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온 당신, 정작 중요한 것은 모르고 살고 계신 것 아닙니까?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한국에서 위니펙은 한 만 킬로미터쯤 더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정착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떠십니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시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모르고 혹 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제가 전혀 상반되는 두 분의 이야기를 먼저 전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분은 제가 약 30년 전에 만난 분입니다. 그분이 인생을 다 살고 자신의 은퇴를 앞두고, 한 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내가 인생을 몰랐구나. 나는 오로지 내가 설정한 목표를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구나. 내가 설정한 목표가 이루어지면 인생을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목표는 성공했는데 인생은 혹 실패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니 “나는 전혀 베풂을 알지 못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베풀 수가 없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누군가를 계속 짓밟고 올라서야 했기에 의도적으로 베풀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베풀지 않으면, 그 손은 집착으로 인해 흉기가 됩니다. 주먹이 되어서 내가 가진 것에 집착하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피멍을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목표를 쟁취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세 번째로 “내가 평생 해로한다고 하면서도 내 아내를 몰랐구나. 집에서는 내 아내가 그저 가정부 정도였고, 밖에 나가면 내 아내는 내 비서 정도였지, 말로는 '인생의 반려자'라고 했어도, 한 번도 내 아내를 내 인생의 반려자로 대해 본 적이 없구나. 내 아내가 나 때문에 울면서 하얗게 밤을 지새운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알지 못했던 인생, 알지 못했던 베풂, 알지 못했던 아내를 이제 남은 여생 동안 제대로 알고 살려면 종교가 필요하겠구나. 이왕이면 내 가족들이 다 권유하는 기독교를 믿어야겠다.” 그래서 30년 전에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말씀으로 가꾸는 여생을 사셨고, “흉기가 되던 손”이 '주님의 축복의 통로'로 바뀌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움켜쥐면 흉기가 되지만 베풀면 주님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30년이 지났으니, 혹시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아흔이 넘으셨을 테고, 이미 돌아가셨다면, 주의 사람들과 자식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종교에 관심이 있습니까? 종교는 자기 인생과 죽음에 대한 생사의 문제입니다. 단순 호기심으로 다가갈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분은 2018년도에 제가 거창으로 낙향한 뒤, 약 2년쯤 후에 전화로 만난 분입니다. 저는 원래 전화로 상담을 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어려서부터의 죽마고우가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 부인이 76세가 되신 분인데, 이제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꼭 이재철 목사하고 상담을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계속 저에게 통화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번호를 받아서 그분께 직접 전화를 드렸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제가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데, 불교, 가톨릭, 개신교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종교를 택해야 할지, 꼭 목사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먼저 불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달아서 열반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불교를 ‘자력 종교’라고 합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지요. 그 반대로 기독교는 ‘타력 종교’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도, 자기를 바르게 세울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고, 내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여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저는 의지도 없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잘 압니다. 자력 종교를 가질 만한 힘이 저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게 타력 종교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성직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도에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신부님이 안 계시면 미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또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도, 신부님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부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지요. 반면 개신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회개할 때 신부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 개신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경험을 말씀드렸는데, 혹시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하시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노아의 홍수 때 비가 와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생물체 외에는 다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성경에 사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렇다면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도 다 죽어야 했을 텐데, 왜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 종교를 가질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선생님 연세가 일흔여섯이라고 하셨는데, 종교는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갖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종교는 자기 인생과 자기 죽음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오늘이 첫 통화인데, 그 통화 끝에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는 왜 살아 있느냐’를 묻는 것은, 마치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 독화살을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독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나? 이 독이 무슨 독인가?’만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사람이 죽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한 가지 일을 10년 동안 파고들면 전문가가 됩니다. 똑같은 일을 20년 동안 매일 하면 장인이 되고, 평생을 하면 문화재가 됩니다. 인간문화재가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태어나서 최소한 몇십 년은 사셨을 텐데, “인생 전문가”가 되어 계십니까? “인생 장인”이 되어 계십니까? “인생 문화재”가 되어 계십니까?
전문가나 장인, 문화재가 된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자유자재로 해냅니다. 여러분도 몇십 년씩 인생을 사셨다면, 여러분 인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떠십니까? 정말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계획하고 의도해서 한 일”이 많습니까, 아니면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된 일”이 더 많습니까? 계획한 것은 대개 실패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 있고, 여기 이렇게 앉아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많은 경우 여러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된 일들이 쌓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누구의 인생입니까? 여러분 인생입니까? 왜 여러분 인생인데, 여러분 마음대로 안 됩니까?
내 인생이 정말 내 것이라면, 내 육체도 내 육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도 막지 못하고, 머리에 하얗게 올라오는 흰머리도 막지 못합니다. 내 몸이 내 것 같지만 전혀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저는 2013년에 제 전립선 캡슐 안에 암세포가 가득 들어차고, 그것이 터져서 방광으로 흡수되기 전까지, 제 몸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립선 캡슐을 모두 드러내고 방광 일부까지 절제했지만, 그 이후에도 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어, 10년 넘게 1년에 두 번씩 검사를 받았습니다. 내 몸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의 기원을 아십니까?
여러분,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기원을 아십니까?
예전에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이 한 달 정도 저희 집에 와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둘이 점심을 먹는데, TV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내용이죠. 아메바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저렇게 진화해서 원숭이를 거쳐 사람이 되었다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다 보고 나서 제가 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저 내용이 믿어지니?” 그러자 그 청년이 “저렇게라도 설명하지 않으면, 인간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하더군요. 자신이 원숭이 후예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이 있습니다. 그가 인생 말년에 그린 그림 중에서 제목이 아주 긴 작품이 있는데,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그림입니다. 물질주의 세상의 염증을 느낀 고갱이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살면서 인생 말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사랑하던 딸이 죽었고, 자신도 임종이 가까워진 상태에서, 이 그림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가?”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그림에는 타히티 원주민 열두 명이 화폭 안에 등장하고, 그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기원과 삶의 의미, 그리고 죽음을 관조하는 자기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폴 고갱도 “인간의 기원이 “원숭이에서 왔다”라고 믿었다면, 그림 속에 원숭이가 뛰어다니고 있어야 했을 텐데, 그 그림 속에는 원숭이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고갱은 그 미국 의학도와 다르게, 인간의 기원을 생각했던 것이죠.
여러분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려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인생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초침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아날로그시계든 디지털시계든, 초침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갑니다. 그 1초가 우리 인생입니다. 그 1초 1초가 모여 1분이 되고, 10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평생이 됩니다.
인생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창한 것을 쫓아다니느라,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1초 1초’를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평생을 열심히 산 것 같고 분주하게 뛰어다닌 것 같은데, 막상 그 인생을 열어보면 속이 텅 빈 강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실제, 바로 이 ‘1초 1초’를 놓쳤기 때문이지요.
인생을 모래시계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물시계, 해시계, 여러 가지 시계가 있지만, 모래시계에만 있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위에 있던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위쪽에 빈 공간이 생깁니다.
이것을 여러분 인생이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인생 모래시계의 ‘윗부분’은 이미 텅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인생의 모래시계가 천년만년 지속될 것처럼, 계속 흘러내리는 모래를 욕망과 뒤바꾸며 삽니다.
인생은 2생, 3생, 4생이 아니라 단 한 번뿐입니다. 그 한 번뿐인 인생이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는데, 결코 다시 올라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욕망은 결국 자신을 잡아먹습니다. 쇠에서 나온 녹이 쇠를 잡아먹듯,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갉아먹습니다.
제가 또 인생을 ‘코숨’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말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리켜 ‘목숨’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인간의 생명을 ‘목숨’이라 하지 않고, “호흡은 코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나오지요.
목숨이라고 하면 ‘숨이 목에 달렸다’는 의미지만, 성경은 숨이 목이 아니라 코에 달렸다고 합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내 코로 내쉰 숨을 다시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은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코숨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밤, 혹은 언제라도 코숨이 멎으면,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을 부르는 호칭이 바뀝니다. 내 코끝에 숨이 있을 때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코끝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시체’라고 부릅니다.
여자가 아이를 배면, 그 생명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태아’라고 부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탯줄이 끊어지고 자기 코로 숨을 쉬는 순간, 비로소 ‘사람’이라고 부르죠. 그 아이가 숨을 쉬다가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시체’라고 부릅니다. 시체는 더 이상 ‘함께 삶을 나누는 존재’가 아니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부부 사이가 얼마나 좋아도,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 시체가 되는 순간, 아무리 금실이 좋았어도 그 시체를 일주일간 침대에 함께 눕히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코끝에서 숨이 끊어지면 시체가 됩니다. 장례식장에서 입히는 옷을 ‘수의’라고 하는데, 그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법상, 전 세계의 어떤 나라를 봐도,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재산이 그대로 고스란히 그 사람 소유로 남아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모두가 ‘상속’이라는 개념으로, 그 순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재산 분배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게 됩니다. 부자 집뿐 아니라, 작은 재산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식들은 싸우기 마련입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고 관에 넣은 다음 흙을 덮고, 거기다 사람들이 발로 꾹꾹 밟는 것은 ‘넌 절대로 다시 살아나면 안 돼’라고 확인하는 것과 같다”는 식의 표현을 씁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자를 파자해 보면 ‘죽을 사(死)’는 ‘한 일(一)’에 ‘저녁 석(夕)’과 ‘비수 비(匕)’가 합쳐져 있습니다.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수처럼 날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40여 년 하면서,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난 아이도 보았고,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신혼여행 짐을 싸다가 사고로 죽은 커플도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가던 신랑 신부가 그만 교통사고로 즉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어느 날 밤, 비수처럼 날아온 것입니다.
오늘도 한국 땅에서, 캐나다 땅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비수처럼 날아온 죽음의 칼을 맞고 코숨이 끊긴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그날이 오늘일지도 모르는데,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해발 560m쯤 되는 산간 지역입니다. 주로 포도와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저는 태어나서 줄곧 도시에서만 살았던 도시 촌놈이라,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꽃이 피어야 한다는 걸 거창에 가서 실감했습니다. 복사꽃, 사과꽃이 얼마나 예쁜지 몰랐습니다.
시골 분들은 “꽃이 핀다”라고 하지 않고 “꽃이 온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꽃이 핀다”라고 하면, 마치 농부가 퇴비 주고 땅을 갈고 열심히 노력하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농부들은 압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노력으로 꽃이 오는 건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꽃을 보내 주시는 거다.” 정말 여러분, 한 해 어떤 농장의 사과나무에 꽃이 하나도 안 오면, 그 농장은 농사가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도시 사람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우리 동네 분들은 “올해는 쉬어 가라고 하시나 보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가 꽃을 보내 주지도 않고, 그 부부 보고 올해는 좀 쉬라고 하신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감입니다.
그렇다면 사과꽃을 보내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그리고 “너희 부부, 올해는 쉬어라” 하고 꽃을 안 보내주시는 분은 또 누구실까요?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生)’ 자, ‘명(命)’ 자, “살라고 명하셨다”는 뜻입니다. 누가 “너 살아라” 하고 명했기에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겁니다.
불교 신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고,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창세기 1장 1절이 이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창조 안에는 저도, 여러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네 생을 살아라”라고 명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원은 누구신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결론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은 내가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인생 사용설명서’가 됩니다. “내가 너에게 인생을 주었으니, 이렇게 살아라. 너 만약 이렇게 살지 않으면 너의 모래시계 같은 시간이 다 흩어져버리고, 어느 날 코끝의 숨이 끊어질 때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용설명서대로 살면, “네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생명의 기원”이심을 알면서 사십니까?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기 어려울까요?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부터가 이미 하나님이 자기 생명의 기원임을 부정했습니다. 뱀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고 유혹했을 때, “아, 그럼 나도 하나님이 되고 싶다” 하고 하나님이 생명의 기원임을 부정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 이게 죄입니다.
헬라어로 죄를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과녁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걸 버린 게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기원이 되려 했을 때, 그들은 ‘죄의 공장’이 되었습니다. 그들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다 죄인입니다. 도덕적인 죄인이냐, 비윤리적인 죄인이냐, 지적으로 우수한 죄인이냐, 돈이 많은 죄인이냐, 착한 죄인이냐, 비열한 죄인이냐, 그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죄인의 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불쌍한 인간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의 죗값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치르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공장이었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공장’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Life Factory in Jesus"
바울은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주님이 부르셔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바울을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외친 고백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보라”는 말이, 우리말 번역으로는 연극 대사처럼 들리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감탄사에 가깝습니다. “여러분, 저 아시죠?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던 저를 아시죠? 그런데 주님이 저를 부르셔서 당신의 생명 공장 안에 있게 하셨더니, 저 좀 보세요. 제가 이렇게 새로워졌습니다! 옛날의 제가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그런 새로운 인생을 살다가 주님께로 갔고, 지금은 우리에게 영원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많은 여성분들이 남편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며 제게 상담하러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보라! 저 좀 보세요. 저렇게 허랑방탕하던 저도 주님께서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데, 왜 당신의 남편은 새롭게 못하시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감사한 게 참 많지만, 그중 하나는 제가 허랑방탕하게 술독에 빠져 살던 죄인이었는데, 주님이 저를 불러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10년 동안이나 제 코끝에서 알코올 냄새나 담배 냄새를 풍기는 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 네 명은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아빠 입에서 술 냄새나 담배 냄새가 풍기는 걸 맡지 않고 자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 스스로가 인생의 기원인 것처럼 살지 않고, 주님을 나의 기원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생명의 공장’ 안에 거하며 새 피조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아내가 나를 남편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되고, 내 남편이 나를 아내로 삼은 것을 무한히 행복하게 느끼고, 내 자식들이 “나도 커서 우리 엄마 같은 크리스천, 우리 아빠 같은 크리스천이 될 거야”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오늘 밤, 여러분이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떼는 역사적인 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무엇을 하며, 끝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바르게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명하셨기 때문임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 인생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인생 사용설명서’,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금부터 생명의 공장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도와주십시오.
언젠가 불현듯 제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이 영원하신 품으로 나를 안아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우리의 삶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는 이정표로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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