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항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찬송가 302장 “은혜의 바다”, 373장 “고요한 바다로”,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의 가사처럼,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때로는 잔잔한 은혜를, 때로는 거센 풍랑을 경험합니다.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 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 입 벌려 달려드나
이 바다에 노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큰 소리로 물결을 명하시면
이 바다는 고요히 잠자리라
저 동녘이 환하게 밝아올 때
나 주 함께 이 바다 건너가리
(후렴)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마태복음 8:24)
With Christ as My Pilot.
(STEERING FOR HOME.)
Tho' high roll the billows on life's stormy sea,
A light in the distance is shining for me ;
Tho' oft it is hid by the wild dashing foam,
With Christ as my Pilot, I'm steering for home.
비록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에 높은 파도가 일렁여도
저 멀리서 나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 있습니다.
때로 거친 물보라에 가려질지라도
그리스도를 내 항해사로 삼아, 나는 집을 향해 나아갑니다.
The winds of misfortune around me may blow,
And shadows may darken the way as I go ;
Not long from the harbor of rest will I roam ;
With Christ as my Pilot, I'm steering for home.
비록 불운의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치고
걸어가는 길에 어둠이 드리울지라도,
머지않아 안식의 항구에서 멀리 떠나 있지 않으리니,
그리스도를 내 항해사로 삼아, 나는 집을 향해 나아갑니다.
His voice can command and the tumult will cease;
The waves of the sea can he speak into peace ;
His sky can o'erarch me a sheltering dome ;(overarch)
With Christ as my Pilot, I'm steering for home.
그분의 한 마디 말씀에 소란이 잠잠해지고,
거친 파도도 평온으로 잠재우실 수 있으며,
그분이 펼치시는 하늘은 나를 보호하는 커다란 지붕이 되니,
그리스도를 내 항해사로 삼아, 나는 집을 향해 나아갑니다.
[후렴]
My course o'er the deep I'll stead-fastly keep,
For never a moment my Pilot doth sleep;
Not long on the wild stormy sea will I roam;
With Christ as my Pilot, I'm steering for home.
깊은 바다 위에서도 나는 내 항로를 굳건히 지키리니,
내 항해사께서는 단 한순간도 잠들지 않으시거늘.
거친 폭풍의 바다를 오래 떠돌지 않으리라,
그리스도를 내 항해사로 삼아, 나는 집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항해를 위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풍랑과 거센 파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배의 크기, 장비, 경험 등 우리의 준비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전한 항해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갈대상자’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긴 채, 아무런 동력도 없이 물살에 맡겨 떠다녔습니다. 인간의 준비로 볼 때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살리시고, 결국 200만 명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선장이 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로마로 향하는 항해 이야기를 통해 폭풍 속에서 어떻게 “안심”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됩니다(행 27:1).
아드라뭇데노라는 무역선을 타고 1600km의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무라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호로 배를 바꿔 탔는데, 무라(Myra)는 4세기경 그곳 교회의 감독이던 성聖 니콜라스가 특별히 남몰래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어 유명해진 곳입니다.
무라와 산타클로스, 그리고 성탄절
니콜라스 사후에 그의 선생이 노르만족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12세기 초에는 프랑스 수녀들이 니콜라스 축일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이러한 관습이 유럽에 확산되어 가족 중 한 명이 니콜라스의 분장을 하고 나타나 아이들에게는 칭찬과 선물을 주었는데, 17세기 미국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Saint Nicholas를 산타클로스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12월 6일을 기념했다가 뉴욕의 이주민들에 의해 12월 25일로 합쳐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1886년 12월 24일 메리 스크랜튼 여사 (1885년 6월 30일에 정동에 도착하여 8월에 미국공사관 근처에 큰 집 1채를 매입했고 10월 23일에 19채의 한옥과 6200평의 대지를 매입)가 이화학당에 성탄 트리를 세웠고, 1887년 12월에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성탄절을 소개하며 양말에 선물을 담아 주었고 이것이 한국의 첫 번째 산타클로스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해방 후 미군정 시절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순탄할 것 같던 항해는 곧 위기를 맞이합니다.
때는 금식하는 절기인 속죄일(10월 5일)이 지난 후였습니다(행 27:9). 이는 겨울 바다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항해의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영향력이 없던 바울은 항해를 늦추자고 말렸으나 항해는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전문가'인 선원들의 예상대로 남풍이 순하게 불어 그레데 해변을 따라 순조롭게 항해하는 듯했으나(행 27:13), 곧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몰아닥칩니다(행 27:14). 유로스(Euros 동풍)와 아퀼로(Aquilo 북풍)가 합쳐진 이 광풍은 배를 걷잡을 수 없이 흔들었고, 스르드스라는 모래톱에 좌초될 위험까지 안게 했습니다(행 27:17). 선원들은 처음에는 연장, 짐들을 버리고, 심지어 배의 기구까지 바다에 버리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큰 풍랑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사람들은 구원의 여망마저 잃게 됩니다(행 27:20).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한다 해도 고난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의 순간에 바울은 “이제는 안심하라”라고 선포합니다(행 27:22). 그의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폭풍 속에서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
첫째,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행 27:23-24 참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풍랑이 시작되던 그날 밤’ 바울은 이미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풍랑이 닥친다 해도 하늘을 향한 채널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폭풍같이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예민한 청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 귀가 열려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사야 50장 4절에서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신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 청력’이 개발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피터 로드 목사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의 집을 방문했던 플로리다 곤충학자가 귀뚜라미 울음만 200가지 이상을 구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듣는 능력도 충분히 개발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적 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 듣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할 때, 우리 영의 귀가 예민해집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뒤 일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도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니라,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 자체가 지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행 27:24)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풍랑 속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이 남아 있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어떠한 풍랑도 더 이상 우리를 잠식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위기 가운데 있더라도 붙잡을 하나님 말씀이 있다면,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바울은 배 안의 모든 사람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전문가 또는 권력자인 선장과 백부장이 주도했던 항해였지만, 이제는 바울의 말에 모두가 귀 기울이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믿음
둘째,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5)
폭풍 앞에서도 바울이 안심하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각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풍랑을 만나지만, 모든 예배 시간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말씀으로 시작된 이 땅과 우리의 인생은 말씀으로 붙들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환경도 믿지 말라. 오직 하나님을 믿어라.
우리 스스로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환경이나 상황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선포한 후에도, 풍랑은 10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끌어 갑니다.
“먹고 힘을 내십시오. 이제 우리가 상륙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살리실 것입니다.” (참조 행 27:34)
자신만의 살길을 찾기 위해 혼자 도망치려는 사공들이 있었으나 군인들이 그 구명정 줄을 잘라버리자 모든 사람은 바울의 지시대로 한마음이 됩니다.
풍랑이 여전한 가운데,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떡을 떼며 하나님께 축사합니다. 이는 작은 ‘성만찬’과도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행 27:36 참조)
겨울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난파 직전인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을 떼며 담대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안심하고’ 받아먹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자신의 평안을 주변 사람들과도 나눕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가득해야 할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품고 떡을 떼며 축사하는 모습이야말로 참 성도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바울의 말대로 음식을 먹고 힘을 낸 뒤, 닻도, 키도, 배의 기구까지 전부 버리면서 마지막으로 배가 닿을 해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혹자는 널조각을 붙잡고, 또 혹자는 배에 있던 물건 조각을 붙잡고 헤엄쳐서 모두 무사히 상륙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멜리데 섬(지금의 몰타)에 도착합니다(행 27:44).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곳이었지만, 그 풍랑으로 인해 오히려 더 빨리 목적지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시편 107편 28-30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선장이 되어 주시며 우리를 “바라는 항구”,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목적지, 그 항구는 우리 스스로 힘으로만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선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결론: 선장 되신 예수님을 믿고 항해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머리 위에는 폭풍과 구름만 보이지만 그 너머, 그 위에는 맑은 하늘이 여전如前히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선장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항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폭풍 속에서도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믿음의 항해를 꿋꿋이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If, on a qui-et sea, Toward heaven we calm-ly sail
With grate-ful hearts, O God, to Thee, We'll own the fa-voring gale.
고요한 바다 위에 고요히,
하늘 향해 항해할 때
하나님, 감사로 고백합니다.
이 순풍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But should the surg-es rise, And rest de-lay to come,
Blest be the tem-pest, kind the storm, Which drives us near-er home.
하지만 거친 파도가 일고
쉴 곳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폭풍 또한 복이 되니
우리를 더 가까이 고향으로 이끕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Soon shall our doubts and fears All yield to Thy con-trol;
Thy ten-der mer-cies shall il-lume The mid-night of the soul.
머잖아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은
주님의 다스림 아래 잠잠해지고,
주님의 자애로운 긍휼이
영혼 깊은 밤을 밝히시리이다.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Teach us, in ev-ery state, To make Thy will our own;
And when the joys of sense de-part, To live by faith a-lone.
주여,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우리 뜻으로 삼게 하시고,
감각의 즐거움이 모두 떠나갈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의 하이픈은? (시 23:1~6) 이재철 목사님 (0) | 2024.12.30 |
---|---|
그대의 시간은? (딤후 4:6~8) 이재철 목사님 (0) | 2024.12.30 |
그대의 기원은? (창 1:1) 이재철 목사님 (0) | 2024.12.30 |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두 가지 삶의 방식 (행 20:17-24) (0) | 2024.12.15 |
성령님과 방언 - 김학철 교수 (0) | 2024.12.08 |
당신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김은호 목사 (0) | 2024.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