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보빙이라는 분이 『환희의 인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매우 시적이고 또 영감이 많은 책인데, 그 책을 딱 열면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좋은 얘기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해보는데요. 다시 얘기하면,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그러나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일이 글 쓰는 일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보시면 팔레스타인 분들이 살고 있는 쪽에 분리 장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6미터짜리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져 있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인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갔었는데, 제가 가이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으로 들어갈 때 장벽을 통과하잖아요. 그때 잠깐 차를 세워서 우리 교인들이 그 장벽을 좀 볼 수 있게 해 달라.” 그런 요청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저는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 장벽에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옛 베를린 장벽처럼, 동서를 갈라놓았던 그 장벽에 수많은 그림이 있듯이, 이 분리 장벽 위에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많은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기도 하고 그렇죠. 저는 점점 그 그림을 보다가 더 깊은 곳까지 가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곳까지 가서, 거기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던 젊은 팔레스타인 남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그래서 이러저러해서 왔다고, 분리의 담장을 보고 있다고 했더니, 그들이 저에게 이렇게 정색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여백조차 없습니다. 희망은 사치스러운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들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고,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차로 돌아와서 교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꿈같은 일이구나.” 하고 마음이 뭉클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담장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두고 글을 쓴 외국 분이 계셨어요. 많은 인터뷰를 했는데,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창문도 그려져 있고, 창문 밖에는 산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숲도 보이고 어떤 그림에는 바다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갇힌 세계 속에서도 뭔가를 꿈꾸도록 해주는 거죠. 또 어떤 데는 사다리를 그려놓기도 합니다. 물리적인 사다리를 걸 수는 없지만, 사다리를 통해 장벽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기자가 어떤 사람에게 물었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다 장벽을 세운 까닭이 뭘까요?”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우리 보고 날아보라고요.” 유머가 있고 상상력이 있는 말이죠. 저는 글 쓴다는 행위가 꼭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티안 보빙의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굉장한 언어 능력을 지녔다고 하는 점일 겁니다. 물론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나 다른 동물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런데 그건 언어라고 부르기보다는 소통 방식인 거죠. 또 그들의 생물학적 조건이 우리처럼 모음과 자음을 통해 풍부하게 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으니, 인간만큼의 ‘무수히 다양한’ 언어를 갖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무한대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경험이라는 게,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내가 안다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티베트나 중국 쪽 문화권에서 차를 마실 때, 사람들이 차 맛을 음미하고 나면 돌아가면서 차 맛에 대한 이야기를 한답니다. “이 차 맛은 이렇다.” “이건 이런 느낌이네.” 하고 각자 표현할 때, 누가 한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면, 사람들이 “맞아, 바로 그거야.” 하고 공감하는 거죠. 그게 언어입니다.
결국 우리의 경험은 언어화되지 않으면 인식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차 맛을, 언어를 통해 “바로 이 맛이다!”라고 표현하고, 그걸 딱 들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맞아.” 하는 순간, 그 맛이 인식되는 거죠.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언어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시면, 초식동물들도 싸워요. 이른바 ‘짝짓기의 권리’를 두고 싸우기도 하고, 힘을 겨루려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싸워서 승패가 갈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옆에서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볼 때가 많죠.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한 번 싸웠는데 그다음에 바로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감정이 남고, 풀리지 않은 데가 있으면, 같이 밥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어떻게 화해하는 거고, 인간은 왜 화해가 어려운 걸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동물은 자기 경험을 언어화하여 기억하지 않으므로, 감정에 오래 매이지 않아요.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기 경험을 저장하고 곱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과 싸웠는데, 그게 아직 풀리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 식으로 기억을 이어가죠. 그러니까 인간에게 언어가 정말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언어 능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게 좋았는데, 딱 하나 “좋지 않았던 것”이 있죠. 그게 뭐냐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돕는 짝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하고, 처음 한 일이 동물들을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라고 하잖아요. 그건 어떤 사건일까요?
물론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게 대략 2만 년 전쯤이라고도 하고, 농사를 시작한 게 1만 2천 년 전쯤이라고도 합니다만, 그건 다른 얘기고요.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라는 건, 자기가 아닌 외부 대상들과 ‘언어’를 통해 유의미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어떤 대상을 이름 붙여보지 않으면, 사실 그 대상을 ‘내가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봄에 젊은이들과 산책을 가면, 나무들이나 들꽃이 활짝 피어날 때가 있죠. 제가 젊은이들에게 “저 꽃이 뭔지 아니?” 하고 물으면, 요즘 젊은이들은 자연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지하죠. 접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요. 그러다 “이건 노랑제비꽃이야.” “이건 양지꽃이야.” “산수유, 오리나무 꽃, 생강나무 꽃이야.” 하고 알려줘요. 그런데 계속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힘들어지니까, 결국 젊은이들이 “노란 꽃이죠.” “빨간 꽃이죠.” 이렇게 퉁쳐버리기도 합니다. “이름을 모르니, 그냥 노란 꽃, 빨간 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때, 그 대상과 유의미한 관계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김춘수 선생님 시 「꽃」에서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표현하잖아요. 이게 바로 기호학적인 분석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시구이지만,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이름 붙이지 않으면 안다 말할 수 없다.” 하는 얘기입니다.
언어의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죠.
그런데,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대목을 보세요. 아담이 혼자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이 동물들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는데, 여전히 아담은 쓸쓸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재우고, 그의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들었죠.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자기 앞에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존재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하리라.” (새 번역 성경 표현)
이게 세계 최초의 문장인 셈인데, 문학적으로 살피면 “경탄” 그 자체입니다. 제가 언어학자도 아니고 신학적으로만 읽지만, 인간이 처음으로 구사한 문장이 사랑 고백이었다는 사실이 참 의미심장하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본질적인 까닭은, 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을 이어주라고 한 것 아닐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이어준다.”라고 하면, 음악에서 ‘레가토(이음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랑 고백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레가토의 언어가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선악과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죄의식을 느끼고 수치를 알아차리고 뭔가를 가려야 할 것들이 생겨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언어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네가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했느냐.”라고 아담을 책망했을 때, 아담이 뭐라고 해요? “당신이 주셔서 내게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 때문에 그랬다.”라고 하죠. 그리고 여자는 “뱀이 나를 꾀었어요.”라고 합니다. 이게 언어가 이어주는 말이 아니라, 갈라놓는 말로 변해버린 순간이죠.
결국 누가 언어를 독점하느냐가 권력이 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어주는 언어가 사랑이었다면, 갈라놓는 언어는 권력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권력을 장악하면 제일 먼저 언론 통제를 하잖아요. 언어가 곧 권력이기 때문이죠. 이런 언어적 사건의 실체가 또 바벨탑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창세기에서 “온 땅에 언어가 하나밖에 없었다.”라고 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저기 저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라고 합니다. 일사불란하게 언어가 하나니까 가능했겠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바벨탑을 흩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십니다. 어떤 해석학자들은 이것을 은총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언어만 존재하는 세상은 곧 ‘독재’나 ‘동일성의 폭력’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다름”이 사라져 버리면 세계가 팍팍해지고 폭력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동일성의 폭력 속에서 새로운 해방을 허락하신 거라고요.
아무튼, 이렇게 인간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언어가 점점 빈곤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시인 연문희 선생님 글에서 보니까, 2000년대 문학활동을 하는 이들의 어휘량과 1920년대, 1930년대 작가들의 어휘량을 비교 분석해 봤더니, 오히려 1920~1930년대 작가들이 2000년대 작가들의 두 배 이상의 어휘를 쓰고 있다는 거죠. 이 말은 우리가 점점 “어휘가 빈곤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말 들어보면 “헐” “대박”처럼, 감탄사 몇 개로 모든 걸 다 표현해 버리곤 합니다. 뭔가 엄청 놀라운 게 있으면 “헐” 하고, 엄청 좋으면 “대박” 이렇게 퉁쳐요. 사고의 폭이 줄어드는 거죠.
이런 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 이미 예견했다고 봅니다. 『1984』는 빅 브라더(Big Brother)가 감시하는 세상이잖아요. 거기서는 “올드 스피크(Oldspeak)”를 없애고 “뉴스피크(Newspeak)”, 즉 ‘신어(新語)’만 남기려고 해요. 그들은 언어를 줄이는 게 목표입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good”(좋다)의 반대말이 “bad”인데, 이걸 굳이 철자도 다른 “bad”로 쓸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냥 “ungood”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훌륭하다(excellent)”라는 말도 굳이 또 다른 말로 쓸 필요 없이, “plus good”이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더 좋으면 “double plus good”이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언어를 단순화시키는 거죠.
그렇게 하면 사고의 폭을 줄일 수 있으니까,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목표라고 오웰은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느 정도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많은 걸 디지털 세계에서 손가락만으로 표현하잖아요. “좋아요” 버튼 하나 누르면 “나 좋아해 줬으니까 됐다.” 이런 식으로 소통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요. 이게, 정보사회 속에서 우리의 언어 감각이 무뎌지고 있는 실상입니다.
얼마 전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실제론 맨부커상을 수상했지만, 여기선 작가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자가 오길래 열어봤더니 한강이 상을 받았다고. 한강 시인/소설가가 쓴 시 중에 「해부극장 2」라는 시가 있어요.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하고 대답할 때.” 이런 내용이 이어지는데, 시인은 혀와 입술이라는 게 먹고 말하는 장기인데, 자기 말을 발화할 때 “견딜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안녕”이라고 하는 인사말, 정말 저 사람이 안녕한지 궁금해서 묻는 걸까,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 역시, 사실 상대의 생각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자기 생각을 바꿔보겠다는 의지에서 묻는 걸까, 아니면 내 말하려고 묻는 건 아닐까. “정말이에요?”라고 할 때, 정말 그것이 진심임을 표현하는 걸까, 아니면 ‘자기 합리화’ 같은 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언어가 나를 배신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처럼 글쓰기라고 하는 건, 우리 언어가 어떻게 이음을 만들고(사랑), 또 어떻게 갈라놓고(권력), 또 어떻게 상투적인 말로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드는지를 예민하게 살피는 데서 출발합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저는 이런 자리에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 묻는 분들께 늘 말씀드립니다. 정답은 저도 모릅니다. 누가 “글쓰기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하면, 저도 “그거 좀 알려주세요.”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래도 제가 느낀 걸 말씀드리면, 첫째, 글쓰기엔 어휘력이 많아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 경험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넉넉해야, 글이 살아납니다.
둘째,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글 쓰는 사람은 늘 뭔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에요. 예컨대 소설가 이승우 선생님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수첩을 펴놓고, 상대방이 하는 말, 혹은 그 말로부터 연상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적는 분이죠. 이걸 “적자생존”이라고 농담도 하잖아요. “적는 사람만 살아남는다.”라고. 왜냐하면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들을 붙잡아두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메리 올리버(Mary Oliver)라는 시인은 『긴 호흡』이라는 책에서 “나는 변덕스럽지만 진지하게 일을 시작한다. 내게 일이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을 적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걷고, 관찰하고, 적는 행위가 글쓰기의 기본이라는 거예요.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잖아요. 중형을 받고, 무거운 차꼬까지 차고, 온갖 범죄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너지지 않고 작품을 구상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억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글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는 바로 그것, “주의 깊게 보고, 필기해 두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동화 중에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프레드릭(Frederick)」이 있습니다. 들쥐 다섯 마리 이야기인데, 겨울 대비를 위해 다른 들쥐들은 곡식이나 열매를 밤낮으로 나르며 부지런히 일하고, 프레드릭만 아무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이죠. 친구들이 “프레드릭, 너 왜 일 안 하니?” 하고 물으면 “나도 일해. 춥고 어두운 겨울을 대비해 햇살을 모으고 있어.”라고 대답합니다. 또 물으면 “난 지금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은 온통 잿빛이잖아.” 하고 말합니다. 또 한 번은 “프레드릭, 너 꿈꾸고 있지?” 하니까 “아니,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긴긴 겨울에 얘깃거리가 없잖아.” 하고요.
결국 겨울이 닥쳐 곡식을 다 먹어치우고, 돌담 틈새로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먹을 것도 없고 삭막한데, 그때 친구들이 프레드릭을 떠올립니다. “네가 모아둔 것 좀 내놓아 봐.” 그러자 프레드릭이 “눈을 감아봐. 내가 햇살을 보내줄게.” 하고 얘기하면, 들쥐들이 정말로 몸이 따뜻해지는 듯하고, “색깔도 좀 내놔.” 하면 프레드릭이 파란 하늘, 노란 밀밭, 붉은 양귀비 같은 걸 말해주죠. 그랬더니 마음속에 환한 색깔이 그려져요. “이야기는?” 하고 물으면 프레드릭이 시를 읊어주는데, 그걸 다 듣고 나서 친구들이 “프레드릭, 너는 시인이야.” 하고 박수를 칩니다. 프레드릭이 “나도 알아.” 하고 수줍어하는 장면이 나오죠.
저는 이 그림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글쓰기가 무엇인지 너무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은 똑같은 걸 보면서도 다르게 봅니다. 그리고 “햇살, 색깔, 이야기”를 모으듯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모아서, 모두가 배고프고 추운 상황에서 그것을 꺼내 “추위를 녹이고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죠. 이게 글쓰기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세상만사를 상식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그 눈을 통해서 우리의 상식을 깨어내는 작업입니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낯설게 만들어 보여주는 게 문학의 역할이죠.
제가 전에 신학생들에게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창세기 22장(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을 다르게 풀어보는 숙제를 내주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갔을 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걸 아브라함의 관점, 이삭의 관점, 장작의 관점, 나귀의 관점에서 각각 써봐라.” 이런 식으로요. 처음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숙제인가.” 하는데, 막상 써보면 기발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숨은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작업이거든요.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성경 본문을 해석하다 보면, “아브라함은 순종의 챔피언이다.” 이런 결론으로 끝나는데, 내가 실제로 그러기 쉽지 않고, 의문은 커지죠. 그런데 은유적 상상력을 가동하면, “사라는 어디 있었을까? 만약 사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질문이 생겨나고, 그래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글쓰기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물어보면, 수많은 갈래의 해석이 가능해져요. 사실 성경도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서, 한 가지 주석적 진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처럼 다양한 해석의 층위가 있고, 그게 서로 대화와 토론을 불러일으키죠. 유대인들의 탈무드 전통처럼, 하나의 답만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 성경이 가진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래서 글쓰기를 하려면 첫째, 어휘력을 키워야 한다. 둘째, 세상을 다각도로 보고 질문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그 생각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을 배치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유학 갔다 온 교수님들 중에는 지식이 많아도 한글 글쓰기가 서툰 분들이 있어요.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해 내는 게 안 되는 겁니다. “이걸 한글로 도대체 어떻게 풀어써야 하지?” 당황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문장을 구성하고 다듬는 훈련이 필요해요. 문체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저도 글을 처음 쓸 때는, 한 문장이 몇 글자인지를 다 세어보기도 하고, 어떤 리듬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퇴고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 그렇게까지 못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께 권하는 건 “항상 소리 내어 읽어보라.”는 겁니다. 글쓰기는 말하기라고 생각하고 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호흡이 맞지 않는 곳들이 보이고,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어구가 보이고, 그런 걸 정리해 가는 거죠.
마지막으로, 제가 경희대 김진해 교수가 『한겨레』 신문에 썼던 아주 재미난 글 하나 소개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제목이 “아버지의 글쓰기”였어요. 그 글을 제가 거의 통째로 읽어드릴게요.
아버지는 광부였다. 광산 붕괴 사고로 코를 다친 뒤에는 목수가 되었다. 그 후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매일 일기를 썼다. 몰래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쳐보면, ‘절골 김○○ 댁 지붕 슬래브 공사 2만 원, 문곡 황○○ 댁 담장 수리 1만 원, 황지시장 실비집에서 권○○와 대포 한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일기를 썼지만, 당최 늘지를 않았다. 재작년과 어제의 일기가 매일반이었다. 하루를 포대기 하나에 다 쓸어 담듯 썼다.
혹시 당신이 글쓰기에 관심 있다면, ‘글쓰기는 사건이나 대상을, 그리고 생각을 잘게 쪼개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오늘 아침 맨 처음 뭘 했나. 양치질? ‘양치질했다.’라고 퉁치지 말아라. 그걸 종이 한 장 가득 쓸 수 있어야 한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치약을 양손가락으로 꾹 눌러진 칫솔 위에 짜는 장면부터, 위아래로 닦고 앞니에서 어금니 쪽으로 닦고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하면서 열 개 낀 혀의 백태를 닦고, 수도꼭지의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다음, 올카올카(漱) 입안을 헹구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며 혀를 날름 내밀어보는 장면까지 쓰는 거다. 이게 글쓰기다.
글쓰기는 시간을 달리 대하는 일이다. 쓰지 않으면 시간은 장맛비에 젖어 떡이 된 책처럼 그냥 녹아버린다. 쓰는 건, 한 덩어리가 된 시간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떼어내어, 구겨지고 눅눅한 종이 위에 적힌 흔적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 글을 쓰다 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시간만이겠나. 모든 생명은 ‘특이’하며 순간순간 ‘유일무이’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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