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먼저 세 가지 질문을 여러분께 드려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14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행할 것이다. 다 응답해 줄 것이다”라는 말씀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다 응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엄청난 특권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왜 이런 특권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다 시행하리라." 다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여러분 진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응답이 됩니까? 여러분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었다고, 평생 예수님께 기도한 모든 기도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응답되었다고 고백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100%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이렇게 “뭐든지 기도해라, 내가 다 응답해 줄게”라고 말씀하실까요?
세 번째 질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14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으로 살아라.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까?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예배드리고 평생 기도했는데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 세 인물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떻게 진전되어 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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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나병 환자(한센병자)’입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 방금 산에서 주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지금 주님을 따르는 거예요.
그런데 ‘나병 환자’로서는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공개된 장소입니다. 옛날에 나병은 불치병이었고, 나병에 걸리면 반드시 격리된 곳에 수용되어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면 안 되니까요. 만약 나병 환자가 수용소에 있어야 한다는 율법을 어기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개된 장소에 나왔다면, 먼저 경고가 주어지고, 그래도 돌아가지 않으면 돌로 쳐서 죽입니다. 나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모두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수많은 군중이 에워싸고 있다면, 나병 환자는 아예 접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2절을 봅시다.
“한 나병 환자가 나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 나병 환자는 돌에 맞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였습니다. 그에게는 주님께서 자신의 불치병인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긴 거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주님 앞에 나와 간구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제 몸에 곪아들어가는 이 나병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고쳐 주십시오.”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이 한센병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냥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썩어 문드러진 고름투성이의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아라.” 그 순간 썩어 문드러지던 살이 깨끗하게 소생된 겁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하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불치병에 걸려 썩어 들어가던 사람이 자기 믿음을 가지고 다가와 간구했는데, 그 사람이 어린아이 피부같이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고쳐주셨다!” 하고 춤추며 동네방네 다니며 간증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이라면 “너 이제 병이 나았지? 내가 누군지 알지? 나가서 네 병 고쳐준 사람이 바로 나 예수라고 간증하고 다녀라.” 하실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내가 너를 고쳐 주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제사장을 찾아가서 율법에 정해진 예물을 드리고, 네 몸이 깨끗해졌다는 걸 공개적으로 입증받아라.” 예전에는 제사장이 의사의 역할도 했습니다. 누군가 피부가 이상해진다고 하면, 제사장이 직접 가서 확인하고 “너 나병에 걸렸구나.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 하던 식이었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았다면, 그건 제사장이 공적으로 인정해 줘야 다시 사람들 사이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네가 나았다는 것을 입증받고, 정상 생활을 하거라. 그러나 내가 고쳐 줬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간의 육체 병만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실 뿐 아니라, 내가 기도해서 문제를 해결받는 것 자체가 기도의 최종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든지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가 기도하고,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문제 해결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영적 경험이 없으면, 주님은 내 주님이 되시기가 어렵습니다. 내 문제 해결을 계기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재정 문제, 건강 문제 등 절박한 상황에서 주님을 찾고 기도해서, 그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생활·기도생활의 ‘동기’이지, 종착점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고 기도해서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고 합시다. 그래도 주님은 “너 아무에게도 이 말 하지 말거라”라고 하실 겁니다. 한 번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일평생 기도를 오직 내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그 믿음은 미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복(福)비나리와 다를 게 없어요.
여러분,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미신은 내가 가진 돈이나 재주로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이루는 겁니다. 반면 신앙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달래고 얼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 앞에서 내가 부단히 나를 부인하며 순종해야 한다’라는 자세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자기 부인이 없고,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니 나병 환자가 자기 육체 병이 나은 것에만 매달린 채 평생 그 수준의 신앙생활에 머문다면, 그것이 그를 거룩하게 하겠습니까? 그 기도생활이 주위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 평생 기도하신 분들, 기도에 능하다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중에는 의외로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아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내 문제”만 붙들고 기도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문제를 들고 주님을 찾는 것은 좋지만, 그건 신앙의 동기이자 기도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바로 ‘백부장’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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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물, 백부장 이야기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와 간구하여.”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로마 제국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소규모로 5천 명, 많게는 6천 명 정도였는데, 그 군대가 힘으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었죠. 백부장은 100명을 다스리는 장교인데, 5~6천 명 중에 백부장은 50~60명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극소수 상위 1% 권력자가 되는 겁니다. 그 상위 권력자가 이스라엘 청년 예수를 찾아와 간절히 기도(간구)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죠. 일제강점기에 일본 장교가 조선 청년에게 한 다리 무릎을 꿇고 뭔가 간청하는 것과 같으니,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시면, 그 백부장의 기도 제목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입니다. 자기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집 하인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겁니다. 이 로마 시대 ‘하인’은 헬라어 원문으로 ‘파이스(παῖς)’, 즉 노예에 불과합니다. 노예는 인간 취급을 못 받았죠. 그러나 백부장은 그 노예 한 사람을 위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불치병인 중풍을 앓고 있는 노예를 낫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썼지만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를 찾아와서 “주님, 내 하인이 괴로워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중심을 보시고 “가자, 내가 고쳐줄게”라고 말씀하시죠.
8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이 “가자, 네 집으로 가서 고쳐주마.” 하셨으면 보통은 “예, 얼른 오세요.” 하고 모시고 가야 할 텐데, 이 백부장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 같은 분을 제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저는 주님의 권세가 저희 집에까지 미친다는 걸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예수님이, 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믿고 있는 거예요. “안 오셔도 됩니다. 이미 제 집에도 주님이 계십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1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감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이만한”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토소토스(τοσοῦτος)’인데, “이처럼 위대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대단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겁니다.
11절, 12절에서 예수님은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지만, 정작 본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은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메시아로 믿고 고백했는데, 정작 유대인(하나님의 선민)들은 메시아를 못 알아보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주님과 무관한 종교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네 믿은 대로 된다” 했을 때, 그 믿음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예를 향한 사랑, 그 노예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엎드린 믿음이었습니다. 그 즉시 하인이 낫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나병 환자는 자기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백부장은 다른 사람, 그것도 노예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내 문제”만 붙들고 기도하던 ‘나병 환자 수준’의 기도는, 반드시 “타인의 문제”를 위해서도 중보하는 ‘백부장 수준’의 기도로 발전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기도한다는 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면, 내 믿음의 지경이 훨씬 넓어집니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문제도, “아, 주님은 저렇게도 역사하시는구나” 깨닫게 되니까요.
그러나 백부장도 기도의 마지막 종착점은 아닙니다. 백부장 수준의 기도에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 마지막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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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인물,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당시는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장모는 원래 사위 집이 아니라 아들 집에서 부양받아야 할 텐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몰라도 베드로는 결혼 후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어요. 옛날에는 열병도 큰 병이어서 죽음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병 환자, 두 번째 백부장의 하인(중풍), 세 번째 베드로의 장모(열병). 전부 불치병이거나 중증병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예수님, 잘 오셨습니다. 우리 장모님 좀 고쳐 주십시오.” 하고 매달려야 할 기막힌 기회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더라.”
베드로는 한마디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베드로 장모의 상태를 보시고 손을 대어 고쳐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바로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문제로 시작되어, 백부장의 기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수준으로 넓어져 가다가, 결국에는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기도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 지점에 올라서면,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사실상 필요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동행하면, 내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할 때, 예수님께서 먼저 장모 열병의 문제를 보시고 고쳐주셨듯이 말입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속한 공동체와 사회가 새로워지고 정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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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도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한 번 더 묵상해 봅시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은 전부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설교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태복음 4장 17절)였고, 그 뒤로 산상수훈에서 본격적인 설교를 펼치셨습니다. 산상수훈의 첫 주제는 ‘복’(마태복음 5장 3절~12절)이었고, 곧이어 두 번째 중요한 주제가 ‘기도’입니다. 당시에도 사람들이 복을 잘못 이해하고, 기도조차도 자기중심적으로 하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얘들아, 이방인들처럼 한 번 말한 것을 계속 반복하지 마라. 그 사람들은 말을 자꾸 되풀이해야 신(神)이 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건 잘못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섬기는 신은 전부 형상을 가진 우상입니다. 나무나 돌, 금속으로 만든 신상이죠. 성경 말씀대로라면 그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도했어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니까, 내일 또 해야 되고, 또 해야 되고, 자기최면을 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풀이하지 말아라.”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러분, 기도할 때 전제가 뭡니까? “내가 하나님께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전제입니까? 그런 신을 왜 믿습니까? 주님은 “네가 구하기 전에 네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모르신다”라고 생각하니, 이방인처럼 똑같이 중언부언하게 되고, 주여 삼창을 매일 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내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당연히 기도 내용과 수준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자녀가 대학교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서 “아버지, 2월 말까지 등록금을 내야 해요”라고 한 번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래, 알았다. 내게 줘 봐라” 하면 됐는데, 자녀가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 등록금이요. 아버지, 등록금이요.” 이런 식으로 매일 세 번씩 반복한다면, 그 자식이 과연 아버지를 신뢰하는 걸까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걸 우리가 주기도문, 혹은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잖아요. 보통 예배 마칠 때 “자,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하면서 형식적으로 끝낼 때 쓰는데, 사실 이 기도는 “네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지금까지는 늘 네 뜻, 네 욕심만을 붙들고 기도했지?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라. 네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실현되기를 구하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할 때도, 단지 “내 배만 부르면 된다”가 아니에요. 옆집은 굶고 있는데 나만 배부르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은, “너는 이제까지 하나님 믿는다면서 죄에 무감각했지? 이제부터 죄에 민감하게 살아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결론적으로, 이 기도 내용 어디에도 “네가 40일 새벽기도 하면 네 소원 들어줄게” 같은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네가 한 단계 더 성숙해져라. 네 삶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해라. 그걸 위해 기도해라”라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전제는 “네게 필요한 건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로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 내 목숨이 있는데, 숨이 끊어지면 난 죽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기도할 때, 내가 어떤 가치로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이 목숨을 의미 있게 쓸 것인가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작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는 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매달리기 일쑤예요.
26절부터 29절까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하였느니라.”
“공중의 새 좀 봐라. 걔들이 창고 만들고 곡식을 거기에 쌓아 두냐? 들의 백합 좀 봐라. 자기 힘으로 자기를 장식하냐? 그래도 얼마나 아름답냐.” 하고 말씀하세요. 로마서 8장 18절에서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정말 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왜 이 고난을…” 하며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세우시고, 이 고난 너머에 주실 영광을 생각하면 견딜 만하다”고 깨달았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생각하건대(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 숙고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십자가에서 살려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면, 이 고난도 나를 망가뜨리려 하시는 게 아니라 세우시려 하시겠지.” 하고 이치적으로 따져 본 거예요.
기도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숙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 중에도 내 감정의 우물 안에만 갇혀서, 매일 똑같은 말의 되풀이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러분, 우리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주님께 보시기에 믿음 큰 자도 있고 믿음 작은 자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바로 “기도 내용”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기도 제목이 늘 먹고사는 문제, 잘 먹고 잘사는 문제, 자식 출세 같은 데만 머문다면, 아무리 열심히 종교생활을 해도 “믿음이 작은 자”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큰 자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 고난 속에서 “하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게 해달라. 내가 주님의 통로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시면, 여러분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기도를 드려왔는지 한 번 돌아보세요. 나는 늘 ‘나병 환자 수준’의 기도였는지, ‘백부장 수준’인지, 아니면 ‘베드로 수준’까지 갔는지. 기도 내용을 점검해 보면 내 신앙 수준이 금방 드러납니다.
31절, 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이라.”
아까 8절에서 “너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시죠.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이 전제가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 수준이 높아집니다. 이 전제가 없으면, 우리는 늘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모르실 거야”라며 이방인처럼 반복 기도만 하게 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먼저”라는 단어, 헬라어로 ‘프로톤(πρῶτον)’, “무엇보다도 먼저”입니다. “너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져 주겠다. 왜냐면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로마서에서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려고 기도해라. 그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라. 그러면 베드로가 한 마디도 기도 안 했는데도 주님께서 장모를 고쳐 주신 것처럼, 나머지는 내가 책임져 주마.” 이게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주님, 내가 지금 필요한 게 있으니 먼저 채워 주세요. 그러면 제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겠습니다”라는 식이 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거래일 뿐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언약을 먼저 믿고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 늘 “먼저 주시면 제가 갈게요”라고 하지만, 주님은 “네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와서 동행하라. 그 삶을 위해 기도해라. 그러면 네가 채워지는 걸 확인하게 될 거다”라고 말씀하시죠.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고 기도한다고 해서, 네 삶에 괴로움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일 일을 네가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내가 내일도 너에게 허락했다면, 그 내일에 필요한 것도 책임져 줄 것이니까, 너는 오늘이라는 인생에 집중해라.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우리 삶에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끕니다. 바울도 평생 지병을 앓으며 살았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행사했는데, 정작 자신은 병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건강했더라면 자칫 교주처럼 될 수도 있었겠죠. 바울은 그 병으로 인해 “내가 약할 때 강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매일 몸이 힘드니, 그때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내가 약함으로 인해 주님만 붙드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약할 때 곧 강하다”라고 한 겁니다. 그 병이 바울에게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던 거예요. 그 병 때문에 사도 바울은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는 거룩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육체적인 고통도, 믿음 안에서는 우리를 더 굳건히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우고, 깨닫고, 누려야 할 복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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