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순서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염광(鹽光)이라 쓰고 '빛과 소금'이라 읽으면 변질!
빛과 소금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단어의 순서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산상수훈 중에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1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燈檠, lamp stand)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니라.”
주님께서는 “빛”이라는 단어를 먼저 말씀하시고 “너희는 빛이고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다음에 “너희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한 단어, 한 단어의 의미도 절대적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의 순서도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순서를 바꾸면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소금과 빛”이라고 그 순서로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임의로 순서를 바꾸어서 “빛과 소금이 되자”라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소금보다는 빛을 더 선호합니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빛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교회 이름을 봐도 잘 드러납니다. ‘광림교회’, ‘광성교회’, ‘성광교회’ 등 ‘광(光)’ 자가 들어간 교회가 수두룩합니다. 소금 ‘염(鹽)’ 자가 들어간 교회도 있긴 있습니다. 선행을 많이 하고, ‘감자탕 교회’로 알려진 교회인데, 그 교회의 풀네임이 ‘광염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빛 광(光)’이 앞에 붙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네이버에서 “빛과 소금 교회”라고 한 번 검색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빛과 소금 교회’라는 교회가 예순여덟 개 나왔습니다. 거꾸로 ‘소금과 빛 교회’를 한 번 쳐 봤습니다. 불과 아홉 개 나왔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월간 기독 잡지의 이름도 ‘빛과 소금’입니다.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단어의 순서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그 순서를 바꾸어서 “소금과 빛이 돼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빛과 소금이 되자”라고, 빛을 내세우고 소금은 아예 얘기하지 않거나 얘기하더라도 그저 빛에 따라붙는 종속물 정도로 뒤에 제쳐서 이야기할까요?
흔적도 없이 물속에서 녹아버리는 보잘것없는 소금보다는, 찬란하게 드러나 보이는 빛이 더 멋지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남에게 찬란하게 드러나 보이는 빛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의 빛은 성경이 말하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소금을 제쳐 놓고 빛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들은 세 가지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소금을 제쳐 놓고 빛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추구하는 빛은 첫째, 결단코 성경이 말하는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금을 제쳐 놓고 빛이 되겠다는 사람이 추구하는 빛은 이 세상의 것들로 치장한 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고, 크게 명예를 얻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나’에게 비추어지는 세상 영광의 빛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빛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영광의 빛은 반드시 시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될 빛입니다. 그래서 세상 영광의 빛을 추구하는 인생은 결국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예: 영광의 끝은 허무
역사상 세상 부귀영화의 빛을 가장 크게 드러내었던 사람은 솔로몬 아닙니까. 솔로몬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부귀영화의 대명사입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성경이 우리에게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4장 22절에서 23절입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고운 밀가루가 삼십 고루요, 굵은 밀가루가 예순 고루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자기 식솔들을 위해 소비하는 밀가루만 해도, 고운 밀가루가 하루에 30 고르, 굵은 밀가루가 하루에 60 고르였습니다. 1 고르는 약 220리터,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으로는 한 대(斗)가 1.8리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1 고르는 122되(升) 정도가 됩니다. 예전 말로는 두말, 섬 등을 쓰긴 했는데, 아무튼 엄청난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 노루와 암사슴, 살진 새들이 있었더라.” 여러분,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 자기 집 식솔들과 하루에 이 정도 식재료를 필요로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이라고 하는 머스크 같은 사람들이 식솔들을 위해 이만한 식재료를 필요로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솔로몬이 자기 근위대가 사용하는 방패를 만들었는데, 그 방패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16절입니다.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200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드는 금이 600세겔이며…”
금방패 200개를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한 세겔의 무게는 11.42g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600세겔은 약 6.85kg입니다. 방패 하나를 만드는데 금 6.85kg이 들어갔습니다. 그걸 200개 만들었으니 금이 전체로는 1톤이 훌쩍 넘습니다. 그래도 솔로몬은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드는 금이 3 마네 곧 150세겔이라.”
150세겔은 약 1.71kg입니다.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드니 총 513kg가량입니다. 큰 방패 200개와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 때 쓴 금이 합하면 약 1톤 884.3kg 정도 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이렇게나 많은 금으로 방패 500개를 만들어서 자기 근위대에게 줬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렇게나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세상 영광의 빛으로 자기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전도서 1장 2절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어에는 부사가 있습니다. ‘심히 헛되다’, ‘대단히 헛되다’, ‘아주 헛되다’ 같은 표현인데, 히브리말에서는 특별히 강조할 때 부사를 쓰지 않고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씁니다. 예를 들어 “헛되고 헛되다”라고 하면 “정말 아주 헛되다”보다 더 강한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헛되다’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썼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 영광의 빛은 헛되기 짝이 없더라.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소멸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의 빛은 반드시 소멸하는 빛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누렸던 세상 부귀영화의 빛이 소멸하지 않는 빛이었다면, 솔로몬은 다르게 말했을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영광이여 영광이여, 영광이며 영광이고 영광이로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는 “헛되다”를 다섯 번이나 외쳤습니다.
이사야의 외침: 인생은 풀이고 꽃이다. 시들고 만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가서 외치라” 하십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가서 대체 무엇이라고 외쳐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이 이사야 40장 6절에서 7절에 이렇게 밝혀집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면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니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가서 뭐라고 외쳐야 하는가. “인생아, 네가 지금 성공했니? 네 지위가 좀 높니? 그래도 너는 풀이야. 네가 지금 가진 것을 태산처럼 쌓아 놓았니? 네 권력이 하늘을 찌르니? 그 모든 영광이 들의 꽃이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것처럼, 네가 자랑하는 것도 네 인생도 다 사그라지고 없어져. 이게 인생이야.” 이렇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세상의 물질, 성공, 명예, 출세로 비롯되는 세상의 영광의 빛으로는 결국 허무만 남습니다. 세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소금이 되어야 참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먼저 소금이 되는 사람만이 참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소금이 여기 있는데 그 소금이 천 년, 만 년 지금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건 진짜 소금이 아닙니다. 진짜 소금은 반드시 녹아서 소멸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자기를 돋보이려면 절대 녹으면 안 됩니다. 소금 그대로 천 년, 만 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소금의 본질입니다. 자기 생명을 완전히 소멸시켜서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 것, 그 소금의 본질은 거룩하고 순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도 결국 자기를 태우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지금 소금으로 자기를 소멸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성경이 말하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등잔이든 양초든,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면 빛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등잔이 빛을 비추고, 양초가 빛을 비추려면 소금처럼 자기를 태워 없애야 합니다. 소멸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소금으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소금으로 살지 않으면서 빛과 소금이 되자”라고 하는 것은 다 헛된 구호입니다. 그건 사치입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지금 소금이 되는 사람만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빛을 꿈꾸기 전에, 먼저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순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종교적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삶의 자리에서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삶, 즉 세상 가운데서 드러나는 사랑, 진리, 정의의 삶을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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