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출생'과' 사망, 생년월일-사망월일 사이의 하이픈(-)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인생을 가장 짧게, 단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어떤 글자가 되겠습니까? 출생, 사망, 그 사이에 조사 “과”가 붙습니다. “출생과 사망.” 조사 한 글자 “과”가 바로 인생을 압축합니다.
이건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닌데,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태어난 날을 생일로 기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날로 기념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생일로 기념하다가, 죽으면 그 순간부터 생일은 없어지고 오직 죽은 날만 남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70년을 살았든, 80년을 살았든, 100년을 살았든, 땀 흘리며 수고하며 살았던 일생은 다 없어집니다. 죽은 날만 남습니다.
“출생과 사망”이라는 조사 “과”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 인생을 압축해 주지만, 그 의미는 제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조사 “과”는 각 사람의 생존 기간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과”가 80년의 생존 기간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목격한 죽음 중에 가장 빠른 죽음,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은 아이의 경우엔 그 “과”가 불과 72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이 “과”는 ‘거리’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비행기도 많이 탔고 자동차도 많이 탔습니다. 버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탔습니다. 걸어 다닌 거리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출생한 지점”과 “사망한 지점” 그 사이의 거리가 “과”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 동대신동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경상남도 거창군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비행기 타고 다닌 거리, 자동차 타고 다닌 거리, 그 모든 거리를 합쳐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점에서부터, (집 밖에서 사고사 당하지 않고) 만약 거창에 있는 제 집에서 죽는다면, 태어난 부산 동대신동에서 죽는 곳인 거창까지의 195km, 그게 바로 그 “과”가 의미하는 거리입니다.
또 이 “과”는 교통수단에 따른 시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위니펙에 오니까, 인천에서 여기까지 한 1만 킬로미터쯤 되는 거리를 약 14시간 정도 비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위니펙에서 운명하신다면, 여러분의 출생과 사망 사이 “과”는 비행기로 약 14시간을 뜻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출생과 사(死)의 인생을 단 한 글자로 표현하는 조사 “과”를, 컴퓨터 자판의 기호로 표현하자면 ‘하이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 어느 공동묘지에 가든, 비석을 보십시오. 모든 비석에는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 사이에 하이픈 하나만 딱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을 불살라 이 세상을 위해 헌신했다고 해서, 출생연도와 사망연도 사이 하이픈이 길게 새겨지지 않습니다. 짧디 짧은 하이픈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세계 최고의 재벌이었다고 해서 “세계 최고 재벌”이라는 글이 그 사이에 붙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면 케네디 대통령의 묘지 앞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지요. 미국인이 그만큼 존경하는 대통령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케네디 대통령의 비석에 하이픈이 더 크거나 길지도 않습니다. 출생연도, 사망연도 사이에 동일하게 하이픈 하나, 그게 인생입니다.
여러분이 위니펙에 와서, 잘 알지 못했던 이 추운 땅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고생하고 수고하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돌아가시면,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묘비에 “수고했다”라고 적어 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수고로운 인생도 결국 짧디 짧은 하이픈 하나로 끝납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직책이 높든 낮든, 지식이 있든 없든,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도 결국 다 살아 보면 고작 한 글자 “과”, 아니면 하이픈(-) 하나로 인생이 끝나더란 말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창세기 3:19)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제(이재철)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을 보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여기서 ‘흙’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우리가 한글로는 다 ‘흙’이라고만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두 개의 다른 단어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네가 흙(아다마)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할 때의 ‘헐’은 자연 속의 흙을 뜻합니다. 뒤에 “너는 흙(아파르)이니 흙(아파르)으로 돌아갈 것이라”라고 할 때의 ‘아파르’는 ‘티끌’ 혹은 ‘먼지’를 뜻합니다.
“넌 먼지다, 티끌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먼지로 돌아가는 거다.”
왜 우리가 먼지인가.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께서 흙(아파르)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했습니다. 보통 도자기를 만들 때는 부드러운 고령토를 써서 만들면 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그런 고급 흙이 아니라 먼지를 모아서 빚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죽으면 다 티끌로, 먼지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부잣집 마나님의 화장대 위에 먼지가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화장대 위에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목걸이가 놓여 있다고 합시다. 다이아몬드 위에 앉은 먼지가, 나무 화장대 위에 앉은 먼지를 향해서 “야, 너 참 가소롭다. 난 그래도 다이아몬드 위에 앉아 있거든?” 한다고 해서 그게 말이 됩니까? 다이아몬드 위에 앉았든 나무 위에 앉았든, 결국 다 먼지는 먼지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좀 부자로 사십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명해지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숨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다 똑같이 먼지로 돌아갑니다. 정말 허무하죠. 욥기 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불꽃이 위로 향하듯,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냥불이든 라이터불이든 횃불이든, 모든 불은 위로 타오릅니다. 라이터를 땅 쪽으로 향해도, 불꽃은 방향을 틀어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이 수고하며 고생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울고, 살아 있는 동안 죽을 때까지 생존 경쟁을 치릅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귀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이자 사회인으로서, 혹은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고생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해(海)’, 곧 고생의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누구나 수고하며 사는데, 내가 아무리 수고해도 나의 수고를 진정으로 알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자식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머니날’, ‘아버지날’ 같은 기념일이 생긴 거지요. 자식들이 평소에 부모 수고를 다 안다면, 굳이 그런 날을 국가가 만들겠습니까? 1년 12달,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기억하고 섬긴다면, 어머니날 아버지날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모르니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너희 부모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좀 알아주라” 하는 의미에서 기념일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이런 게 바로 허무한 인생입니다. 시편 90편 9~10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생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한데, 그 인생이 마치 날개 달린 듯 빨리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아직 실감이 안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른, 마흔 넘으신 분들은 생각해 보십시오.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 마흔이 되었고, 눈을 한 번 더 깜빡하면 예순, 여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빨리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고했어도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니 얼마나 허무합니까.
솔로몬도 전도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은 시장통을 떠도는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알려진 솔로몬이 한 말입니다. 지혜의 왕이요, 부귀영화의 왕이라면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며 죽었어야 할 텐데, 그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외쳤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아주, 매우, 심히’ 등을 나타내는 부사가 많지만, 솔로몬은 “인생이 매우 헛되다”라고 하지 않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같은 말을 네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뭔가를 강조하려 할 때 동일한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데, 솔로몬은 인생의 헛됨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왜입니까? 살고 나니 너무 헛되다는 겁니다. 여기서 ‘헛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헤벨’(hebel)인데, 이는 ‘숨’을 가리킵니다. 숨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권력자라도 그 숨을 내쉬면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그 숨이 멎으면 인생은 그대로 끝납니다.
그러니 인생이 헛될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 봐야,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는 출생연도와 사망연도 사이에 짧디 짧은 하이픈으로 끝나니까요. 몰랐으면 모를까, 이걸 알고 나면 허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면 내 자식들이 알아줄 것 같고, 내 인생은 하이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결국 다 하이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너는 티끌이니 티끌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우리는 먼지, 티끌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티끌을 모아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창세기 2장 7절). 그 생기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먼지에 불과한 우리가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생기를 상실했습니다.
공식으로 표현하면, ‘티끌 + 하나님의 생기 = 생령’ 생령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기를 상실하면, 남는 것은 결국 티끌뿐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은 허무한 하이픈으로 끝나버립니다. 이 불쌍한 인생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시고,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생기를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인간이 다시금 ‘생령’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신 겁니다.
모래라는 것은 별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모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추출하고, 거기에 수많은 정교한 공정을 거치면 반도체 칩이 탄생합니다. 칩은 조그맣지만, 이제 더 이상 그냥 ‘모래’가 아닙니다. 그 안에 어마어마한 정보가 들어갑니다. 그 칩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이든 캐나다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서든지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티끌로 살면 내 인생은 허무한 하이픈으로 끝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기 안에서 ‘생명’으로 살면, 내 코끝에서 호흡이 끊기는 순간 비록 비석에는 짧은 하이픈이 새겨질지 몰라도, 그 하이픈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3천 년 전 다윗의 삶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때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궁전에서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었으니 이런 고백을 했겠지’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결핍이 많았습니다. 양치기였던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러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 구국의 영웅이 됐지만, 사울 왕이 그를 질투하여 죽이려 해, 10년 동안이나 도망자 신세를 졌습니다.
장남 암논은 다윗의 딸 다말을 강간했고, 그 사실에 분노한 다윗의 아들이자 다말의 동복오라비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습니다. 내 자식이 내 자식을 죽인 겁니다. 압살롬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급해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머리도 빗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지요. 말년에는 세바가 반역을 일으켰고, 그 후에는 군대장관 요압이 반역했습니다. 다윗의 평생은 결핍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누릴 것이 풍족했다면, 다윗은 여호와를 절대로 자기 목자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라고 하시자, 그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말씀대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기 때문에, 저렇게 쉽게 “다 지켰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돈이 많으면,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칭찬해 주니 자기 인격이 훌륭한 줄 착각하게 된다는 거예요. 돈이 우상이 되면, 아무리 예수님을 만난다 해도,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 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즉, ‘네 마음속 우상인 재물을 깨어버려라. 그걸 끊어 내기 전에는 너와 나는 접점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음으로 인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은 결핍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결핍 가운데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건강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여호와만을 목자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의 기회’ 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젊을 때부터 성공하려고 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언 20장 21절에서 “처음부터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젊어서부터 결핍이 없으면, 결국 그 인생은 하나님과 접촉점이 없기에 복된 삶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시편 23:4)
시편 23편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동사가 ‘현재형’인 것이 중요합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온갖 결핍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비하신 쉴 만한 물가요, 푸른 초장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꽃방석’은 오히려 우리를 타락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은 내 계산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힘들고 눈물이 나더라도, 이 절망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믿으면, 이 상황이 주님께서 예비하신 푸른 풀밭이요 쉴 만한 물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편 34편 9~10절에서 다윗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줄일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젊은 사자는 굶주릴 일이 없는데도, “젊은 사자가 궁핍할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다윗이 모든 걸 다 소유한 상태 같지만, 사실은 적국에서 미친 척하며 침을 질질 흘린 끝에 간신히 살아 돌아온 직후에 지은 시입니다. 그러면서 “이 고난의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예비하신 푸른 초장이요, 쉴 만한 물가”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이든, 그것이 푸른 풀밭이요 잔잔한 물가임을 알게 해 주실 때,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투옥되어, 한밤중에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렸지만, 바울은 그 감옥에서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감옥조차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 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날 밤 간수와 온 가족이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지요. 만일 바울이 “이건 가시방석이야!” 하며 옥문 열리자마자 달아났다면, 간수들은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안 데려가시면 되지, 왜 데려가 놓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구해 주시는 거지?”라고 궁금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평탄한 길을 갈 때는 당신의 돌보심을 내가 확인할 길이 없으니, 오히려 사망의 골짜기에 집어넣으심으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쓰는 긴 막대기의 끝은 갈고리처럼 휘어 있어서, 양이 웅덩이나 절벽에 빠지면 그 목을 걸어 끌어올립니다(이게 ‘지팡이’). 또 맹수가 나타나면, 목자가 ‘막대기’를 들고 싸워 물리칩니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져야, 하나님께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돌보시는 현장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욥도 욥기 23장 10절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순금은 팬(프라이팬)이 아니라 풀무불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금처럼 정련하시려면, 일단 불가마 속에 넣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옛날 유대인들은 파티에 초청받으면, 고급 향유를 머리에 바르고 향수로 수염을 치장해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어떤 기름보다 영광스럽고 향기로운 ‘환대’를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원수가 많았던 것은, 다윗이 불의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를 지키며 살면, 그 의로움 때문에 불의한 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모함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결국 그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고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시편 23편 6절에서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접해 주시니,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럼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캐나다에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곧 말씀의 집,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을 가리키지요.
결국 다윗도 출생지는 베들레헴, 사망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10km 남짓이지요. 자동차로 10분이면 갈 거리입니다. 다윗도 70년을 살았고, 인생으로 치면 하이픈 하나에 불과합니다. 생존 기간 70년, 출생지 베들레헴에서 사망지 예루살렘까지는 10km, 자동차로 10분밖에 안 됩니다. 다윗도 그렇게 보면 허무한 하이픈으로 끝난 것 같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의 하이픈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칩’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 칩을 열면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은혜로 흘러나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다윗의 칩은 모든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영원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이건 다윗만 그런 게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고, 1546년, 63세가 되던 해에 고향에 있는 예배당에서 설교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집에서 예배당까지의 거리는 약 200m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하이픈은 63년이라는 세월과 200m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하이픈 역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되어,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교회를 계속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연말이 다가옵니다. 달력상으로 얼마 있으면 새해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달력만 바뀌면 뭔가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처럼 기대하지만, 실제로 달력을 갈아 끼운다고 새날이 오는 게 아닙니다. 달력을 바꾸고 2~3일 지나면, “새해”라고 불리는 그 해 역시 작년과 다를 바 없는 묵은 해의 연장선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오는 것,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것은 모두 소멸합니다. 새것은 오직 ‘위’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해 대림절(Advent)을 시작할 텐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기를 되찾아 주시기 위함입니다. 허무한 하이픈으로 끝날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것으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결핍이 있어서 고통 중에 계십니까? 그 결핍을 통해 오직 주님만을 목자로 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가, 사실은 주님께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예비해 주신 자리임을 믿고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그분의 말씀의 집에 거하세요. 그러면 여러분 코끝에서 숨이 끊기는 순간, 수고하고 애써 살아온 여러분의 인생은 허무한 하이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시편 23편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집 안에 거하는 이 시대의 다윗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 죄로 상실했던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를, 십자가에서 죗값을 다 치르신 주님으로 인해 되찾게 하옵소서. 다가올 새해가, 달력만 바꾼다고 오는 묵은 해의 반복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정한 ‘새해의 시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승부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코끝에서 숨이 멎는 그날, 우리의 인생이 허무한 하이픈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에 달려 있음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렇게 기도하세요. 이재철 목사님 (0) | 2025.01.03 |
---|---|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 주경훈 목사. 2025년 신년예배 (0) | 2025.01.03 |
그리스도인의 글쓰기. 김기석 목사님 (0) | 2024.12.30 |
그대의 시간은? (딤후 4:6~8) 이재철 목사님 (0) | 2024.12.30 |
그대의 기원은? (창 1:1) 이재철 목사님 (0) | 2024.12.30 |
폭풍 속의 항해 “안심하라” (행 27:20~26) 주경훈 목사 @20241229 (0) | 2024.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