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 사는 삶
우리는 모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종교 행위만으로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일날 이처럼 예배당을 찾아와서 예배드리고, 각종 봉사를 하고, 성경 공부 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증거입니까?
이런 것은 다른 종교인도 하지 않습니까? 불교인도 절에 찾아가서 부처님께 불경을 드리고, 온갖 봉사를 다 하고, 불경 공부에 열심입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똑같은 종교 행위를 하는데, 불교 신자가 우리와 똑같은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 신자와 똑같은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서 불교 신자가 우리를 불교 신자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분기점은 말씀에 있습니다.
크리스천과 불교 신자를 구별하는 기점도 말씀에 있습니다. 불교 신자는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불교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자기가 절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에만 불상을 찾아가서 지성으로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 미신을 믿는 사람, 미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크리스천, 기독교 신자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가르침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봉사를 하는데 내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오지랖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 종교 행위만 하는 사람은 미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주일이면 예배당에 찾아와서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봉사 행위에 종사하고, 성경 공부하고, 말씀과는 등지고 살면서 종교 행위에만 열심을 내다가, 급박한 일을 당했을 때 예배당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미신을 쫓는 사람, 미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 예수 믿어도 왜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또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겠습니다. “내가 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내가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내가 새로워지지 않습니까?” 내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종교 행위만 할 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분열과 사회의 부패, 그 원인 - 말씀 순종의 부족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아니 해외에 있는 한인 교회를 다 포함해서, 왜 싸우지 않는 교회가 드뭅니까? 지금은 싸우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교회가 다 싸운 전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교회를 이룬 교인들이 예배당에서 종교 행위만 할 뿐,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한 교회의 교인이 원수처럼 싸우고 교회가 쪼개질 수 있겠습니까?
온 나라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크리스천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왜 점점 더 부패해 갑니까?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종교 행위에만 열심일 뿐,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색이 크리스천이라 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부패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육: ‘가달’과 ‘룸’
지금이나 옛날이나 죄에 빠진 인간의 죄성, 인간의 본질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이것이 그 말씀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지하시어 그들을 양육해 주셨습니다. ‘양육’이라는 말은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자기 머리로 판단하고,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기까지 그 아이를 양육하려면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생명을 갉아먹고 산다는 말은 확실히 맞습니다. 아이가 크는 만큼 엄마의 생명은 소진됩니다.
이렇게 양육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데, 히브리 원문을 보면, 우리 성경에는 ‘양육’이라는 단어만 나오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자식으로 ‘가달’ 그리고 ‘룸’ 하셨다고, 두 단어가 나옵니다.
‘가달’이라는 동사는 인간의 외적 성장을 도와주는 동사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태어났어요. 그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너무너무 인형처럼 예뻐서 “너는 자라지 말고 이대로 평생 이 모양으로 살자” 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의 뼈가 튼튼하게 자라고, 육체가 강해지고, 키가 크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아이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는 ‘가달’ 해 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 ‘룸’이라는 동사는 내적 성장을 꾀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누구든지 자식을 낳아서 육체만 건강하게 자라도록 한다면, 이는 자기 자식을 언젠가는 썩어 들어갈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겁니다. 외적으로만 성장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내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맑은 정신, 밝은 영혼, 바른 가치관, 옳은 도덕관, 지혜, 용기, 인내심, 그 모든 것이 생활화되게끔 가르치고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자식으로 삼아 주시고, ‘가달’로 외적으로 성장하게 하시고, ‘룸’으로 내적으로 성장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우리말에서의 양육은 養育으로서 기를 양, 기를 육으로 씁니다.
'기를 양'은 원래 양을 먹여 기르다란 뜻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기를 육'은 '아들 자'를 거꾸로 한 모양으로 모체와 거꾸로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이며, '달월 육' 부수에 따라 낳아 기르고 자라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둘 다 모두 육체적으로 낳아 기르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교육'이 추가되어 마음과 지혜의 성장을 도모하게 됩니다.
보잘것없는 민족을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사랑
여러분, 세상에 많은 민족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렇게 ‘가달’ 하시고 ‘룸’ 해 주셨다면,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외적 성장을 이끌어 주셨으니 잘됐겠구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7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 가장 강하고, 수효가 가장 많은 매혹적인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수효가 작고, 보잘것없고 미약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직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자녀로 품어 주시고, ‘가달’ 해 주시고, ‘룸’ 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를 통해서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서 16장 4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아무도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난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들에 버려졌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 있으라.’ 하고, 다시 이르기를 ‘너는 살아 있으라.’ 하여 네가 들의 풀같이 많아지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져서 죄 가운데 허우적대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피투성이 신생아에 비하셨습니다. 여러분,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버린 피투성이 신생아를 보면, 대부분 그냥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요즘처럼 복지가 잘되어 있을 때는 복지기관에 전화하고, 복지사가 오는 걸 보고 자기는 갈 겁니다. 그 피투성이 신생아를 데려다가 탯줄도 끊어 주고, 소금도 뿌려 주고, 돌봐 주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피투성이 신생아를 품으셔서 ‘가달’ 해 주시고, ‘룸’ 해 주셔서 들의 풀처럼 많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땅과 벗하며 사시는 분들은 “들의 풀처럼 많게 해 주셨다”는 표현을 잘 아실 겁니다. 풀은 정말 무섭게 번식합니다. 오죽하면 “비 오는 날 오늘 풀을 깎았는데, 풀을 깎으면서 돌아보면 뒤에 또 난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풀은 이렇게 번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투성이를 이렇게 번식할 수 있도록 ‘가달’ 해 주시고, ‘룸’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 말씀을 거역함
그렇다면 여러분, 상식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민족, 피투성이로 내버려진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그처럼 품어 주셨다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 1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그 보잘것없던 민족이, 그 엉망이었던 족속이, 하나님께서 ‘가달’ 해 주시고 ‘룸’ 해 주시니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여기 ‘거역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파샤’는 ‘반항하다, 반란을 일으키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키면 어떻게 됩니까? 탱크를 동원하고 미사일을 동원하고 하늘의 전투기를 동원해서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키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쿠데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존재에 대한 반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말씀이시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 그게 곧 하나님을 짓밟는 겁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늘과 땅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데 인간만 거역한다
이사야 1장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이 뒤에 있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지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표현 앞에는 “하늘이여, 땅이여”가 있고, 뒤에는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거두어 주었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이 대비되어 보입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창조 이래로, 태초 이래로 지금도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을 그대로 지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1년 동안 아침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1년, 12달 동안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노아의 홍수는 단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그런데 1년 365일 동안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희 집 마당에 붉은 단풍나무가 심겨 있습니다.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3년 전인가 2년 전인가, 제가 살고 있는 경상도 지역은 53일 동안 비가 연속으로 온 적이 있습니다. 기상대 창설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53일 동안 비가 오고 나니 붉은 단풍나무가 초록색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계속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온갖 행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궤도를 벗어나 마음대로 움직이고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땅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저 산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 제 발로 전부 다 뚜벅뚜벅 걸어와 도시를 점령해 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나무가 단 하나의 과실도 맺어 주지 않고, 땅이 채소를 생산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선량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 인간
하늘도 땅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그 가운데서 모든 짐승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을 따라서 사는데, 오직 인간만 하나님의 말씀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살아갑니다.
이사야 1장 3절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소는 어떻게 자기 임자를 압니까? 나귀는 어떻게 자기 주인이 자기에게 밥 주는 구유를 아나요? 주인의 음성으로 압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로 압니다. 주인의 말로 압니다. 주인의 말, 주인의 음성, 주인의 발자국 소리, 그게 모두 다 소나 나귀에게는 주인의 언어입니다. 나귀는 그 언어를 알아듣는 겁니다. 그래서 소는 주인의 말에 복종합니다. 소가 하나님께 쿠데타를 일으킵니까?
저희 집에 개가 두 마리 있습니다. 얼마나 더운지, 한낮 무더위에 마당에서 잠을 잡니다. 제가 걸어가면 안 깹니다. 제 발자국 소리를 알거든요. 다른 사람이 저 골목에 나타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짖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의 차가 들어오면 짖지 않습니다. 환영하는 거죠. 다른 사람의 차가 들어오면 벌떡 일어나서 짖습니다. 그들도 주인의 음성과 주인의 말, 주인의 발자국 소리, 심지어 주인의 동작 소리까지 압니다.
이사야 1장 3절을 다시 읽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소는 임자의 소리를 아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의 소리를 모를까요? 왜 하나님의 소리를 모릅니까? 왜 깨닫지 못합니까?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말씀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들의 풀처럼 번성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도, 마치 하나님 없이 내가 살 수 있는 것처럼 종교 행위만 열심히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고, 예배당을 나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욕 중에 “저 인간은 짐승 같은 놈이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 욕은 짐승을 모독하는 겁니다. 짐승은 주인의 음성을 압니다. 짐승이 인간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니까 “짐승 같은 놈”이라고 하면 오히려 짐승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욕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대로 표현하면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짐승은 주인의 소리를 아는데, 인간은 모릅니다. 깨닫지 않습니다.
왜 한국 교회는 서로 다툴까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왜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은데도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걸까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짐승도 임자의 소리를 아는데 하나님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제가요? 여러분이요? 우리가 멀쩡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주인의 음성을 아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해져 가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없이 행하는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 봉사, 성경 공부 같은 외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참된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 외적·내적으로 자라게 하셨지만, 우리는 그 은혜를 잊고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짐승조차 하나님의 뜻을 따르건만, 인간은 오직 말씀이신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며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사회가 부패하는 이유는 바로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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