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다 vs. 꽃이 온다
저는 지금 낙향해서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은 대략 마흔 가구에 8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계신 분들은 세상이 말하는 ‘스펙’이나 학력을 갖추신 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80명 가운데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저와 제 아내를 합쳐도 거의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 마을 분들에게서 영적으로 참 많이 배웁니다.
우리는 흔히 “꽃이 핀다.”라고 말합니다. 꽃이 피기 때문에, 내가 꽃을 심고 물을 주면 내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꽃이 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마을 분들은 “꽃이 핀다.”라고 하지 않고, 사과 "꽃이 온다.”라고 말합니다.
“꽃이 핀다.”라고 하면, 꽃 피는 것을 내 노력의 결과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무리 내가 정월대보름이 끝난 다음 날부터 열심히 땀 흘리고 수고해도, 봄에 사과꽃이 안 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꽃이 핀다.”라고 말하지 않고, “꽃이 온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과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것은 나의 영역이지만, 실제로 꽃이 피느냐 안 피느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꽃은 어디선가 스스로 오는 것이고, 그 꽃을 보내주는 분이 보내주지 않으면 꽃은 오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년 내내 열심히 땀 흘려 사업을 하셨는데, 사람에게 속거나, 병고를 당하거나 해서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부분 속이 뒤집어지고, 새벽기도에 나가서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올초에 우리 마을 어느 집 사과밭에는 꽃이 오지 않았습니다. 꽃이 오지 않았다는 건, 1년 사과 농사를 망쳤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 올해 1년은 쉬어가라고 하시나 보네.”
자기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사과꽃이 오고 안 오는 건 자기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꽃이 안 왔다면 꽃을 보내주는 분이 안 보내주신 거고, 그러면 올 1년은 쉬어가라는 뜻이겠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물론 그분들은 그 ‘대상’이 누군지는 모를 뿐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의해 결정됩니다
여러분, 믿음의 참됨 여부는 ‘믿음의 행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분들을 보고 “아, 믿음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행위로만 결정된다면, 수천만 원을 들여 구슬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훨씬 더 낫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분들, 무당이 시키는 대로 밤새도록 손을 비비며 기도하고, 정말 열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잖아요. 그 행위만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뜨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참됨 여부는 ‘믿음의 대상’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죽은 돼지 머리나 어떤 잡신을 믿고 있다면 그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심을 인정해야 해요. 만약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 분들은 그렇게 영적인 태도로 삶을 살면서도, 꽃을 오게 하는 분, 자기들이 1년을 쉬어가게 하는 그분이 ‘누구신지’는 모를 뿐입니다. 저는 언젠가 그분들이 결국은 그 대상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실 몫은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내리신 마지막 명령이죠. 흔히 ‘지상 최후의 명령’ 혹은 ‘지상 최대의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온 삶을 다해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증인’을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로는 ‘마르튀스(martys)’라고 합니다. 여기서 ‘순교자’를 뜻하는 ‘마르튀르(martyr)’가 나왔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증인’은, 세상 재판정에서 친구나 가족을 유리하게 하려고 적당히 거짓말을 보태는 그런 증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르게 증언하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그분의 증인으로 살다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을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분에게 내 목숨을 거는 것이 내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면 찾고, 나를 위해 내 목숨을 걸면 결국 잃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내 욕심, 내 야망을 위해 내 생을 다 걸지요. 그런데 말하는 그 ‘나’가 뭐예요? 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결국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육체입니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몇십 년 지나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가 보면, 수많은 해골들이 널려 있다고 합니다. 살과 뼈가 썩고 남은 해골이 누구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나를 위해 내 생을 걸면, 이 육체가 썩고 사라진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생을 걸면 영원히 삽니다. 그분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이미 우리 앞에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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