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시간
분명한 사실은 오늘 하루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이 마감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이 마감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며,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일 아침을 맞이해서 눈을 떴을 때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인생은, 생명을 명하신 분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시간의 길이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의 선택
인생이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주어진 시간을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바꾸어 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 하루 동안 주어진 시간을 무엇과 바꾸는 것이고, 평생을 산다는 것은 평생의 시간을 무엇과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을 학문과 바꾸는 사람은 학자가 되고, 상업과 시간을 바꾸는 사람은 사업가가 됩니다. 도박과 바꾸는 사람은 도박꾼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과 자기 시간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과 바꿔 오셨습니까? 그 결과가 바로 여러분의 현재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과 바꾸려고 하십니까? 그 ‘무엇’에 따라 여러분의 내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매일, ‘나는 내 시간을 무엇과 바꾸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내 인생에서 시간이 소진되는 순간—어제 표현대로 내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그때야 비로소 후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른 해는 질 때까지 빛을 아름답게 비추지만, 해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의 끝자락에 이를수록 석양처럼 깊고 풍성한 감동을 전하며 붉게 물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은 저녁노을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가 낙향해 지낸 뒤로, 그 노을이 아름다워서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마당에서 일하다가, 책상에 앉아 책을 보다가도, 갑자기 분홍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 창문 너머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곤 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저희 지역을 ‘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르는 노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지요.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사람의 일생도 마지막이 그렇게 ‘단이 노을’처럼 붉고 아름답게 물든 채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왜 쉽지 않을까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은퇴하고 나면, 자기 취미생활에 올인합니다. 물론 취미생활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취미생활의 공통점은 ‘자기만의 만족’이나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란 점입니다.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 취미생활에만 집중한다면, 거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은퇴한 남성들이 누리는 취미가 많이 있습니다. 색소폰 배우기, 붓글씨 배우기, 골프 등등. 저희 집에 오시는 분들께 가끔 묻습니다. “오늘 밤에 색소폰 불다가 코끝에서 호흡이 끝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요. 그러면 그분들이 말을 잘 못하십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유실수와 느티나무
위니펙의 겨울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 나무 잎이 다 떨어져 있습니다. 나무의 잎은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그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돕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도 하지만, 동시에 그 나무를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옷’ 역할도 합니다. 잎이 무성할 때는 모든 나무가 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되어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가지들만 남지요.
그런데 잎이 다 떨어졌는데도 상하지 않고, 가지들만 남았는데도 여전히 우람한 위용을 뽐내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느티나무 같은 종류입니다. 느티나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단 한 번도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유실수(열매 맺는 나무)가 아닌 느티나무 같은 경우, 얼마나 오래 자라도, 그 나무는 전혀 상하지 않고 웅장하게 자랍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500년 된 마을인데, 그곳에 500년 전에 우리 고장으로 이주해 온 누군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500년 된 나무라, 잎이 다 떨어진 지금도 기세가 엄청납니다. 어른 서너 명이 팔 벌려야 둘레가 겨우 닿을 정도입니다. 500년이나 살았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명의 열매’ 한 번 맺어준 적이 없는 나무인데도 저렇게 웅장합니다.
반면, 평생 감을 생산하고, 평생 포도를 생산하고, 평생 사과를 생산한 유실수들은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들이 뒤틀려 있고, 앙상합니다. 그 나무들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이후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 적이 없습니다. 전부 남을 위해 살아온 것이지요.
제가 거창에 처음 내려갔을 때, 저희 사랑채 뒤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나무의 중간 부분이 썩어 가더군요. “이걸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메워서 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베어야 할까?” 고민이 되어, 저하고 나이가 비슷한 동네 어른께 물었습니다. “우리 집 감나무 좀 봐주세요.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이거 어릴 적부터 우리도 다 올라가서 놀았던 나무인데, 100년 됐습니다. 유실수는 100년 넘기면 수명이 다합니다. 이건 베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열매를 맺지 않는 느티나무는 500년이 지나도 늠름하지만, 남을 위해 자기 진액을 다 내준 유실수는 100년을 못 넘기고 썩어 갑니다. 그래서 군청에 요청해서 그 감나무를 결국 베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그렇지만 저희 집에는 아직도 감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그건 100년까지는 안 된 나무니까요. 지금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게 뒤틀려 있지만, 그 모습을 보면 꼭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여러 형제들을 전부 모유로 먹여 키우시느라, 자기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수고하셨듯이, 그 감나무도 자기를 돌볼 새 없이 열매를 내어 주었구나. 그래서 옛날 우리 어머니들 젖무덤이 밀가루 반죽처럼 처져 있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 처진 젖무덤이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하고 거룩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셨는데, 만약 주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자기만을 위해 500년이 지나도 위험을 뽐내는 느티나무’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진액을 다 내주어 뒤틀린 유실수’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은 자기 자신을 다 내어 주신 유실수 같은 모습을 하셨지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의 지체에 비유하자면, 8형제 9형제를 먹여 살리느라 본인 몸을 돌보지 못해 축 처진 옛 어머니들의 젖무덤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울의 고백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디모데후서 4장 6절) 이 고백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한 말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의 목적에 따라 제사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번제’, 희생과 봉사를 의미하는 ‘소제’, 모두가 함께 잔치를 나누는 ‘화목제’,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 속죄하는 ‘속죄제’, 그리고 손해를 끼친 물건을 보상하기 위한 ‘속건제’ 이렇게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따라서 다시 네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재물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올리는 ‘화제’, 재물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거제’, 재물을 제단 위에서 흔들어 드리는 ‘요제’, 그리고 포도주 등 액체를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전제’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을 전제에 비유했습니다. 마치 컵에 물이 있는데, 그 물을 전부 부어버리면 얼마나 남았는지가 훤히 보이는 것처럼, 그는 자기 ‘인생(시간)’을 하나님 앞에 다 부어 드렸고, 이제 거의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디모데후서 4장 7절). 인생은 생존 경쟁이어서, 누구나 싸우며 삽니다. 그러나 싸움이라고 다 같은 싸움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남을 짓밟는 싸움이 있고, 불리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마지막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길을 달리지만, 대개 욕망의 길을 달립니다. 욕망은 물거품과 같습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넣고 휘휘 젓으면 거품이 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꺼져 없어지는 것이 거품입니다. 욕망의 길을 달려 재산을 모았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죽으면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남은 재산 때문에 자식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울은 자기 욕망의 길이 아니라, ‘소명의 길’을 달렸습니다. 주님이 주신 길을 완주하기 위해 자기 생을 걸었습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은 지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고, 그러려면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와 행동, 실천이 따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켰다”라고 할 때 쓴 헬라어 동사는 ‘테레오(τηρέω)’입니다. 테레오는 ‘파수꾼’을 뜻하는 명사에서 유래한 동사입니다. 바울은 자기 믿음의 파수꾼이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삶에 자기 인생(시간)을 바친 이유는, 바로 그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돌을 들어 나를 치려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 답을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찾았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인지 바울은 알 수 없습니다. 알았다면 애써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주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누군지 모르기에, 바울은 지중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매 맞고, 파선당하고, 굶주리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들을 당해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27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으며,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하였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내었으며, 여러 번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라고 고백합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요? 오직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의 생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자기만 아는 웅장한 느티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느라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린 유실수 같지 않습니까? 옛날 어머니의, 밀가루 반죽처럼 축 처진 젖무덤과도 같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 자기 시간을 몽땅 바친 사람, 우람한 느티나무가 아니라 뒤틀린 유실수의 모습으로 살아간 사람에게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지(四肢)와 백체(百體)’를 보십시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른손이 가렵다면, 왼손이 그걸 긁어 줍니다. 내가 밥을 먹으려면 손이 내 입으로 음식을 가져다줍니다. 그 음식은 위에서 소화시키고, 우리 온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발은 내가 걷고 싶은 곳으로 이동을 돕지요. 우리 몸은 이렇게 서로에게 봉사하는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작 그 몸을 가진 사람은 이기적인 느티나무처럼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봉사의 지체를 가지고도 욕망만 좇는, 가장 무서운 맹수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 영화 <빠삐용>을 보면, 스티브 맥퀸이 악명 높은 ‘악마의 섬’ 감옥에서 계속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탈출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왜 탈출하려 했는지는 영화만 보면 좀 모호합니다만,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 앙리 샤리에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별명이 ‘빠삐용(나비)’이었던 그는,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뒤,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그를 죄인으로 몰아넣은 검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한 것이지요. 그는 후속 책 <방고(망고/Banco?)>에서 “남미의 밀림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는 인간”이라고 고백합니다. 맹수는 정면에서 달려오면 총으로라도 맞설 수 있지만, 인간은 웃는 얼굴로 뒤에서 등을 치기 때문에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남을 해치고 욕망만을 위해 사는 가장 무서운 맹수가 되어 버릴까요? 그건 우리가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잘못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코끝에서 호흡이 끝나면, 우리는 엄청난 후회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죽음과 삶의 마무리
제가 쓴 책 중에 ‘죽음’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은 아침에 나온 집으로 저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당연히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전 세계 곳곳에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달(설교 시점 기준) 10월 19일에, 저는 아내와 함께 거창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부산에 가서 일을 보고,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10월 20일)에 거창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 여섯 대가 부러지고 금이 가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것은 11월 4일이었습니다. 제가 계획한 날보다 보름이나 늦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도 제가 ‘살아 있을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 고속도로에서 제 시간이 끝났다면, 저는 제 집에 영영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은 또 ‘오늘 밤에 잠들었는데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잠든 채로 다시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집을 나간다면 시체로 나갈 것’이라는 말이 있지요.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이 내 방문과 내 서랍, 내 금고를 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잠가 두었지만,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가 그 문과 금고를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평생 붙들고 살아온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죽음은 ‘내가 앉던 자리와 내 부엌, 내 책상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내가 평생 내 자리에서 일할 것 같아도,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앉습니다. 내가 늘 하던 일을 말끔히 정리하지 않았다면, 뒷사람이 고생을 하겠지요. 실제로도, 죽은 이가 엉망으로 놔둔 재정과 복잡한 서류들 때문에, 자식들이 혹은 후임자가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죽음은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나는 죽을 때 자식들 다 불러 모아 찬송 부르게 하고, 내가 유언 남기고, 천국에서 만나자며 평온히 눈을 감겠다”는 환상을 품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죽는 사람은 만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합니다. 대다수는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나 심정지 등으로 작별할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웅장한 느티나무 같은 인생을 살다 가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통곡하며 고생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삶의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아니라,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코끝에 숨이 붙어 있는 그 순간까지, 한 방울의 진액이라도 누구에게 나누어 주는 유실수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앙상하고 뒤틀린 모습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을 살리고 섬기는 일과 내 시간을 맞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 안에서 “머지않아 전 국민의 3분의 1이 크리스천이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전 세계가 기독교 쇠퇴를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가, 자기만 아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땅의 교회가, 교회를 구성하는 크리스천들이 바울처럼,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시간, 자기 삶을 마다하지 않는 ‘유실수’로 살아갔다면, 교회는 생명력이 넘치고,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마다 웅장한 느티나무를 추구하니, 사람들은 생명을 찾지 못하고 교회가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는 어떻습니까? 눈을 감고, 여러분 교회의 영적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돌아보세요. “나는 지금까지 나만을 위한 웅장한 느티나무가 되기 위해, 그 소중한 시간을 써 온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천년만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을 주신 분이 허락하신 시간의 길이만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가 얼마나 남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나만 아는 느티나무가 아니라, 비록 곧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내 진액을 쏟아내는 ‘유실수’가 됩시다. 옛 어머니들의 축 처진 젖무덤처럼, 온몸과 시간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섬기는 삶이 됩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통해 위니펙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또 언젠가 여러분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주님께서 반드시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그동안 우리 자신을 웅장하고 거대한 느티나무로 가꾸기에 몰두하느라, 황금보다 더 귀한 인생의 시간을 아무 의미 없이 탕진해 온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생이 곧 시간임을 일깨워 주신 주님, 우리가 얼마나 더 살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부터는 그 남은 시간을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고 살리는 일과 맞바꾸는, 옛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모습이, 비록 상하고 뒤틀린 유실수 가지 같더라도, 참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번 위니펙 교민 초청 집회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을 통해 각자의 인생에 새로운 획을 긋는 결단을 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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