서가 왔습니다. 자식이 아버지한테 “아버지, 2월 말까지 이 등록금 내야 됩니다.”라고 말해요. 아버지가 “그래, 알았다. 고지서 내게 주렴.”이라고 하죠. 점심 먹는데 또 “아버지, 2월 말까지 등록금 내야 됩니다.” 저녁 먹는데도 “아버지, 2월 말까지 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매일 밥 먹을 때마다 세 번씩 한다고 합시다. 그 자식이 아버지를 믿는 겁니까? 매번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 등록금, 등록금, 등록금…”만 반복하면, 그 자식과 아버지 사이에서 인격적이고 생산적이며 지적인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해서 공기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물 없으면 죽고, 공기 없으면 질식해 죽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우리가 기도해서 얻게 되던가요? 다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주십니다. 아무리 가난한 청년들도 결혼해서 사글세 방에서 살며 가난에 허덕여도, 아이가 태어나려면 기저귀, 옷, 신발 다 준비됩니다. 뱃속의 태아가 “엄마, 기저귀.”라고 하나요? 그냥 엄마, 아빠가 알맞게 준비하지 않습니까. 인간 부모도 아이에게 필요한 걸 알고 미리 준비하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필요한 걸 모르시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13절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여러분, 우리가 흔히 이것을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근데 주님의 기도는, 교인들이 “자, 예배 끝났으니 주님의 기도로 폐회합시다.” 할 때, 마지막을 알리는 요식행위용이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는 너에게 있어야 할 걸 다 아신다.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라.”라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지금까지는 “네 뜻, 네 원하는 것”만을 위해서 기도했지?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라.” 네 개인 뜻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 이루어져야 된다.” “네가 네 삶을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너의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살아라.” 지금까지 “너 배만 부르면 됐지?” 이제부터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해라.” 무슨 말입니까? “내 배는 부른데, 옆집은 굶고 있다면, 너 혼자 먹지 말고 함께 나누라.”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너,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에 둔감하게 네 마음대로 살아왔지? 이제부터 죄에 민감하게 살아라. 그렇게 살기 위해서 기도해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라.” 이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거기에 “네가 40일 새벽기도만 하면, 네가 원하는 거 다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지금부터 네가 살아온 삶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라.” 이게 주님의 기도예요. 그 대전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아신다.”라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 지금 “목숨”이 있습니다. 내 목에 있는 숨이 끊어지면 내가 죽는 거거든요. 내 목숨이 중요합니까, 음식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목숨이 중요하죠. 내 몸이 중요합니까, 옷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몸이 중요하죠. 그럼 우리가 뭘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내가 좀 덜 먹고 덜 입어도,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내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가치의 목숨’으로 살아갈 것인가. 내가 좀 다른 사람보다 못 입더라도, 이 몸을 ‘의의 병기’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욕망의 도구’로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떤 가치의 목숨으로 살아갈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먹고, 마시고, 입는 걸 기도합니다.
26절에서 29절까지 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공중의 새를 좀 봐라. 얘들이 창고를 만들어 곡식을 모아 두냐. 또 저 백합화를 봐라. 걔들이 길쌈하고 수고하지 않아도 저렇게 꽃이 피어나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바울이 고난당할 때마다 “주여 삼창” 하며 “왜 내게 이 고난 주십니까!” 하고 소리치고 원망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바울은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이 고난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바로 세우시고, 이 고난 끝에 나에게 주실 영광은 비교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생각하건대(로기조마이).” 곰곰이 숙고했다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 돈이 없고 고난을 당하지만, 주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버려 구원하셨는데, 이런 나를 고난에 방치하시겠는가? 아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내 몸에서 불필요한 근육을 빼고, 내게 필요한 영적 근육을 더 입혀 주셔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우뚝 세워 주시기 위함이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며 숙고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못 넘을 고난의 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하면서 우리는 숙고해야 할 것을 숙고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의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기도는 같은 말의 되풀이일 뿐이에요.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얘들아, 저 들의 풀들, 백합화들 저렇게 예쁜데, 이거 내일이면 시들어버려 아궁이에 던져서 불쏘시개가 되지 않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이렇게 아름답게 주님이 입히신다면, 구원받은 너희야말로 더 귀하지 않겠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고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절대로 동일한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나냐. 간단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어요. 신앙의 수준은 ‘기도 내용의 수준’과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내가 평생 새벽기도를 하면서 “먹고사는 문제,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문제, 내 자식 출세 문제”만을 위해 기도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이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어도, 그 사람은 믿음이 작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큰 자는 어떠합니까. 내가 당하는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내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가 그분의 통로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죠.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돌아가셔서, 여러분 기도드리는 내용을 한 번 놓고 “나는 지금 ‘나병 환자 수준’에서 늘 기도했는가? ‘백부장 수준’인가? ‘베드로 수준’인가?” 점검해 보시면, 여러분 수준은 금방 확인됩니다.
31절에서 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까 마태복음 6장 8절 말씀을 주님께서 다시 반복하시는 겁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버지가 다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 알고 계신다.”라는 전제가, 우리 기도의 수준을 높게 만드는 거거든요. 이 전제가 없으면, 우리는 매번 “내 사정을 말하지 않으면 저분이 모르신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이방인들이 우상을 향해 중언부언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됩니다.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톤(proton)”은 “무엇보다도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져 줄게. 왜? 너한테 뭐가 있어야 되는지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기도는 도대체 뭔가. 로마서에서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기 위해 기도해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라. 그러면 베드로가 한마디도 기도 안 했는데, 주님께서 아시고 그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져 줄 것을 네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주님, 나한테 지금 이게 필요하니까, 먼저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내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게요.” 이건 ‘믿음’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믿음은, 내가 보지 않았는데, 나한테 안 보이는데도, 주님의 언약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날 “먼저 주시면 내가 갈게요.” 하고, 주님은 “아니다. 네가 먼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라.”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네 삶에 괴로움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런 건 없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아무 염려 없다, 아무 괴로움 없다.” 이런 건 거짓말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편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무 문제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문제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공무원이 예전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뇌물을 받았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뇌물을 끊음으로써 내 삶이 궁핍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눈을 떠서 내일이라는 시간이 또 주어졌다면, 네게 내일을 맡기신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것도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오늘 너에게 주어진 인생, ‘오늘’이라는 퍼즐 조각을 최선을 다해 맞추어라.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우리의 삶에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평생 병자로 살지 않았습니까. “내 병을 고쳐 달라.”고 세 번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죽은 자도 살려요. 바울이 말을 하고 글을 쓰면 그게 성경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건강하기까지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필경 다른 종교를 하나 만들어서 교주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지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하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면, 내 육체가 나를 또 짓누릅니다. 내 육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오늘 하루의 고개를 넘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약하기 때문에 나는 강하다. 왜?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해서 살아가니까.” 바울의 그 육체적 괴로움은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 병 때문에 바울은 평생 ‘사도 바울’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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