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순종과 말씀의 기억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며 교회의 보편성과 교회다움을 확립했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한 결과였다.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물꼬를 튼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본거지가 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교회의 교회다움을 확립한 베드로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환호나 칭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위 할례 파라고 불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혹독한 비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유대인의 관습과 관례를 어기고 이방인의 집을 찾아가 이방인과 교제하고, 이방인과 함께 식탁까지 나누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제의 베드로라면 불같이 화를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이상 어제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 고넬료와 관련해서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제10장)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 설명의 결론 부분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방인들에게 세례까지 베풀었다는 것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지 않고서도 복음을 전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그들을 유대인과 대등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이방인을 짐승이나 ‘지옥에 갈 자’ 정도로 생각하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엄연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인 베드로가 어떻게 그 충격적인 일을 행할 수 있었는지, 베드로 자신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5절에서 17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처음 우리에게 임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 내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겠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는 것을 베드로가 목격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그 말씀 앞에서, 순전한 자신을 비난하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오순절 성령 세례를 받은 것처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방인들도 성령 세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그날은 이방인을 위한 오순절이었던 셈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을 과감히 행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을 확인한 이상, 형식적인 물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사도로서의 직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더라도 세례까지 베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교회의 교회다움이 베드로에 의해 확립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그 모든 혁명적인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베드로에게 생각난 주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성령의 역할
지난 피정 기간 중에, 어릴 적부터 마치 친형제처럼 지낸 아주 친한 친구를 미국에서 만났습니다. 마침 그 친구가 늦은 나이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기에, 지난주일에는 그 친구가 다니는 미국 한인 성당에서 그 친구와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날은 가톨릭 교회력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신구교의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 성당 신부님은, 바로 그 뜻깊은 주일에 개신교 목사인 제가 미사에 참여한 것을 크게 반겨주셨습니다. 그날 사무엘상 3장을 토대로 한 신부님의 강론 요지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돼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 우리 일행은 제 친구의 자동차에 타고서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빠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동차 주인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그 한 대의 자동차 때문에 뒤에 있는 모든 자동차들이 계속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자동차의 주인인 어느 여성 신도님이 나타나서, 줄지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교인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며 자신의 자동차로 뛰어갔습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늦을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제 왼쪽 앞편 자동차에서 한 중년 남자가 뛰어내리더니 그 여성 신도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느닷없이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왜 늦었느냐!”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 여성 신도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표시만 하고 급히 자동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은 제게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그분 역시 조금 전 미사를 통해 신부님으로부터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돼라”는 강론을 들은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출구를 가로막고 있던 자동차 주인이 생각보다 늦게 나타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울화가 치민 그분에게는, 방금 전에 끝난 미사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생각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생각났더라면, 결코 성당 구내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에 진지하게 참석하고,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 할지라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필요할 때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 역시 미사를 방금 끝내고 성당 구내에서 삿대질하고 욕을 하던 그분과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억력에 의존하는 신앙의 한계
제가 제 아내와 27년째 부부로 살아오면서, ‘신뢰’를 부부간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 어느 날 새벽, 어머님께서 제게 해주신 그 말씀이 어느 날 불현듯 떠올랐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어머님께서 제게 그 말씀 하나만 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제 어머님은 제가 마흔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때부터 마흔여덟 살에 이르기까지, 어머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필요한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겠습니까. 하지만 그 많은 말씀의 99%는 제 기억 속에서 다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48년 동안 어머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좋은 말씀 가운데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말은 고작 0.1%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억만 의지한다면, 방금 미사를 드리고도 삿대질하고 욕하던 그 성도님처럼,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6절을 통해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의 기억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고 기억나게 하도록, 또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태만하거나 소홀해도 괜찮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으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려 해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에 담아 두는 대전제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 것도,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 것도, 그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가십시다. 그와 동시에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구하며, 성령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십시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고,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때부터 세상과 인간에 대한 모든 편견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타파되어야 할 이 세상의 폐습과 악습이 우리에 의해 제거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우리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들어 우리 마음속에 담음으로써, 필요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 진의를 깨닫게 해 주시는 그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다고 기억함에 조급함도 태만함도 없게 하소서
부모가 자식에게 필요한 많은 말을 해주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식은 부모가 생전에 들려준 말의 99.9%를 기억조차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99.9%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매 순간 생각나고 기억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자식은 부모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 말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하물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한순간에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는 데는 세월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순간에 모두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진리는 ‘영원’과 동의어이기에, 조급한 마음으로는 진리의 언저리에도 이를 수 없음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 데에는 조급함이 없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어 우리의 마음속에 담는 일에는 태만함이 없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교회의 교회다움이 회복되고, 세상의 폐습이 타파되며, 누군가의 인생이 새로워지고, 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지게 해 주셔서, 우리의 코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참된 생명의 희열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령의 인도 속에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 교회는 본질을 회복하고 세상의 악습을 깨뜨리며, 누군가의 인생에 빛과 생명이 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진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믿음은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이재철 목사님 (0) | 2025.01.09 |
---|---|
교회는 보편적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 (0) | 2025.01.09 |
구원받은 일시를 기억할 필요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님 (0) | 2025.01.09 |
현대 기독교가 고쳐야 할 것 (0) | 2025.01.09 |
빛과 소금인가, 소금과 빛인가? 이재철 목사님 (0) | 2025.01.09 |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의 복 (0) | 2025.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