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보편성과 세대 단절
오늘날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입니까? 빈부·귀천, 남녀노소가 한데 어우러지는 교회입니까? 부자 동네에는 빈민이 없고, 가난한 동네 교회에는 부자가 안 갑니다. 양쪽 다 문제가 있는 거죠.
그 문제를 떠나서 우리가 교회의 연속성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교회에 남녀노소가 다 있는가, 젊은이들이 있는가? 교회가 영속성을 지키려면 어느 시대나 교회 속에는 젊은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에 젊은이들이 없습니다. 젊은이들, 즉 30·40대가 교회를 떠나니까, 그 30·40대를 따라 교회에 오던 교회학교 아이들도 없습니다. 교회학교 없는 교회가 날로 늘어가고 있어요. 부모들이 교회를 떠나버렸으니까요. 이것은 보편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나이 든 사람들만 모여 있는, 일종의 동아리 교회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계급화된 교회 구조와 위선
여러분, 30·40대면 여러분 모두 이미 거쳐 오신 나이겠지만, 그들은 가장 지적인 활동이 왕성하고,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이 예리할 때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개신교는 원래 교황으로부터 추기경, 교구장, 신부, 교인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급주의 하이어라키에 대항해서, ‘만인제사장’ 사상을 표방하며 태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평신도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급이 존재합니다. 이건 마치 가톨릭의 계급주의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로들 사이에도 원로장로, 은퇴장로, 협동장로, 신임장로 등등, 안수받은 날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집니다. 과연 이게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절에 놀러 가서 제일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연등입니다. 연등의 크기가 다 다르죠. 5만 원짜리, 10만 원짜리, 100만 원짜리… 연등에 시주한 사람 이름이 하나하나 다 쓰여 있습니다. 화장(장례 화장) 하나 하는 데도 시주자의 이름을 다 적어놓으니까 “참 우습다”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 헌금을 바칠 때는 어떻습니까? 헌금 봉투에 이름을 쓰고 주보에 자기 이름을 낸단 말입니다. 이게 젊은이들에게 과연 용납이 되겠습니까?
종교 지도자의 군림, 그리고 섬김 부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세상에서 너희를 위해 군림하고 부려먹는 사람들을 보아라. 그러나 인자는 그렇지 않다. 인자는 오히려 너희들의 종으로 왔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대속물이 되기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으려고 왔다. 너희들도 으뜸이 되고 싶으면, 먼저 종이 되어라.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이 좋은 말씀이 교회에서 다 선포는 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볼 때, 교인을 섬기는 목사를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군림하는 목사들밖에 없으니 문제인 거죠.
여러분, 제네바는 칼뱅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곳으로, 개혁의 총본산입니다. 그렇다면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제네바에는 그 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개신교인들이 많아야 할 것 같지만, 제네바 시에서 하는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현재 제네바에는 개신교 신자보다 가톨릭 신자가 훨씬 많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종교개혁 당시부터 이어져 온 현상입니다. 500년 전 칼뱅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제네바 시민들은 다 개신교로 돌아섰어요. 그런데 종교개혁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가톨릭은 교황이 딱 한 명뿐인데, 제네바의 개신교 교회들은 교회마다 교황 노릇을 하는 목사가 따로 있으니 서로 타협도 안 하고 의견 일치를 볼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교황을 모실 바에는 차라리 한 사람 교황만 모시겠다” 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던 거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네바는 가톨릭 신자가 더 많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눈으로 보면, 교회라는 것이 사실 교회답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좋은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성경과 철저히 유리된 종교 기업, 종교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청년들이 떠나지요. 청년들이 떠나니 그 자식들도 함께 떠났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미래가 사라져 버렸어요.
세속화된 가치관과 거룩성의 상실
대한민국 교회가 이렇게 보편성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더 잘되고, 좋은 스펙 쌓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이게 최고의 가치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세상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거룩성을 상실하니 교회의 보편성마저 바닥으로 떨어진 거죠.
다른 파장을 내는 거룩한 공동체로의 회복 필요
제가 제네바에 있을 때, 그 유명한 제네바 콩쿠르를 예선전부터 결선까지 전부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제네바 콩쿠르는 세계 콩쿠르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회이기도 합니다. 제가 목회하던 제네바 한인교회 여성 청년 한 명이 거기에 나가서 예선부터 보러 갔는데요. 예선전은 제네바 음악원 큰 홀에서, 반주자 한 명이 피아노를 치면서 참가자가 노래를 합니다. 그 앞에 심사위원들이 앉아 심사를 하죠.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은 하루 종일 노래를 들어도 누가 정말 잘하는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올라가면, 1,600석 규모의 빅토리아 홀 무대 위에 70명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고 그 속에서 한 사람씩 노래를 해요. 처음엔 “예선과 본선은 스케일이 다르니까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막상 들어보니, 어떤 참가자는 표정을 보니 노래를 굉장히 진지하게 하는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1등 한 독일·미국 성악가, 그리고 2등 한 한국 청년이 노래할 때는, 70명이 연주하는 큰 소리도 뚫고 그 목소리가 쫙 퍼져 나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오케스트라와 ‘다른 파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장이 같으면 작은 소리는 큰 소리에 묻히지만, 파장이 다르면 큰 소리도 뚫고 나오죠. 그래서 본선에서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입상자를 가린다고 합니다.
교회의 소리가 왜 세상 소리에 묻힐까요? 아무리 교회가 외쳐도 세상이 꿈쩍도 안 하는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파장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파장을 내야 합니다.
한국에 유명한 음향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래미 녹음기술상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두 번이나 받은 분인데, 이분이 한국의 모든 소리를 녹음하고 다닌다고 해요. 그분이 순천 송광사에 가서,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새벽 예불 소리를 녹음했습니다. 그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스님이 윗대 스님에게 전수받고 또 그 윗대 스님은 그 윗대에게서 전수받은, 정말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소리입니다. 그걸 녹음한 뒤, 이번엔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 새벽기도 소리도 녹음했답니다. 수천 명이 “주여!” 하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잖아요.
그리고 그분이 한 말이, “스님 한 사람의 염불 소리가 수천 명의 기도 소리를 압도하더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대형교회 수천 명의 기도 소리가 “주여, 제가 진리를 따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우리 집 잘 되게 해 주세요,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같은 욕망의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님들은 속세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파장이 다르죠. 그 다른 파장으로 수천 명의 욕망의 파장을 압도해 버리는 겁니다.
판소리 명창이 되려면 다른 파장을 가져야 합니다. 연습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옛날 판소리 명창들은 폭포 뒤 동굴에 들어가 ‘득음’을 했다고 합니다. 폭포 소리와는 다른 파장을 얻어야, 그 큰 물소리를 뚫고도 “아—!” 하고 명창의 소리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저도 예전에 바로 앞에서 명창의 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파장을 잊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2장 1~2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창문을 열어 놓으면 길거리에서 집 안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소리는 세상을 바꾸고 뒤집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파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산상수훈을 예수님이 오늘날 부흥사들처럼 큰소리치며 외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산들바람처럼 잔잔한 소리로 말씀하셨는데도 듣는 이들의 폐부를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을 찾아야 비로소 바른 교회가 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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