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훈 목사님 설교 @20241215
뒷모습 -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뒷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어떤 말을 남기게 될까요? 그리고 그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목사님 말씀의 취지는 단순히 인생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 머문 자리 그 뒷모습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를 도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께 마지막 들은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고들을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깊이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평소 뜻에 따라 아버지의 시신을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이제 곧 만 3년 만에 돌려받아 화장을 하고 봉안하려 합니다.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여전히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사도행전 20:24 말씀은 주경훈 목사 자신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0:13에서 바울은 일행을 먼저 보내고 앗소까지의 32km 길을 혼자 걸어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마지막 인생의 매듭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는 혼자 걸어가며 여러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이윽고 앗소에서 일행들은 만난 바울은 신속하게 밀레도까지 이동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며 남긴 고별 설교이며 이른바 '밀레도 설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바울 본인이 에베소로 직접 가지 못했기에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불러내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전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바울의 다른 설교들과는 달리 이 본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를 향한, 성도들을 향한 설교입니다.
바울의 고별 설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 '깊은 내적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깊은 내적 태도 – 겸손과 눈물 (행 20:18-19)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내적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내면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태생이 아닌 태도가 자리를 만든다. 타고난 미모는 눈을 사로 잡지만 기품 있는 태도는 영혼까지 사로잡는다.
- 볼테르-
- 모든 겸손: 겸손은 우리가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 정도면 겸손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생각이 교만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겸손은 감정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상황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이미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넘어질 곳이 없기에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 또한 모든 상황 속에서 겸손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눈물: 바울은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의 아픔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눈에 눈물이 고여 있어야 합니다. 그 눈물은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시키고,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 눈물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과 교회, 그리고 나라를 위한 눈물입니다.
시편 56편 8절은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유리함을 계수하셨사오며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셨나이다.”
성도의 눈물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귀하게 여겨집니다. 눈물이 고인 땅은 메마른 땅과 달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도 이처럼 따뜻한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높은 사명'을 지녀야 합니다.
높은 사명 – 성령에 이끌림, 열정, 그리고 헌신 (행 20:22-24)
사명은 깊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열망입니다. 내적 태도가 겸손과 눈물로 다져질 때, 우리는 높은 사명을 품게 됩니다. 깊은 내면에서 비롯된 것은 바로 높은 사명입니다. 이 둘 사이의 낙차만큼 우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 성령에 매임: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단어는 '묶이다, 속박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마치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성령의 강력한 이끌림을 받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성령에 매인 사람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일지라도 기꺼이 순종합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소명을 피할 수 있다면, 당신은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스펄전 목사의 말처럼, 소명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높은 사명에 붙들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열정: 바울은 이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한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단순히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위해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정은 목적지에서 나옵니다. 명확한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면 돌파하며 달려갔습니다.
사명을 향한 열정이 식으면 세상의 열정이 대신 타오르게 됩니다.
‘Passion’의 어원인 ‘Passio’가 고통과 열정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처럼, 진정한 열정에는 고난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향한 열정을 유지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일입니다. - 포기하지 않는 헌신: 바울은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라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포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명자는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과거 선교 여행 중 도망치는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죽을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기에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자신의 마지막 여정임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정녕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를 위하여 드리는 어떠한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If Jesus Christ be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 C.T 스터드 -
맺는말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두 가지 중요한 방식을 배웠습니다.
깊은 내적 태도, 즉 모든 겸손과 눈물을 지니고, 높은 사명, 즉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하며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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