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래시계와 같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며,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은 '(입) 김'입니다.
인생을 모래시계라고 했는데, 세상의 모래시계를 보면 위에 있는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면 아래 유리병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모래시계라고 해도, 뭔가 인생 시계가 다 끝나도 남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래시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서 - 솔로몬. 헛되도다
여러분들 잘 아시는 전도서 1장 1절에서 2절 말씀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이니까 솔로몬 아닙니까? 솔로몬이 뭐라고 했는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 말은 중요한 사실을 강조할 때 부사가 있음에도 동일한 단어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원시적인 언어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을 배우고 읽으면 읽을수록 “어, 그게 아니야. 이게 훨씬 더 강조하는 거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령, 솔로몬이 “인생은 대단히 헛되다, 인생은 매우 헛되다, 몹시 헛되다.”라고 하는 것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강조가 됩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강조할 때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제곱’이든 ‘곱하기’든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굉장히 좋으면 좋다, 좋다, 좋다, 곱하기 좋다.”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헛되다”를 다섯 번 썼다는 것은 헛됨의 5 제곱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부사도 동원할 수 없을 만큼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솔로몬이 “헛되다”라고 말한 히브리어 단어가 ‘헤벨’인데, 그 ‘헤벨’은 ‘숨’이기도 되고 ‘김’이라는 말도 됩니다. 물론 ‘공허함’, ‘헛됨’ 이런 뜻도 있지만 본래는 ‘수증기, 김’입니다. 제가 “후—” 하고 김을 불면 분명히 열기도 느껴지고, 유리에 ‘후—’ 하고 불면 김이 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있습니까? 실제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인생이 그런 김이라는 거예요.
시편 - 다윗. 한 뼘, '김'
다윗이 시편 39편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여러분, 3천 년 전에 다윗은 70년을 살았습니다. 3천 년 전에 70년을 살았다면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겁니다. 지금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산 거예요.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살고도 다윗이 “내 인생은 이만큼 길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셨다.” 다윗에게 있어서 70년이라는 인생은 한 뼘밖에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파’는 손목 끝에서부터 손가락이 시작하는 부분, 그러니까 손바닥입니다. 다윗이 70년을 살고 나서 “내 인생은 손바닥 길이밖에 안 됩니다.” 모래시계가 순식간에 끝난 겁니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손바닥 길이에 불과한 70년을 “이것이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산 기간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다.”라는 것입니다.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라고 합니다. “든든히 서 있다.” 이것은 ‘나의 전성시대’를 말합니다. 다윗에게도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다 살고 되돌아보니까 자기 인생의 전성시대에도 모든 것이 허사뿐이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허사’라는 말이 ‘벨’입니다. “내가 되돌아보니까 내 인생의 전성시대라고 했던 그것이 이 김에 지나지 않구나.”
다윗은 또 시편 62편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그 사람의 인생도 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좀 부자이거나 힘 있는 사람은 인생이 뭔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나는 신분이 높으니까 김에 지나지 않는 너보다 내 인생이 훨씬 중요하고 더 크고 더 무겁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그 인생은 ‘김’, 신분이 높은 사람도 ‘김’, 가난한 사람도 ‘김’, 부자도 ‘김’이라는 거예요. 그들을 모두 저울에 올려놓아도 김보다 가벼울 것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인구가 72억이라고 합시다. 어느 날 몇 시 몇 분 몇 초에 다 함께 하늘을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내뿜었다고 해 봅시다. 그게 지금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현재 입김을 불 때, 아직도 기가 느껴지는 내 이 김이 72억 명이 한꺼번에 내뿜었다가 사라진 김보다 더 무겁다.”라는 말도 가능한 겁니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수증기, 입김, 이런 것들이 아무 실체도 없이 헛된 것, 허한 것의 상징 아닙니까?
시편 - 인생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래서 시편 102편 3절(공동번역)에서는 “나의 세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더라는 겁니다. 제가 사는 시골집 옆집에서 겨울이면 딱 저녁 5시에 장작으로 불을 때는데, 산 위에서 바람이 내려오면 그 연기가 다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옵니다. 그 연기가 굉장히 센 것 같지만, 그때 잠시뿐이지 순식간에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제 인생이 실체 없는 연기와 똑같다는 겁니다. 김하고 똑같다는 말이죠.
야고보서 - 인생은 안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장 13절,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제가 사는 시골집이 해발 560m라서 안개가 자주 끼어서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8개월째 사는데, 한 번도 솟아오른 안개가 그 모양 그대로 10분 이상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안개는 피어오르면 그냥 사라지고, 다른 모양이 됩니다. 이처럼 인생은 실체 없는 숨, 입김, 연기, 안개처럼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시신은 흙으로 소멸되고
그런데 수증기, 안개, 연기, 입김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습니다. 시편 146편 3절에서 4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안개, 김, 수증기, 연기는 실체가 없는데 그냥 실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인생도 실체 없는 안개, 연기, 입김, 숨과 똑같은데, 인생은 흙으로 소멸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흙으로 소멸되는가?
이사야 14장 11절입니다. “내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도 거기에 떨어졌음이여,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다.” 우리 인생이 안개처럼, 김처럼 소리 없이, 실체 없이 사라지는 그 사라지는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 구더기를 요로 삼고, 지렁이를 이불 삼고 그렇게 형체도 없이 사라져 간다는 겁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여러분이 죽고 나서 매장되면 시신은 구더기 밥, 지렁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생기 속에서 삶의 방향을 정하세요
이 인생의 실체를 바로 아는 사람만, 자기 입김을 의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기로 자기 인생 이야기책을 엮을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코에 당신의 생기를 “후—” 하고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흙 + 하나님의 생기 = 하나님의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생기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생명에서 백’이 하나님의 생기라면, 그걸 빼 버리면 남는 게 뭐겠습니까? 흙밖에 안 남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장상도 결국 구더기, 지렁이 밥이 되는 거로, 그 인생은 안개처럼, 김처럼 소멸되는 겁니다. 그걸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흙의 콧속에 불어넣어 주셨던 그 생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왜 성경 공부를 합니까? 경건 훈련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육체가 구더기 밥이 될 때에도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실 그 하나님의 생기를 심어 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인생이 이 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만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생기로 자기 인생 이야기책을 엮어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떠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은 떠남이 있습니다. 인생이 수증기, 김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결국 육체라는 고깃덩어리가 구더기와 지렁이 밥이 되는 것으로 인생이 끝나 버린다면 유물론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열왕기상 2장 1절에서 2절을 통해 이렇게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새 번역) “다윗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 너는 새로워지고 장부다워야 한다.’” 다윗도 자기 인생이 모래시계처럼 시간이 내려와 다 부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떠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생전에 아들에게 왕위를 양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
히브리어 표현 “오하일 더라이”가 말하는 ‘죽음의 길’, ‘공동묘지로 가는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살 사람입니다. 자기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의 집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23편 6절을 새 번역에서는 더 쉽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집에서 살겠습니다.”
다윗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떠나서 어디를 가야 하는지, 그 방향과 목적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주님의 집을 향해 매일 하루하루를 떠났습니다. 그 하루하루 주님의 집을 향해 떠나간 다윗의 인생 이야기가 사무엘상, 사무엘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성경에 포함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한 인간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생이라는 붓으로 엮어낸 인생 이야기책입니다. 어떤 이야기책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매일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떠나갔던 기록”이 바로 사무엘상, 사무엘하라는 것이죠.
여러분, 인생은 떠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오늘을 맞이했다는 것은 어제를 떠났기 때문 아닙니까? 만약에 어제를 떠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이거나, 어제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인 거예요. 집착하는 사람은 그것이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을 떠나 내일을 향해 걸어가면 뭔가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거예요. 그런데 집착하면 눈과 귀를 잃는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도박에 집착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도박에 집착하는 한, 아내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귀가 없어져요. 자기가 가산을 탕진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는 자식이 있어도 눈에 안 보입니다. 눈과 귀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눈과 귀만 잃습니까? 그렇게 눈과 귀를 잃어가면서 사람도 잃어버리고, 내일도 잃어버리고, 인생을 몽땅 잃어버립니다.
오늘을 떠나지 않는 사람, 어제에 집착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내일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나의 익숙함을 포기하고 던지는 겁니다. 나의 편안함을 내가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내일을 주님 안에서 향해, 내 발을 굳건하게 내딛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서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터지는 겁니다.
혹시 여기 청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젊은 시절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청년 시절을 구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 인생에서 청년 시절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는 가만히 있는데 청년 시절이 나한테 왔다가 그냥 떠나가도록 피동적으로 앉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20대를 하루하루 떠나서 30대를 향해 능동적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20대를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30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20대보다 나은 30대를 구가할 수 있고, 그 사람은 30대를 또 떠나면서 40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이처럼 매일매일 떠나는 거예요. 매일매일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다윗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시편 23편 6절(새 번역)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다윗이 매일 돌아가야 할 주님의 집을 향해 하루하루를 떠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인생길
바울도 똑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자기 인생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지금 다 쏟아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루하루 떠나왔던 그가, 이제는 영원히 떠나갈 시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매일매일 떠나는 그 방향성이 어디였는지, 4장 7절에서 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자기의 인생을 전제로 알고 매일매일 부어지는 걸 보면서, 매일매일 떠나는데 어디를 향해 떠나갔는가? 자기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의의 재판장’이 계신 그분의 집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삼고, 뒤는 돌아보지 않고 매일 한 발자국씩 뚜벅뚜벅 걸어간 것입니다.
바울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연행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 원정을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그 다메섹 도상에서, 마치 핀셋으로 집어내듯 주님께서 그를 불러내셨습니다. 그 순간 바울이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보무도 당당하게 다메섹을 향해 걸어가던 바울이, 이제는 겨우 남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라고 한 곳”이라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시력을 상실한 채 머물고 있을 때, 주님께서 선지자 아나니아를 보내어 안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사도행전 9장 18절에 “그가 다시 보게 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헬라어로 ‘아ναβλέπω(아나블레포)’입니다. ‘βλέπω(블레포)’는 ‘보다’, 거기에 ‘아나(ανα)’라는 접두어가 붙은 말로, ‘다시 보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나(ανα)’에는 ‘다시’라는 뜻만이 아니라 ‘위로’라는 전치사의 의미도 있습니다. 바로 다메섹에서 주님께 사로잡혀 시력을 상실하고, 다메섹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그 순간부터, 바울은 위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 나라를 향해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매일매일 오늘을 떠나면서 살았습니다. 그 삶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남았습니다. 사도행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바울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구원받은 이후에 자기 삶이라는 붓으로 써 내려간 인생 이야기책’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께서도 “인생은 오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향해 오늘을 과감히 떠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매일매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떠나갈 때, 여러분의 세상적 직책이나 소유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을 통한 주님의 섭리가 여러분 인생 이야기책으로 매일매일 엮여 갈 것입니다.
인생은 모래시계요, 더없이 ‘김’이요, 머무름 없이 매일매일 떠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인생을 광야 길에 비유합니다. 광야는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갑옷 솔기에 지나지 않는 나, 입김에 지나지 않는 나를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야를 살아가는 갑옷 솔기에 지나지 않는 인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그분을 길잡이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인생길에서 배워야 합니다 - 세상의 집착을 내려놓으세요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나 의지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라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시내산 광야 아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던 지도자 모세가 눈에 안 보이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매일 보아 오던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경배합니다. “이 황금 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엘로힘이시다. 그러므로 내일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하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라면, 황금 송아지가 우리 인생을 갑옷처럼 견고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33장 2절~4절).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을 쫓아내리니…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 내가 가다가 길에서 너희를 멸할까 두려우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선포하시자, 그제야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출애굽 한 이후 전날까지는 매일 단장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3,400년 전 광야에서 무슨 화장품이 있겠습니까, 무슨 폐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광야에서 지혜를 다해, 썩어 문드러질 고깃덩어리인 육체를 단장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화장품이 훨씬 더 발전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어떨까요? 3,400년 전 광야에서 화장하며 몸을 단장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날의 우리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까요? 아무리 단장해 봐야 몇십 년 지나면 결국 구더기와 지렁이 밥이 되고 마는 고깃덩어리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육체를 우상으로 삼아 매일매일 단장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고린도전서 10장 5절(공동번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부분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쓰면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은, 고깃덩어리를 단장하는 인생의 삶이 얼마나 덧없이 끝나 버리는지 바울이 이렇게 명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이야기책을 써 나가면서, 하나님 없이 우리 고깃덩어리만을 위한 이야기책을 쓴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 종결이 이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노년에 회한의 눈물만 흘리겠습니까?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작년 성탄절 전날, 그러니까 12월 24일에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TV를 통해 유명한 ‘앙드레 리우(Andre Rieu)’ 악단의 런던 공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날 공연은 ‘특별 공연’ 혹은 ‘경로우대 공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큰 극장에서 앙드레 리우 악단이 공연을 하는데, 관객 대부분이 연세 드신 분들이었습니다. 1부는 아주 경쾌한 크리스마스 캐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온 극장이 축제의 장이 된 거예요.
그런데 2부가 시작되면서 성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헨델의 ‘할렐루야’, ‘호산나’, ‘예루살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같은 성가들이 한 곡 한 곡 흘러나옵니다. 조금 전까지 1부 시간에 그렇게 흥겹게 박수치고 어깨춤을 추던 그 나이 드신 노인들이, 성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립니다.
여러분, 음악이라는 것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감상의 대상, 즐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에게 자신이 젊은 시절에 들었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에게 옛날에 듣던 음악은 자기 인생에 대한 회한, 후회, 자기 인생에 대한 반추, 추억,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아 전해집니다.
몇 해 전에 영국 성공회가 영국 요크에서 총회를 열었는데, 그 총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결의된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교인을 증가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영국 성공회의 교인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만히 두면, 머지않아 성공회가 소멸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영국에서 교인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20년 후에도 영국 성공회가 존재하게 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교인을 충원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결의 사항이었습니다.
적어도 영국이라고 하면, 거기에 앉아 있는 70~80대 노인들이라면 50년 전, 60년 전에는 다 영국 성공회의 교인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영국 성공회 교회가 텅텅 비어 있다면, 그들이 교회를 떠난 겁니다. 그들이 성가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떠났던 교회를 생각하고, 자신들이 버렸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참으로 가슴이 찡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모래시계인데, 우리 모래시계에 모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그렇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내 인생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야 되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 집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은 입김입니다. 지금부터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십시다. 인생은 모래시계입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이 하루의 절대적인 의미를 감사하면서, 이 하루를 내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생명의 삶으로 살아가십시다. 인생은 최전성기를 지나 놓고 보면, 결국 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그 생기를 말씀과 기도로 회복하면서 살아가십시다.
인생은 머무름 없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하루에도 집착하지 맙시다. 오직 가야 할 그 집,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 삼고, 하루하루 오늘을 뚜벅뚜벅 떠나 그 집을 향해 걸어가십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비록 가진 것도 없고, 세상적인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떠난 뒤에도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될 영원한 ‘사도행전 29장’을 엮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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