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중언부언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신다는 생각에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러분들과 이 성경 본문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전제는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신다”는 데서 잘못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여 삼창을 외치면서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을 내 앞으로 끌어와야 하고, 원하는 것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중언부언 기도합니다.
이방인들은 왜 그렇게 중언부언 기도합니까? 이방인들이 믿는 모든 신의 신상은 목석이거나 금속이이서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신상 앞에 가서 기도해도 “이 목석이 내 기도를 들었다”는 확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목석이 내 기도를 들었다는 자기 최면이 걸릴 때까지 중언부언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한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다 아느니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있어야 할 것을 일일이 하나님께 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면, 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여자가 아이를 배면, 그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합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엄마, 기저귀 준비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밴 여인보다 못하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 형편을 다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형편을 다 알고 계신다는 전제에서 하는 기도와, 내가 하나님께 중언부언 얘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전제에서 하는 ‘믿음의 기도’가 같을 리가 없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33절에서 34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너희들, 조금만 생각해 봐라. 풀을 입히는 하나님이 너희들 책임 안 지시겠느냐?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한,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도 가난에 절어 있습니까?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책임져 주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음에도 지금 가난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를 가난 속에서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이 가난 속에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데 왜 평생 병자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이 바울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세 번을 기도했다면, 한 달씩 금식을 하며 세 번 기도했는지, 작정으로 세 번 기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낫게 해 주세요., 해주세요, 해주세요” 이렇게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던 사도 바울이 자기 지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바울이 받은 응답이 뭡니까?
“이미 네게 주어진 나의 은혜가 족하다. 네가 기도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는데, 네 건강까지 완벽해지면 네가 하나님이 될 거야. 그러니 내가 네 육체를 연약하게 하므로, 네가 가장 연약할 때 가장 강하신 나만 바라보며 살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곧 나의 은혜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지병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병의 노예가 아니라 병의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와 바른 관계 속에 있는 한, 네가 부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지, 내가 책임져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가불 해서 염려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옛날 개역성경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시계를 딱 보고 있다가 밤 11시 59분까지는 오늘 일을 염려하고, 밤 12시가 땡 되면 “아, 이제 내일이 됐다. 아이고, 이거 어떡하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도 한 거예요. 그 번역이 잘못된 거죠. 지금 본문이 맞는 겁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무슨 말입니까?
“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한, 오늘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내일도 너를 책임지신다.” 아멘.
이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이며, 그 신분에 맞게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질문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다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원의 실체가 어디 있습니까? 구원을 받았다면 내 손안에 보이는 구원의 실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실체는 뭘까요?
한국에서 네 사람, 세 사람 건너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두 사람 건너서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자” 하고 양적으로 가장 팽창했을 때, 한국 교회는 가장 타락했습니다. 그 여파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수가 줄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다 자랑하고, 민족 복음화를 외치는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구원받았으면 나하고 달라야 하는데, 나보다 똑같거나 더 못한 것 같다”라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혼’, ‘믿음’, ‘구원’, ‘은혜’, ‘자비’, ‘긍휼’ 같은 말들은 전부 추상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상명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인 언어로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구원의 실체를 지금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유력 가문의 혈통을 통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위대한 영웅의 육정이나 그의 뜻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내 죗값을 십자가에서 치러 주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구원이란 신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망의 자식에서 생명의 자식으로,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어요.”라고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 신분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신분은 바뀔 때마다 그 신분에 걸맞은 수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신분을 가진 학생이 있고, 대학생 신분을 가진 학생이 있습니다. 신분이 다르죠. 초등학생 신분을 가진 아이가 초등학생 수준의 언행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신분을 획득한 청년이 초등학생 수준의 언행만 한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것이 뭘까요? 가서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게 뭘까요?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미국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미국 법을 지키지 않고 서울에서 운전하듯 마음대로 운전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미국에서 살 수 없습니다. 미국 시민이 되었으면 세금을 미국 정부에 납부해야 합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부엌 지킴이 신데렐라가 어느 날 왕자의 선택, 곧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왕자의 은혜’를 힘입어 하룻밤 사이에 왕자비가 되지 않습니까? 부엌 지킴이 신분에서 왕자비 신분으로 수직 상승한 거예요. 신데렐라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데, 만약 신데렐라가 왕자비가 되고 나서 매일 자기를 왕자비로 선택해 준 왕자만 찬양하면서 “높임 받으소서, 왕자여. 당신은 나의 구세주.” 이러고 평생 산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 결혼생활 오래 못 갔을 것입니다. 부엌 지킴이였던 신데렐라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내가 왕자비다. 내 신분이 바뀌었다.”라는 사실을 정말 깨달았다면, 그다음부터는 왕자비 수준에 맞는 삶을 스스로 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왕자와 함께 살 수 있는 것이죠.
신데렐라가 부엌 지킴이에서 왕자비가 되는 수직 상승은 엄청난 수직 상승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공동묘지에서 한 줌의 흙으로 끝날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상승된 것은, 신데렐라의 수직 신분 상승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에 흔들리며 살기 싫다면... 예수님께 매여 사세요...이재철 목사 (0) | 2025.01.11 |
---|---|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재철 목사 (0) | 2025.01.11 |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의 복 (0) | 2025.01.09 |
영화롭도다 Gloria (0) | 2025.01.05 |
복이 되기 위한 출발: "바벨탑을 무너뜨리라" 주경훈 목사. 2025년 첫 주일 설교 (0) | 2025.01.05 |
어려운 일 당할 때 Simply trusting every day- 찬송가 가사 (0) | 2025.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