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 편향(confirmational bias)'은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입니다. 곧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으로서, 정보의 객관성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이분법적 사고에 뒤흔들리는 현상은, 저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들의 장벽을 쌓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편향, 그리고 이를 넘어 사실이 아닌 사실들이 남발되면서, 그 이면에는 ‘위협에 대한 보수 본능’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심각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전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신 ‘하나 됨’은 결코 이루기 어렵습니다. 하나 됨과 연합보다는 분열과 다툼이 훨씬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살던 시기에도 전 세계적으로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극심했습니다. 변증가로서 그는 기독교와 사회, 기독교와 정치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했습니다. 사실 정치·사회와 관련된 문제는 모두가 확증 편향적 시각을 갖고 있기에 좀처럼 결론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루이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기독교 사회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멀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접근이 아니라 종교적 접근, ‘먼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신약성경의 황금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대에 맞는 정치·사회 시스템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따로 주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어느 특정 시대나 공간에 맞는 프로그램이 다른 시대나 다른 장소에는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기독교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뿐, ‘어떻게 조리해야 하는지’ 직접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라 할 뿐,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말 문법조차도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창조적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대신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이든, 경영이든, 학문이든,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가진 재능을 최선을 다해 발휘하면서 황금률을 실천하도록 요구할 뿐입니다.
정말 그러한 삶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들까지도 그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기독교적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교회에 “세상을 이끌어 달라”고 할 때 대부분 기대하는 바는, 목회자들이 특정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기대입니다. 목회자는 “인간은 영원히 살 존재”라는 관점에서 필요한 진리를 가르치도록 따로 구별되어 특별 훈련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라는 요구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억지로 맡기려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오히려 정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셈입니다.
신약성경은 기독교적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세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분명한 단서를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 단서들만 보아도 우리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 내용을 알려 줍니다. 우선 성경은 “기독교적인 사회에는 놀고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유익하고 선한 것을 창출해 내야 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불필요하고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물건을 사도록 부추기는 광고 역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회 안에서는 허세 부리기나 으스댐 같은 행위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기독교 사회는, 오늘날 말로 ‘좌파적’ 색채가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사회는 언제나 ‘순종’을 강조합니다. 즉,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에게 모두가 순종해야 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악한 독재나 부패한 권력은 거부하겠지만, 공동체 안에서 정당한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만약 그런 사회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경제생활은 매우 진보적인 반면, 가정생활이나 예의범절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구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누구에게나 마음에 드는 점이 있겠지만, 그 전체를 전부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전체로 설계하신 분의 뜻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 앞에서 인간들은 한 부분만 취하고 다른 부분은 버리려 하기에 갈등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기독교 사회’를 들먹이며, 각자의 주장에 기독교가 동조해 주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우면서도, 각각 “나야말로 진정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사회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자 함이라기보다 자기 논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곧 ‘논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기독교 안에서 구하려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만과 편향에서 자유케 하길 원하시지만, 오늘날 극심한 확증 편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의 주장을 강화하는 데 몰두합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결론이 잘 나지 않는 것은, ‘먼 길을 돌아가는 수고’ 없이는 진정한 해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독교 사회는 대다수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까지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 사회를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으로는 쉽게 반복하지만, 실제로 이웃을 그렇게 대하고 사회를 그렇게 운영하는 길은 멉니다. 기독교인들도 ‘사적인 제도’나 ‘정치적·종교적 접근’만으로는 곧장 문제의 해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먼 길’을 통과해야만 내면이 변하고, 그를 통해 비로소 기독교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도, 한 번에 결론 내리거나 손쉬운 답안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루이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먼 길을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확증 편향’을 극복하고,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을 조금씩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리는 사회는 좌파사회인가, 우파 사회인가?
"기독교 사회는 우리 대다수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에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나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에 대해 말할 때에도 우리는 좀 더 내면적인 문제로, 즉 사회적인 문제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적인 문제도 본질적으론 종교적인 접근을 통해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빨리 집에 가는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핵심 요약
기독교의 정치 프로그램: 기독교는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같은 원칙은 명확히 제시하지만, 이를 어떻게 정치·사회 제도로 구체화할지는 각 시대와 인간에게 맡긴다.
기독교적 사회의 두 얼굴: 경제·사회 구조 면에서는 ‘좌파’처럼 공동체적이고, 가정·윤리 면에서는 ‘우파’처럼 전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동시에 가짐. 결국 인간이 좋아하는 부분과 싫어하는 부분이 섞여 있어, 누구도 전부 다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 실현이 어려운가?: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 희생’을 싫어하기 때문. 더구나 각자 정치적 확증편향에 빠져, 기독교가 “내가 믿고 싶은 주장”을 지지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교회·목회자가 구체적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먼 길을 돌아가는 길: 결국 개인의 영적·도덕적 거듭남(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독교 사회를 꿈꾸지만 정작 내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셈이 된다.
루이스는 “교회는 다른 여타 정치·경제 제도를 대신하여 구체 방안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내면적·영적 성숙을 통해 비로소 사회의 좌·우 대립이 해소될 실마리를 찾으리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이 언제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도 하였고, 그래서 더욱 “우리는 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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