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는 신앙 행위의 위험성
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확증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내용과 동일한 것은 아닌가? 지금 현재의 내 삶은 믿음의 결과로서 성경적인 삶인가? 하루를 마감하면서, 오늘 하루 나를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씨줄과 날줄로 엮어졌는가?
만약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면, 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생각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이거나, 아니면 무의미한 종교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백 년을 믿는다 한들, 험하고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 과연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배의 시간의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적용’
1년은 52주, 365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교회를 찾아가 예배드리는 시간은 한 주에 한 시간입니다. 1년 365일 중에서 주일 예배에 드리는 시간은 52시간에 불과합니다. 52시간이면 겨우 이틀 정도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365일을 살아가면서 이틀 남짓한 시간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나머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면 그 사람이 과연 남은 363일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교회마다 새벽 기도회나 수요 성경 공부, 각종 성경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경 공부에 아무리 많이 참여한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배운 것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각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든 성경 공부는 지적 유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유례없는 성경 공부 열풍이 일어나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것은, 그 성경 공부가 지적 유희로 끝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체험'이 아니라 '영의 역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고요? 그러면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 몇 초에 구원받았습니까? 아니,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구원받은 연월일시를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구원 못 받은 사람이 분명하네요.” 이 말에 무너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만약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질문 자체가 터무니없는 비논리적 비약임을 알게 됩니다. 새벽에 야외에서 일을 해 보신 분은 경험하셨겠지만, “당신 옷이 이슬에 젖었네요? 그렇다면 당신 옷이 몇 시 몇 분 몇 초에 이슬에 젖었나요?”라고 묻는 꼴입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면 “그렇다면 당신 옷이 젖은 건 이슬 때문이 아니라 수돗물 때문이네요.”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터무니없는 억측인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연월일시를 모른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앞선 이슬의 예와 똑같은 억측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마치 2천 년 전이 어제나 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죠. 그런데 2천 년 전이라면 언젠가요? 고구려를 세운 주몽, 신라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시절입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주몽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건국 신화는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수라는 사람이 이 땅에 왔는데, 그 예수라는 분이 2천 년 후에 태어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 나오는 것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 신화인 주몽과 박혁거세 알 이야기는 안 믿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황당한 2천 년 전 예수의 이야기를 우리가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의 영이 내 안에 임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임해 계시기 때문에, 본 적도 없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데도 그 예수님이 나의 주님으로 믿어지고 고백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믿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황당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슬에 옷이 젖듯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이슬에 내 영혼이 젖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분이 내 구주이심이 믿어지고 고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첫발을 내디딜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는 더욱더 어렵습니다.
육적인 염려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집중하라
바로 지금, 오늘 본문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촉구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인생은 정말 귀합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내가 철야 기도를 한다고 해서, 천일·만일 기도를 한다고 해서, 내 코끝에서 숨이 넘어가는 순간 내게 두 번째 인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유일무이한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통로로서 주님의 진선미와 생명을 이 땅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를 위해 기도하고 애쓰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입는 육체의 것을 위해서 안달하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못한 음식을 먹는다고 내 목숨이 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싼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려하지 않고, 이 육체라는 고깃덩어리로만 살려한다면 내 인생은 망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질타하시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입만 열면 육적인 것을 위해서 안달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30절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신앙의 시작
주님의 이 길지 않은 말씀 가운데 핵심어가 있다면 뭘까요? “생각하여 보라!” 헬라어로 “카타만다노 katamanthano”, 곧 심사숙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썩어 문드러질 네 육체만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나는 새들을 한 번 봐라. 저 새들이 창고를 짓느냐, 먹을 것을 냉장고에 쌓아 두느냐, 누가 기르느냐? 하나님이 기르시지 않느냐. 너희는 저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또 들의 백합화를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우리나라 백합은 서양 백합과 달라 꽃이 굉장히 우아하고 가격도 비쌉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는 헬라어로 ‘크리논’인데, 우리가 아는 우리나라 백합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꽃이었고, 그 색깔이 붉었습니다. 우리나라 꽃으로 비유하자면 민들레나 개양귀비 같은 거지요. 저 꽃들이 길쌈을 하느냐, 수고를 하느냐? 그런데도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스러운 옷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솔로몬이 아무리 금실로 수놓은 멋진 옷을 입었다 해도, 그 옷은 생명이 없는 물건입니다. 들에 피어 있는 들꽃은 살아 있는 생명체예요. 날씨 좋은 날, 자동차를 타고 가시다가 유채꽃 핀 들녘을 본다면, “아, 멋지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햇볕이 내려쬐는 가운데 반짝이는 유채꽃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 화려함, 그 생명감의 발산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솔로몬의 옷은 결코 그것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러분, 생각 없이 믿으면, 집을 팔아 건축 헌금을 하고, 교회에서 제일 많이 봉사한다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믿음이 작은 자’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같은 공간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리고, 같이 성경 공부한다고 해서, 다 똑같은 믿음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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